소설리스트

대몽주-220화 (220/1,214)
  • 220화. 포위망을 뚫고

    잠시 후, 심협의 발밑에서 하얀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뒤이어 비스듬한 달그림자도 나타났다. 사방의 허공에는 어디선가 녹색 빛이 점점이 나타나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심옥, 백벽. 와서 내 어깨를 잡으시오. 그대들을 데리고 떠나겠소.”

    심협이 때가 무르익었음을 보고 즉시 외쳤다.

    심옥과 백벽 두 사람은 그 소리를 듣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심련(沈璉) 먼저 데리고 가십시오.”

    심옥은 일가 사람들 중 나이가 가장 어린 한 명을 한 손으로 떠밀었다.

    “이 아이들 먼저 데려가십시오.”

    백벽도 거의 동시에 연기기 소녀 두 명을 떠밀면서 말했다.

    심협은 논쟁할 틈 따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 세 사람에게 자신의 어깨를 잡게 하고는 뒤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네 사람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심옥을 비롯한 사람들은 이를 보고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몇 놈이 도망갔어!”

    거력신원은 상황이 잘못됐음을 깨닫고는 분노한 듯 소리쳤다.

    “형님, 한꺼번에 손을 씁시다!”

    산원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좋다.”

    거력신원은 그렇게 대꾸했고, 둘은 동시에 몸을 날려 백소운 좌우 양편에 섰다. 그러더니 각자 도끼와 추를 치켜들고 금빛 장막을 세차게 내리쳤다.

    * * *

    심협은 발걸음이 갑자기 무거워져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그는 급히 몸을 가누고는 방금 데리고 나온 세 사람을 잘 부축해 일으킨 뒤, 주위를 살폈다. 겹겹이 암초가 우뚝 솟아 있고 파도가 몰아치는 것을 보고서야 뜻밖에도 어느 낯선 만(灣)에 와 있음을 알게 됐다.

    하지만 지금은 자세히 살필 겨를이 없었다.

    “잘 숨어 있거라. 무슨 일이 일어나도 떠나서는 안 돼. 내 곧 돌아오마.”

    세 사람은 창백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심협의 신신당부에 입술을 꾹 다문 채 붉어진 눈으로 끄덕였다.

    심협은 속으로 탄식한 뒤, 곧바로 몸을 돌려 다시 을목선둔을 시전했다. 그리고는 앞서 왔던 궤적을 따라 한 걸음도 틀리지 않고 되돌아갔다.

    그의 몸이 다시 부동명왕진 안으로 들어왔을 때, 백소운은 이미 머리칼이 산발이었고,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였다. 사방에 앉아 있던 신명의 허상들도 이미 거의 사라질 정도로 빛이 옅어져 있었다.

    심협은 그에게 한마디 할 틈도 없이 다시 을목선둔으로 세 사람을 데려갔다.

    이를 본 거력신원과 요괴들은 큰 수치와 모욕감을 느낀 듯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연달아 금빛 장막을 공격해댔다.

    소운은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상태로도 몸에서 일곱 빛깔 불광이 빛났다. 그들을 비추는 이 빛에 네 신명의 허상은 마치 다시 생명을 얻은 것 같았고, 금빛 장막도 더욱 견고해졌다.

    “저놈이 미쳤구나? 신혼(神魂)을 불태우다니…….”

    산원처럼 침착한 자도 이 모습에는 깜짝 놀랐다.

    “흥! 그래봐야 저놈은 얼마 버티지 못한다. 공격하라!”

    거력신원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멀리 하늘에서는 이미 금빛 줄기가 또다시 떨어져 내렸다. 준지가 여전히 쉬지 않고 빛의 장막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백벽과 사람들은 불광에 휩싸인 백소운을 보며 마치 불타(佛陀)의 강림을 보는 듯했다. 이들은 비통한 심정을 금할 길 없어 눈물을 머금고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심협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이마는 이미 땀범벅이었고, 얼굴도 약간 창백했다. 가뜩이나 풀과 나무의 정기가 부족한 곳에서 을목선둔을 연이어 썼으니 기력 소모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도 없었고, 멈출 생각도 없었다.

    다시 세 사람을 데려갔던 그가 돌아 왔을 때, 결국 법력 소모를 견디지 못하고 휘청거리다 고꾸라졌다.

    하지만 심옥이 와서 부축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다시 일어서 있었다.

    “그러다가는 몸이 버티지 못할 거요. 잠깐 쉬었다 계속하시지요.”

    백소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매우 낮고 묵직했다.

    심협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백소운의 몸에서는 불광이 이미 어두워진 상태였다. 마치 기름이 바닥난 등불처럼 최후의 불꽃을 빛내는 듯했다. 네 신명의 허상도 마지막 숨만 내쉬고 곧 흩어져 사라지려 했다.

    그는 부동명왕진이 버티지 못할 것임을, 백소운 역시도 버티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먼저 그대를 데리고 가겠소.’

    심협은 끝내 사심이 동하여 백소운에게 신식으로 목소리를 전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시오. 내가 버티고 있지 않으면 형님은 아예 둔술을 쓸 겨를조차 없을 거요! 이게 마지막 기회이니, 저들 중 누구를 데리고 갈지나 결정하시오!”

    백소운은 신혼의 힘이 거의 다 소진되어 이미 신식으로 소리를 전할 수 없었다.

    남은 사람들은 이 소리를 그대로 들었으나, 누구도 먼저 떠나려고 다투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소녀의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앞으로는 곁에서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심옥은 심화원을 향해 몸을 굽혀 절하고는 돌아서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는 백 선배님을 도와 진을 지키고자 하니, 아버지를 모시고 떠나주십시오.”

    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낡은 불경 옆에 앉아 신명의 허상이 흩어지길 기다렸다가, 바로 법진을 지키는 책임을 이어받았다.

    “나도 노조님과 함께 이 법진을 지킬 것이오. 백가의 자녀가 어찌 나 혼자 살 수 있겠소?”

    백벽도 스스로 기회를 포기하고 산호염주 옆에 앉았다.

    “옥아, 너는 심씨 집안 미래의 희망이다. 아비 된 자가 어찌 너를 남겨둘 수 있겠느냐? 이제부터는 네가 심가의 가주니라.”

    심화원은 자신의 딸을 일으켜 세우며 그렇게 말했다.

    “가주께서 남으신다니, 저도 곁을 지키겠습니다.”

    심전은 그간 여러 차례 부상을 입으면서도 살아남았지만, 지금 이 순간 죽음을 각오했다.

    심옥이 막 뭔가를 말하려는데, 백소운이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백벽, 심옥. 때로는 죽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으나, 살아 있어야 더 많은 것을 감당해낼 수 있는 법일세. 자네들은 각자 집안의 버팀목들이니, 앞으로 져야할 더 무거운 짐이 있음이야. 심 대형, 그들 세 사람을 데리고 가시오.”

    심협은 그 말을 듣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사람들도 전혀 반대하지 않고 그들 중 두 사람이 나와 다른 두 보물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백소운이 그들에게 부동명왕의 주문을 전수해주자, 주문을 읊조리는 소리가 뒤이어 끊임없이 들리기 시작했고, 이미 무너질 듯했던 금빛 광진이 다시 빛을 발했다. 그 위에서는 심지어 어렴풋한 불영까지 응결되었다.

    나머지 사람들의 시선은 평온하게 심협과 백벽, 심옥과 다른 백가 후손 한 사람에게 가 닿았고, 그들이 떠나는 것을 눈으로 전송했다.

    반면 심협의 시선은 피로 물든 백소운의 등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윽고 그가 다시 을목선둔을 시전했다.

    “아버지!”

    심옥의 부르짖음과 함께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났고, 그들의 모습은 사라졌다.

    곧 하늘에서 빛기둥이 떨어져 내리며 온 명경호가 산산조각 났다.

    * * *

    심협은 세 사람을 데리고 흔들리는 걸음으로 수많은 녹색 빛을 뚫고 걸었다. 하지만 그의 법력은 엄청나게 소모되어 속도가 나지 않았고, 발밑에 어른거리던 비스듬한 달그림자도 흐릿해졌다.

    문득 심협은 발을 헛디뎌 몸이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땅을 밟았지만, 그 와중에도 심옥을 비롯한 세 사람을 데리고서 비틀비틀 섬을 빠져나왔다.

    이번에 그는 아까 그 작은 만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탁 트인 지형의 거대한 만으로 갔다. 저 앞으로 우뚝 솟은 암초 기슭에는 수백수천에 달하는 온갖 요족들이 가득 서서 깃발을 흔들며 울부짖고 있었다.

    더 먼 곳의 해수면에서는 셀 수 없는 각양각색의 수족(水族) 요괴들이 엄청난 숫자의 새우와 게로 이루어진 군사들과 한 데 뒤엉켜 격렬히 싸우고 있었다. 후자가 세운 깃발 중에는 동해(東海)와 용궁(龍宮), 오(敖)라는 글자가 많았다.

    “이건……?”

    심협은 한 손으로 암초를 짚고 서며 눈썹을 찡그렸다.

    “요족이 동해용궁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여기가 동해만입니다!”

    백벽이 눈앞의 상황을 한눈에 알아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온 우주(禹州)가 이미 함락되어 요족이 바다로 진격한 듯합니다.”

    심옥은 여전히 눈물을 머금은 채 대답했다.

    그때, 앞쪽 해수면에서 간간이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높이가 족히 백 장은 될 법한 파도가 솟구쳐 올랐는데, 시간이 지나도 해수면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파도 위에는 용궁의 뛰어난 장수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각자 정교한 갑옷을 입고 있어 기백이 넘쳐 보였다.

    그 우두머리 중 한 사람은 산호 옥의(玉衣)를 입었고, 손에는 이화금창(梨花金槍)을 들었으며, 긴 물빛 머리칼을 금관으로 묶어 올린 채였다. 그의 앞이마 가까이에는 짧은 뿔 두 개가 우뚝 솟아 있었고, 젊은 얼굴은 더없이 영준했으며, 두 눈에는 신묘한 빛이 담겨 있었다. 한눈에 봐도 늠름한 자태가 느껴졌다.

    그와 멀리 마주 보이는 반대편 바다에서도 똑같이 높은 물결이 일었고, 위에는 마찬가지로 일고여덟 개의 인영(人影)이 서 있었다.

    이쪽 우두머리는 검은 장포를 입었을 뿐 몸에 갑옷이나 투구 따위는 없었다. 머리에는 여덟 면의 검은 관을 썼고, 길고 검은 머리칼은 몸 뒤로 늘어진 채 온몸에 마기를 휘감고 있어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 옆에 선 사람들 중에도 갑옷을 입은 자는 없었다. 그중에는 전에 제자와 손제자들을 보내 심협을 추적했던 추한 얼굴의 땅딸막한 노인도 있었다.

    양쪽은 말없이 대치중이었는데, 그 땅딸막한 노인이 먼저 떨치고 일어났다. 그는 목 아래쪽이 불룩하게 부풀더니 간간이 꾸룩거리는 소리를 내며 커다란 두꺼비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우윳빛 액체가 뿜어져 나와 마치 우유로 만든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에 바닷물의 절반은 순식간에 우윳빛으로 물들었고, 용궁 쪽 사람들을 향해 뻗어나갔다. 지나간 자리마다 수많은 수중생물이 독살당했는데, 채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전에 썩어 없어졌다.

    우윳빛 바닷물이 넘실넘실 소용돌이칠 무렵, 안개도 가닥가닥 피어올랐다. 이 안개에서는 알 수 없는 냄새가 뿜어져 나왔는데, 이를 본 양쪽의 수사들은 다들 너도나도 몸을 보호하는 보광(寶光)을 빛냈다.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입과 코를 가리는 자들도 있었다.

    “공격!”

    이마에 짧은 뿔이 난 영준한 남자가 외친 순간, 옆에 서 있던 비대한 몸집의 노인이 온통 푸른 몸을 날려 곧장 바닷물 속으로 떨어졌다.

    그가 바다에 막 빠질 때, 몸 아래에서 푸른 빛이 솟구치며 빨판이 가득 돋아 있는 유연한 촉수 여덟 개가 허리 아래쪽에서 생겨나 물을 미친 듯이 휘젓기 시작했다. 그러자 삽시간에 검은 액체가 그의 몸 아래에서 콸콸 쏟아져 나와 그 우윳빛 바닷물과 한데 뒤섞이더니, 거대한 공기방울이 부글부글 솟아나왔다. 바닷물은 여전히 혼탁했지만, 그 속에 담긴 독기는 중화되어 버린 것 같았다.

    푸른 피부의 노인이 바닷속에서부터 검은 액체를 내뿜으며 솟구쳐 하늘로 돌진했다.

    “오독(烏毒) 이 늙다리 놈아! 어디 한번 해보자꾸나!”

    노인이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지르자 오독이라 불린 땅딸막한 두꺼비 노인의 동공이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오독은 이내 험악한 얼굴로 뛰쳐나갔다.

    “오냐, 분파아파(奔波兒灞) 이놈아! 네가 죽고 싶은 게로구나!”

    두 사람은 이내 한 데 얽혀 싸웠다.

    한편, 용궁 측의 우두머리인 영준한 청년은 손에 든 창을 꼿꼿이 세우더니 몸을 날려 상대편 우두머리인 검은 옷의 사내를 곧장 찌르려 했다.

    검은 옷의 남자는 삼지창을 꺼내 맞붙었는데, 두 사람이 교전을 벌이는 곳에는 금빛과 마기가 사방에 흩날려 누구도 감히 가까이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둘은 점점 높은 곳으로 솟아오르며 싸웠고, 이내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를 신호로 하듯 양측이 잇따라 하늘로 날아올라 한데 엉켜 교전을 벌이면서 서로 싸우고 죽이는 소리와 칼날 부딪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심옥과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 심장이 오그라들었지만, 심협은 개의치 않는 듯 한쪽에 가부좌를 튼 채 법력 회복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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