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218화 (218/1,214)
  • 218화. 부동명왕진(不動明王陣)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네가 나를 기억할 줄은 더욱 생각지도 못했지.”

    심협은 어째서인지 서글픈 심정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그대와 내가 벗으로 지낸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때의 경험이 내 시야를 넓혀주었고 나에게 많은 이득을 주었지. 그러니 당연히 잊을 수가 없지 않겠는가? 참, 그대들은 어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가?”

    소귀의 물음에 심협은 눈빛을 살짝 굳히며 말했다.

    “대승기 요괴에게 쫓겨 이곳으로 도망 오게 됐어.”

    “대승기라…… 지금껏 달아난 것만 해도 정말 쉽지 않았겠어.”

    소귀는 그 말을 마치고는 커다란 머리를 갑자기 치켜들었다. 금빛 두 눈동자가 가만히 수면 쪽을 응시했다.

    “왜 그러느냐?”

    심협이 조금 불안해한 듯 물었다.

    “강력한 기운 하나가 다가오고 있네. 속도가 매우 빨라!”

    소귀가 말했다.

    “그 금빛 매 요괴가 쫓아왔구나! 내 가봐야겠다.”

    심협은 굳은 얼굴로 말하고는 몸을 솟구쳐 곧장 수면을 향해 돌진했다.

    호수에 한 줄기 물결이 일어나고 수면이 갑자기 나뉘더니 그 안에서 심협의 몸이 튀어나와 수면 위에 내려섰다.

    그가 고개를 들어 보니, 금색 빛줄기 하나가 별똥별처럼 쌩하니 하늘을 가로질러 수면을 향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지면에 떨어지는 순간, 몸의 금빛은 사라져버렸고, 심협은 그 안에서 나타난 사람을 본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엷은 웃음을 내비쳤다.

    “소운!”

    그가 목소리 높여 외쳤다.

    백소운의 시선은 심협과 그 뒤의 작은 섬을 훑었고, 사람들이 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협곡 전체가 평지가 되었던 것이오? 만약 백벽이 지닌 인장표식이 아니었더라면 내 찾아오지 못했을지도 모르오.”

    백소운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가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그 금빛 매 요괴가 찾아오는 바람에, 우린 협곡 아래 땅 밑바닥의 지하천으로 달아나 곧장 여기까지 도망쳐 왔소.”

    심협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진해관 쪽은 검문관보다도 더 일찍 함락됐다 하오. 그 안에는 요마들이 둥지를 틀었을 테지. 나는 정찰하러 갔다가 매우 예민한 청산요(聽山妖)에게 발각되어 추격전을 벌였소. 한동안 벗어나지 못해 시간을 지체했는데, 모두들 무사하다니 다행이오.”

    백소운은 심협의 말을 듣고 무거운 표정으로도 웃으며 말했다.

    “그 금빛 매 요괴가 우리를 주시하는 모양이니, 최대한 빨리 지하천 통로를 찾아 진해관을 통과해야만 하오.”

    “지하천의 물길은 복잡하게 얽혀있어 짧은 시간 안에 찾지 못할 겁니다.”

    심협이 생각 끝에 의견을 제시하자 백소운이 조금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그건…… 마침 물어볼 만한 벗이 하나 있소.”

    심협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벗?”

    심협의 말을 들은 백소운은 영문을 몰라 했다.

    ‘소귀, 잠깐 나타나 줄 수 있느냐?’

    심협이 신식으로 물었다.

    한동안 아무 대답이 없기에 심협이 다시 물어보려는 순간, 물 위에 갑자기 소용돌이가 떠오르더니 몽롱한 푸른 빛의 사람 형체가 그 안에서 나타났다. 평범한 체구에 용모가 반듯한 사내는 마흔 전후로 보였지만, 허리는 약간 굽어 있었다. 몸에는 먹색 장포를 입었는데, 몸 옆으로 늘어뜨린 두 손은 놀랍게도 무릎까지 내려왔다.

    백소운은 그가 요혼(妖魂)이 변하여 만들어진 존재임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반사적으로 긴장했다. 일단 그 정체에 놀랐고, 방금 전까지 상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에도 놀랐다.

    “미안하네. 진짜 몸은 일단 움직였다 하면 기척이 너무 커서 이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네.”

    먹색 옷의 남자가 심협에게 잠깐 공수하며 말했다.

    “이 분은……?”

    백소운이 심협에게 물었다.

    “여기는 산원 도우라고 하오. 오래전, 나의 계약 소환수였소. 천 년 만에 만나게 됐지. 이 분은 백소운이다. 내 오랜 절친이야.”

    심협이 서로를 소개해주었다.

    “역시 그냥 소귀라고 부르는 게 좋겠어.”

    먹색 옷의 남자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도우의 신통력이 비범하여 그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소.”

    백소운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나는 일 년 내내 이 명경호(明鏡湖) 바닥에서 귀식(*龜息: 호흡법의 일종으로, 거북이처럼 호흡하며 먹고 마시지 않으면 장생할 수 있다고 함)하여, 이미 백여 년간 움직이지 않았소. 몸의 기운이 일찍이 이곳과 하나가 되었으니 나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을 게요.”

    소귀가 설명을 끝내자 심협이 물었다.

    “소귀, 너는 이곳에 오랜 세월 자리 잡고 있었으니 진해관 안팎으로 통하는 지하천 통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테지? 우리는 이곳을 지나 진해관 안으로 향하려 한다.”

    “우주(禹州)는 바다와 가까워 지하에 수굴(水窟)이 많긴 하네. 이 명경호 아래에도 서로 통하는 물길이 적지 않지. 허나 찾아본 적이 없어서 진해관 안으로 통하는 지하천이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군. 잠깐 기다리게. 내 자손들과 후배들에게 일러 알아보게 할 테니까.”

    소귀가 거북이답게 느릿느릿 말하자 백소운이 가볍게 포권을 했다.

    “수고스럽지만 좀 부탁드리겠소.”

    먹색 옷의 형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휙 돌려 아래에 떠오른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더니 곧 사라져 버렸다.

    심협과 백소운은 물 위를 걸어 호수 가운데의 작은 섬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의 표정은 다소 어두워졌다.

    “진해관 쪽 상황이 그리 까다로울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소. 그 청산요가 정말 그리 기민하게 잘 살핀단 말이오?”

    심협이 말했다.

    “나는 성에 감히 다가가지조차 못했소. 거리가 족히 백 장 밖은 되었고, 일부러 기운을 숨기기까지 했는데도 그놈이 기척을 찾아내더군. 뒤이어 대승기 개 요괴가 성 밖으로 튀어나와 내가 숨어 있는 곳으로 곧장 달려들었소. 그놈을 떨쳐내느라 제때 돌아오지 못했고, 이후 심 대형과 사람들을 찾아가게 된 것이지요.”

    백소운이 화가 나서 씩씩대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하 비밀통로를 찾아낸다 해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겠군.”

    심협이 턱을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듯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제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게 되었소. 보시오, 형님. 이 작디작은 우주 경계 안에 이렇게나 많은 대요들이 도사리고 있으니, 무슨 큰일을 도모하면서 계속 이곳에 머무른다면 절대 그리 좋은 일이 아닐 것이오.”

    “소운, 그대의 말이 옳소. 나도 그런 느낌이 들었지. 결국 위험을 무릅쓰고 시험해볼 수밖에 없소.”

    심협이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그 금빛 매 요괴가 땅속 지하천까지 형님을 따라왔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그놈이 수맥의 자취를 따라 이곳을 찾아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구려.”

    “그래서 나도 잠시 휴식을 취하고 떠날 생각이었소. 그러다가 소귀를 만나 잠깐 지체된 것인데, 다행히도 백 도우가 찾아온 것이오.”

    “불행 중 다행이라 칩시다. 그 산원 도우라는 분이 정말 우리를 도와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길을 찾기만 한다면 바로 떠나야 할 것이오. 다만 그전에 조금 더 대비를 해둬야겠소.”

    백소운이 잠깐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기에 심협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대비? 무슨 대비를 한단 말이오?”

    “이 호수 중앙에 있는 섬은 면적이 크지도 작지도 않아 부동명왕진(不動明王陣)을 설치하기에 딱 적당하오.”

    “부동명왕진?”

    백소운의 말에 심협은 또다시 되묻는 수밖에 없었다.

    “부동명왕(不動名王)은 바로 불문(佛門)의 부동보살이오. 부동이란, 자비심이 견고하여 흔들림이 없다는 것. 화생사에서 은밀히 전해져 내려온 일종의 방어법진이지요. 불문의 기물을 법진의 앞머리로 삼고, 다섯 명의 수사가 동서남북 그리고 중안의 오극(五極)에 지키고 서서 부동명왕 주문을 읊으면 매우 강력한 방어력을 발휘할 것이오.”

    백소운의 설명에 심협은 내심 기뻐했다.

    “그런 것이었군! 일이 늦어지면 좋지 않으니 어서 설치합시다.”

    백소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손목에 채워진 은색 팔찌 하나가 갑자기 빛을 내더니, 뒤이어 누렇게 낡은 불경 한 권이 나타나 그의 손에 들어왔다. 이어서 산호 108알을 꿰어 만든 염주 한 꿰미와 붉은색을 띤 구리 발우(*鉢盂:절에서 쓰는 승려의 공양 그릇) 하나가 차례로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백소운은 요풍과의 교전 때도 사용했던 석장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내가 지닌 쓸 만한 불문의 법보는 이 네 개뿐이오. 하나가 모자란다면 일을 성사시킬 수 없을 터인데…….”

    백소운이 고민에 빠진 듯하자 심협이 퍼뜩 어떤 생각이 떠올랐고, 곧장 반월환을 꺼냈다.

    “이걸 좀 보시오. 쓸 수 있겠소?”

    백소운은 석장을 한쪽에 꽂아둔 채 반월환을 받아들고 법력을 주입하며 시험해보았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등급이 높아 어찌어찌 쓸 수 있기는 하나, 안타깝게도 불문의 향불세례를 받지 않아 불가의 영성을 지니고 있지 않으니 쓸 수 없소.”

    심협은 그 말에 다소 실망하며 곧 다른 수사들을 불러모아 물어봤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두 사람이 한창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고 있을 때, 백소운이 문득 한 가지를 떠올리고는 즉시 석장을 집어 들었다.

    “생겼소.”

    그러더니 갑자기 한 손으로 석장 끝부분에 박혀 있는 정명주를 잡았다. 그리고는 두 손에서 각각 빛을 번쩍이며 동시에 힘껏 끌어당기자, 석장과 정명주 사이에 가닥가닥 금빛 광선이 딸려 나왔다.

    “후우…….”

    백소운이 숨을 한 모금 가볍게 내뱉자 이 입김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 금빛 광선들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그렇게 정명주와 석장은 곧 분리되었다.

    “이것도 되는 거요?”

    지켜보던 심협이 의문을 금치 못하고 물었다.

    “이 정명주는 본디 불문의 보물이오. 석장과는 원래 다른 물건이었는데, 편하게 사용하려고 함께 연성해 놓은 것뿐이지. 이제 발등의 불은 껐구려.”

    백소운이 웃으며 설명하자 심협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소운은 곧 옛 불경과 산호염주를 그에게 넘겨주고는 각각 정동쪽과 정북쪽에 영기가 모인 곳을 찾아 돌로 간단히 받침대를 쌓고 그 위에 올려놓으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심협이 그 말에 따랐을 때는 백소운도 다른 보물들을 모두 정해진 위치에 가져다 둔 뒤였다.

    백소운은 심협을 포함해 심옥, 심화원 그리고 백벽을 불러와 부동명왕 주문을 가르쳐주었다.

    “이 주문을 기억한 뒤 각자 돌 받침대 하나씩을 지키시오. 내 필요하면 경고를 줄 테니, 그대들은 즉시 부동명왕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되오.”

    백소운이 당부했다.

    “알겠소.”

    말을 마친 사람들은 각자 동서남북 네 곳의 돌 받침대로 향했다.

    심협은 가부좌를 튼 채 소귀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좌선을 시작했다.

    * * *

    반 시진이 훌쩍 지났다.

    소귀 쪽에서는 아직 움직임이 없었으나, 명경호 주변은 시끌시끌해지기 시작했다.

    “왔다!”

    작은 섬 한가운데 나무 아래 가부좌를 틀고 있던 백소운이 두 눈을 번쩍 떴다. 이는 입으로 내뱉은 말인 동시에 신식으로 전해진 소리이기도 했기에, 심협을 비롯한 사람들 모두가 분명히 들었고, 모두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높은 하늘에서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거대한 금빛 그림자가 먼저 나타났다. 바로 금빛 매 요괴, 준지였다.

    그 뒤를 이어 사방의 호수 기슭에서 크고 작은 그림자들이 줄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인간의 몸에 짐승의 머리를 한 기괴한 형상의 여러 요족들이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피처럼 새빨간 갑옷을 입은 원숭이였다. 키는 거의 1장에 달했고, 어깨에는 거대한 개산부(*開山斧: 중국 신화속 이랑신二郞神이 사용했다는 괴력의 도끼) 한 자루를 걸친 채였다. 그 도끼자루 위에는 두 귀가 엄청나게 큰 노란 털의 작은 원숭이가 앉아 짧은 두 다리를 흔들어대며 쉬지 않고 깩깩 소리를 질러댔다.

    ‘전부 몰려올 줄이야……. 저 하얀 원숭이가 바로 진해관을 지키고 있던 대승기 요괴 거력신원(巨力神猿)이고, 그의 도끼 위에 앉아 있는 저 귀 큰 원숭이가 바로 청산요라는 요괴요!’

    백소운이 눈빛을 반짝이며 신식으로 목소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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