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217화 (217/1,214)
  • 217화. 그대인가

    뒤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고함에 심협이 슬쩍 돌아보니, 한 줄기 금빛이 빠른 속도로 쫓아왔다. 그 속의 금빛 그림자는 화살 마냥 꼿꼿하게 뒤쫓아 날아오고 있었다.

    심협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고, 눈에는 초조한 기색이 스쳤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단전과 법맥 속의 법력을 불러일으켰다. 온몸에서 푸른 빛이 치솟으며 물결을 세차게 몰아세웠다. 저 아래 물결이 수십 마리의 물 구렁이와 함께 푸른 빛을 내뿜었다. 그러자 세차게 용솟음치던 물결의 속도가 순식간에 곱절로 빨라져 준지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그가 미처 한숨 돌리기도 전에 뒤에서 울부짖음이 다시 한번 들리더니, 금색 빛줄기 속의 남자도 속도를 높였다. 이제 곧 따라잡힐 것만 같았다.

    “말해! 그 대승기 수사는 어디에 있느냐?”

    준지는 한 손을 앞으로 뻗으며 호통 치듯 물었다.

    이윽고 그의 장심에서 금광이 뿜어져 나오면서 허공에 커다란 금빛 매 발톱이 나타나더니 심협을 움켜쥐려 했다. 날카로운 발끝과 심협의 옷자락은 불과 1촌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심협은 몸을 뒤로 젖히며 손목을 홱 휘둘렀다. 그러자 옷소매 사이에서 갑자기 여러 줄기 광채가 번쩍였다. 그에게 남은 낙뢰부(落雷符)가 남김없이 우르르 튀어나온 것이다.

    일곱 장의 부적이 위아래로 엇갈려 날아가는 순간, 부적의 무늬가 빛을 발하더니 하얀 빛줄기가 동시에 번쩍였다.

    꽈르릉!

    일곱 개의 사나운 천둥소리가 중첩됐고, 일곱 갈래 굵은 번개 기둥이 엇갈려 나와 서로 충돌하며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한 구형(球形) 번개 일곱 덩이가 터져 나왔다. 그 위에서는 번갯불이 줄줄이 솟아나와 신기(*神祇: ‘천신天神’과 ‘지기地祇’의 준말로, 하늘과 땅의 신을 가리킴)의 번개 채찍처럼 거침없이 사방을 휩쓸었다.

    치지직!

    번개 튀는 소리와 함께 준지는 몸을 솟구쳐 번갯불의 빈틈으로 뚫고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공 모양 번개들 사이에는 빈틈이 있는 것 같아 보여도, 실은 보이지 않는 힘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준지의 몸이 번개 틈새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옷소매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번개 줄기에 스치며 타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촘촘하게 이어진 번개 줄기들이 마치 폭죽처럼 연이어 터져나가며 보이지 않는 인력(引力)이 아교풀 마냥 그의 몸에 들러붙었다.

    하지만 정작 준지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 힘이 그를 휘감는 동시에 주위의 구형 번개덩이들이 무슨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빠르게 줄어들면서 모여들어 그의 몸을 향해 부딪쳐온 것이다.

    쾅!

    일곱 개의 구형 번개들이 갑자기 하나로 합쳐졌다가 폭발하자, 거대한 폭풍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번개 줄기들을 휩쓸며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심협은 뒤에서 폭풍이 밀어닥치는 것을 느꼈지만, 황정경 공법을 운공하여 이 폭풍의 충격을 이용해 속도를 높여 지하천 하류 쪽으로 빠져나갔다.

    그 순간, 뒤에서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다. 번개가 폭발한 충격으로 지하천의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돌들과 흙덩이가 금세 뒤쪽 강줄기를 막으면서 지하천 통로를 거의 갈라놓았다.

    심협은 온몸이 땀에 푹 젖은 채 그제야 긴 한숨을 묵직하게 내뱉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마음을 놓기 이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계속 물살을 몰아 하류를 향해 쏜살같이 내달렸다.

    그리고 한 시진 정도를 더 내달린 후에야 어느 절벽 아래 지하수로(地下水路) 입구를 빠져나와 넓고 푸른 호수에 이르렀다.

    호수 한가운데에는 둘레가 백 장도 채 되지 않는, 풀들이 무성하고 낮은 관목덤불이 빽빽하게 우거진 작은 섬이 있었다. 섬 가운데 높이 솟은 곳에만 수십 장 높이의 용수(*榕樹: 인도가 원산지인 벵골보리수, 반얀나무라고도 함)가 한 그루 자라고 있었다.

    줄기가 곧고 가지와 잎이 무성한 용수는 마치 커다란 녹색 우산처럼 섬 중앙에 버티고 서 있었다.

    먼 호숫가를 흘끗 바라본 심협의 시선은 갑자기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온몸의 법력이 곧 바닥난 것은 물론이고 지금껏 긴장을 늦추지 못했던 탓에 정신력도 마침내 한계에 이른 것이다.

    심협은 물 구렁이를 재촉해 호수 한가운데의 작은 섬으로 헤엄쳐 가도록 했으나,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또한 물 구렁이들의 광택도 갈수록 어두워졌고, 몸체도 점차 흐릿해져갔다.

    물 구렁이들은 사람들을 섬 기슭에 내려주기가 무섭게 촤르륵 소리와 함께 완전히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심협은 눈을 뒤집은 채 호숫물 안으로 쓰러져버렸다.

    심옥과 사람들이 황급히 달려와 그를 기슭으로 옮겼다.

    “선배님께서는……?”

    “법력과 정신력 소모가 커서 혼절하셨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오.”

    백벽이 살펴본 뒤 말했다.

    “백 선배님께서는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고 심 선배님께서는 혼절하셨으니, 이제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심옥은 기슭 여기저기 드러누운 사람들을 둘러보며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백벽은 잠시 생각하더니 심협의 소매를 뒤져 은종번을 다시 꺼냈다.

    그도 이 보물을 사용할 줄 알았다. 다만 법력이 심협만큼 심후하지 않아 긴 시간 유지할 수 없을 뿐.

    “우선 모두를 이끌고 섬 중앙의 나무 아래로 갑시다. 내가 보호벽을 쳐 자취를 숨길 테니, 심 선배님께서 깨어나시기를 기다려 다시 계획을 세워보면 될 듯하오.”

    백벽이 긴장한 표정으로 말하자 심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리하여 사람들은 심협을 들쳐 메고 섬 중앙의 용수 아래에 이르러 잠시 휴식을 취했다.

    * * *

    한 시진이 넘었을 때, 심협은 몽롱한 상태에서 무슨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그 소리는 귓가에 거듭 맴돌았다.

    ‘그대인가……? 그대인가……?’

    심협은 몸을 벌떡 일으켜 앉으며 소리쳤다.

    “누구냐!”

    그의 외침에 주위에 있던 심옥을 비롯한 사람들 모두 깜짝 놀랐고, 백벽도 평정심이 깨져 은종번의 효력마저 잠시 중단되고 말았다.

    “선배님?”

    심옥이 황급히 다가오자 심협은 조금 멍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 누군가 내 귓가에 대고 말하지 않았소?”

    “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심옥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백벽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심협을 보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꾼 것인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심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그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그대인가?’

    심협은 그제야 그 소리는 귓가가 아니라 마음속에 울려 퍼지는 것임을 알아 차렸다. 누군가 그의 마음에 목소리를 전해온 것이다!

    “내 꿈을 꾼 모양이니 다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하하!”

    그는 멋쩍은 듯 웃으며 사람들을 안심시키고는 용수에 등을 기댔다.

    “선배님, 정말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잠시 좌선하며 호흡을 골라야겠군요.”

    사람들이 반신반의하자 심협은 다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부좌를 틀고 원을 감싸 안은 자세를 취했다.

    사람들은 심협을 방해하지 않고 뿔뿔이 흩어졌다.

    사실 심협은 좌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두 눈을 감은 채 신식을 내보내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신식을 다시 거두어들였다. 심옥을 비롯한 사람들의 법력 파동 외에는 다른 것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협은 근심이 깊어만 갔다. 자신에게 소리를 전한 존재가 무엇이든 간에, 그의 신식 탐사 범위 밖에서도 소리를 전할 수 있거나, 그의 곁에 숨어 있어 신식으로도 알아채지 못한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둘 중 어느 상황이든 그에게는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 그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정말 그대인가? 심협…….’

    심협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의 얼굴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누구요? 어디 있는 거요?’

    그는 의아함을 꾹 눌러 참고 똑같이 신식으로 소리를 전하여 답했다.

    ‘그래, 헤어진 지 너무도 오래되었으니 그대가 나를 잊어버릴 만도 하지.’

    그 소리는 다시 한번 들려왔지만, 심협에게는 여전히 낯설게 느껴졌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나를 어찌 아시오?’

    심협이 다시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싶거든 호수 밑바닥으로 와서 이야기하세.’

    그 목소리는 뜻밖에도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며 심협을 초대했다.

    잠시 망설이던 심협은 이내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시오. 내 호수 밑바닥에 잠깐 수련하러 갔다 오겠소.”

    그는 사람들에게 한마디를 남기고는 말릴 틈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 호수에 뛰어들었다.

    이어서 그는 곧바로 몸을 가라앉혀 물 밑바닥으로 향했다.

    그가 손으로 피수결을 맺자 몸에서 푸른 빛이 번득이며 곧 한 겹의 광막이 몸을 뒤덮었다. 한데 푸르게 보이는 이 호수는 깊이가 백여 장이나 되어 절반밖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호수 밑 깊은 곳에 이르자 사위는 이미 온통 캄캄해졌고, 오직 심협을 감싼 푸른 빛만이 외로운 등불처럼 빛났다.

    심협은 안력을 돋운 채 어슴푸레한 푸른 빛을 빌려 사방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호수 밑바닥은 텅 비어서 물고기조차 몇 마리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레 나타난 그 때문에 놀란 자라 따위가 진흙 속에서 사방으로 헤엄쳐갔을 뿐이다.

    저 앞, 멀지 않은 곳의 호수 바닥에는 길이가 10여 장에 이르는 거석(巨石)이 가로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물때와 푸른 이끼가 가득했다.

    심협은 거석을 넘어 반대편까지 훑어봤지만, 여전히 사람 형체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더 먼 곳을 찾아보려고 할 때, 그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다만 이번에는 신식으로 소리를 전해온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정말 심협 그대인가 보군!”

    심협은 흠칫 놀라 뒤에 놓인 거석을 홱 돌아보았다.

    꼼짝달싹하지 않을 것 같았던 거석이 갑자기 거세게 진동하더니, 한쪽이 휙 들려 올라가면서 심협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그 위에서는 커다란 등롱 두 개가 켜진 것처럼 금색 빛 두 덩이가 갑자기 반짝였다.

    심협은 그제야 눈앞에 이 ‘돌덩이’가 실제 바위가 아닌 어떤 기이한 짐승의 머리이며, 그 두 등롱은 놀랍게도 그의 두 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 하나만 해도 이토록 거대한데, 그럼 그 몸은……? 이 작은 섬만큼 크지 않겠는가?’

    “도대체 그대의 어디가 신성하단 말인가?”

    심협이 참지 못하고 외쳤다.

    “물의 후예들은 모두 나를 산원(山黿)노조라 부르지. 한데 내게는 그들이 모르는 이름이 하나 더 있다네. 바로 소귀라는 이름일세.”

    그 기이한 짐승 머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고, 그 순간 심협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산원노조, 소귀…… 네가 소귀라고?”

    소귀라면 분명 현실 세계에서 통령역요로 불러냈던 첫 번째 물의 요족으로, 고화령에게 쫓기던 중 함께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낭생과 통령계약을 맺으면서 소귀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네가…… 정말 소귀란 말이냐?”

    심협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처음 보았을 때 소귀는 아직 인간의 말조차 내뱉지 못하는 수족(水族)의 작은 요괴였으니, 눈앞의 이 엄청나게 거대한 짐승과는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헤어진 지 천 년은 지났으니 나도 좀 변하긴 했지. 나는 수행이 느리긴 했지만 수명이 매우 길었던 덕에 어찌어찌 출규기까지 이르렀네. 몸도 적잖이 자랐고. 그대들이 있는 그 작은 섬이 바로 내가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라네.”

    자칭 소귀라는 요괴가 말했다.

    “네 몸이 이렇게나 거대한데 왜 아까 내가 너의 기운을 조금도 알아채지 못한 것이냐? 신식으로 살펴봐도 알 수 없었다.”

    심협은 내심 놀라 물었다.

    “그건 내가 타고난 신통력 중 하나라 할 수 있네. 귀식술(龜息術)이라고나 할까? 몸을 숨기는 신통력이지. 일단 극치까지 신통력을 발휘하면 대승기 수사조차도 내 자취를 찾기 어렵다네.”

    천천히 이야기하는 소귀의 말투에는 득의양양한 기색이 어렴풋이 묻어났다. 그리고 그제야 심협은 눈앞의 이 거대한 짐승이 바로 소귀임을 비로소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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