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남은 자들의 처참함
사람들의 시선은 군중 속의 어린 아이들을 훑었는데, 눈빛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심 도우, 그런 거창한 이치는 누구나 말할 수 있소. 하지만 무산에 들어가는 건 자살이나 다름없소. 함께할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오.”
녹옹이 눈에 한 줄기 분노를 번득이며 차갑게 말했다.
“가려는 길이 다르면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했지. 녹 도우께서 이미 떠나갈 마음이 생기셨다니, 우리도 억지로 붙잡지 않겠소.”
심협이 바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눈에는 놀란 기색이 스쳤다. 누구도 심협이 먼저 나서서 그를 떠나보내겠다고 할 줄은 몰랐고, 백소운조차 참지 못하고 그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녹옹은 뭐라 해도 출규기 수사였고, 더욱이 사람들 중 백소운을 제외하고 수련 경지가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가 떠난다면 타격이 클 터였다.
‘이 사람들은 이미 갈라설 마음을 품었으니, 우리가 만류한다 해도 큰 의미가 없기는 마찬가지요. 그들이 지금 당장 떠나지는 않는다고 해도, 더 많은 수사들을 끌어들여 함께 떠나기 위한 것일 뿐이오.’
심협은 전음으로 백소운에게 말을 전했다.
‘심 대형 말을 들어보니 정말 그렇군요.’
백소운도 전음으로 대답했다.
‘두고 봅시다. 일단 녹옹이 떠나겠다고 하면 분명 더 떠나겠다는 자가 있을 게요. 아까 몇몇이 함께 모여 있던 것은 아마 떠나는 일을 상의하던 것일 테지.’
심협이 목소리를 전해왔다.
“그래, 그래. 심 도우까지 그렇게 말한 이상, 내 무슨 이유가 더 있어서 남겠소? 여러분이 내게 동조한다면 함께 가도 좋습니다.”
녹옹은 냉소를 짓고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녹 선배님, 저는 선배님을 따라 가겠습니다.”
구레나룻이 곱슬곱슬한 사내가 가장 먼저 나섰다.
“저도 선배님을 따르겠습니다!”
뒤이어 아까 녹옹과 함께 있던 산수들도 하나둘 합류했다.
이에 다른 사람들은 안색이 어두워졌고, 심지어 책망과 분노의 눈초리로 심협을 힐끔거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녹 선배님, 그리고 도우 여러분. 괜히 홧김에 그러지 마십시오.”
아까 그 고령의 노인이 겸연쩍게 웃으며 중재하려고 했다. 이 사람들은 진즉부터 떠나기로 마음먹었다는 걸 그가 어찌 알겠는가!
녹옹은 노인을 곁눈질로 흘끗 쳐다봤을 뿐,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백소운이 앞으로 성큼 나섰다. 그러자 녹옹과 그의 편에 선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무릇 사람은 각자 뜻한 바가 있는 법. 여러분이 떠나기로 마음을 정했다면 억지로 붙잡지 않겠소. 떠나시오.”
그렇게 말하는 백소운에게서 보이지 않는 기운이 뿜어져 나오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수사(修士)들은 몸이 떨려왔다. 그의 말은 심협과 다를 바 없었고, 심지어 강경하기까지 해 거의 축객령(*逐客令:손님을 내쫓는 말, 진시황이 객경들을 쫓아낸 데서 유래함)이라 할 만 했다.
선뜻 녹옹 무리를 따라 나서지는 못했으나 은근히 다른 마음이 들었던 수사들은 앞서 심협이 한 말이 마음에 걸려 머뭇거리던 중 백소운이 내뿜는 기운을 느끼고는 그런 마음을 싹 거둬들였다. 어쨌거나 일개 출규기 수사보다는 그래도 대승기 수사가 더 믿을 만했으니 말이다.
녹옹은 주위를 둘러보며 이전부터 자신을 따랐던 몇 사람 외에는 아무도 따라 나서지 않자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손한 태도로 포권을 해보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럼 이 후배는 이만…….”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휙 돌아서서 사람들을 데리고 떠나갔다.
심협은 그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전혀 손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끊어야 할 때 끊어내지 않으면, 반드시 환난을 당할 것이라 여겼다.
“그들이…… 정말 떠났습니다. 우린 이제 어찌합니까?”
진천이 조심스레 묻자, 백소운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내 며칠간 부상을 좀 회복한 뒤에 혼자 무산으로 들어가 위험이 덜한 길을 찾아보겠네.”
“무산 안의 대요와 거마(巨魔)들은 그 수가 적지 않소. 혼자 잠입하는 건 위험하오.”
심협이 굳은 얼굴로 걱정스레 반박했다.
“맞습니다. 그건 너무 위험해요. 절대 그러시면 안 돼요.”
나머지 사람들도 백소운이 걱정되는 듯 만류했다.
“딱히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
“내게 방법이 하나 더 있으니 시험해봅시다.”
백소운이 혼잣말처럼 뇌까리자 심협이 진즉 생각해둔 이야기를 꺼냈다.
“무슨 방법입니까?”
사람들이 급히 묻자 심협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곧장 동쪽으로 돌아 무산 산맥 전체를 돌아간 뒤, 그때 가서 진해관(鎭海關)을 지나 다시 북서쪽으로 돌아서 장안으로 가는 거요. 어떻소?”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고 너도나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 멀리 돌아가야 하지만 확실히 더 안전할 것 같긴 합니다.”
한 사람이 주저하며 말했다.
“아직 진해관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는 없으니…….”
진천은 망설이는 기색이었지만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각지의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인데, 저쪽이 뚫렸는지 아닌지 누가 알겠습니까? 무작정 달려갔다가 헛수고만 할까 걱정입니다.”
또 다른 누군가가 걱정스럽다는 듯 덧붙였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진해관 쪽은 지질이 특수하여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지하천이 침식해 만들어진 땅굴 통로가 많습니다. 그 지하 수로로 몰래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심협이 설명했으나 사실 그도 진해관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우주(禹州) 경내에 위치한 진해관은 동해와 가까운 곳이고, 지하 수로에 관한 정보를 과거에 고서들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물론 자신도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좋은 방법이긴 하군요.”
진천이 잠시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사람들도 다소 희망을 얻은 표정이었다.
“모두 동의한 걸로 알고, 한나절만 더 쉬면서 정비한 후에 출발하겠소.”
백소운이 결론을 내렸다.
녹옹 등이 떨어져나간 데다, 검문관에서 많은 사람을 잃은 탓에 수선자(修仙者)는 고작 20여 명에 불과했다. 더욱이 평범한 백성들은 더욱이 피해가 극심했기에 그 수가 백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진 행렬은 백소운의 인솔에 따라 어렵사리 동쪽으로 우회하는 길에 올랐다.
* * *
눈 깜짝할 사이 몇 달이 지났다.
우주(禹州)의 경계. 끊임없이 들쑥날쑥 이어진 산줄기에는 몸집이 거대한 푸른 두꺼비 수백 마리가 숲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빽빽한 산림을 무너뜨렸고, 사방에서 먼지구름이 일었다.
이 푸른 두꺼비의 온몸은 청동과 같았고, 독이 가득한 돌기가 촘촘히 자라나 있었으며, 그 위에는 동록(*銅綠:구리 표면에 생기는 녹, 독이 있음) 같은 가루의 결정이 맺혀 있어 바람을 따라 온 땅에 흩날렸다. 이 가루가 흩날려 떨어진 곳은 풀이며 꽃, 나무 할 것 없이 순식간에 누렇게 말라비틀어졌고, 심지어 진흙조차 검푸르게 물들어 폐토(廢土)가 되어버렸다.
그중 가장 거대한 우두머리 두꺼비의 등줄기에는 땅딸막한 노인 하나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가 입은 녹색 옷은 품이 무척 넉넉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비대한 몸 때문에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또한, 노인의 얼굴은 매우 추했다. 이마는 넙데데했고, 코는 납작했으며, 두 눈은 끔찍할 정도로 컸다. 이 모든 것이 두툼한 두꺼비 입과 어우러지니, 어찌 보아도 요괴가 된 두꺼비의 모습 같았다.
노인은 두 손으로 몸 앞에서 원을 감싸 안은 듯한 자세를 취한 채 좌선을 하는 중이었다. 그의 아래턱에서 목까지 이어지는 부분에는 불룩 튀어나온 커다란 두 개의 주머니가 달려 있었는데, 호흡에 따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입가에서는 검푸른 독기 두 줄기가 훅훅 뿜어져 나왔다.
그때, 노인의 머리 위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뒤이어 한 줄기 거대한 그림자가 허공을 맴돌며 그를 향해 날아 내려왔다.
두꺼비 노인은 원을 감싸는 듯했던 자세를 거둬들이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날개폭이 1장에 이르는 거대한 매 한 마리가 두 날개를 활짝 편 채 허공을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매는 막 착지하기 직전에 두 날개를 접었다. 거의 동시에 온몸의 금빛 찬란한 깃털들이 순식간에 번쩍이는 환한 빛으로 뒤덮이더니, 머리에 구슬을 모아 만든 황금관을 쓴 중년 남자로 변했다.
용모가 매우 준수한 남자였다. 눈썹은 귀밑머리까지 비스듬히 뻗었고, 매부리 같은 코는 아래쪽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음흉한 느낌은 전혀 없었으나, 표정만큼은 더없이 차가웠다.
“준지(隼支) 도우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 상갓집 개들을 찾지 못한 모양이로군?”
두꺼비 노인이 웃으면서 말을 건네자 준지라 불린 매부리코 사내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늙은 두꺼비, 네놈이 나를 비웃느냐? 너의 그 제자와 손제자들도 그놈들의 농간에 쩔쩔매지 않았더냐? 그리 오래 찾았는데도 그놈들을 못 찾아냈지!”
“됐네, 그만하지. 그래봐야 남은 목숨 겨우 부지해 나가는 벌레들 아닌가. 우리가 여기에 온 목적이 놈들을 찾는 것도 아니고 말일세. 우리는 서둘러 동해로 지원을 가야 하니, 더 지체한다면 정말이지 득보다 실이 더 많을 게야.”
두꺼비 노인은 비난에도 화를 내기는커녕 그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답했다.
“안 돼! 그놈들 행적으로 보아 분명 동쪽을 향해 온 거야. 어쩌면 동해로 가서 끼어들지도 모르니 반드시 먼저 찾아야만 해!”
준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투덜거렸다.
“찾으려면 자네나 가서 찾게. 나는 길을 서두를 것이니. 우선 동해에 도착한 뒤 다시 이야기하자고.”
두꺼비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했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짙은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먼저 가. 나는 그놈들을 죽이고 가도 늦지 않을 테니.”
준지는 두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말을 마친 그가 두 팔을 펼치자 몸에서 갑자기 칼날 같은 금빛 날개들이 자라났다. 그는 즉시 날개를 퍼덕이며 찬란한 금빛을 띤 채 하늘로 날아올랐다.
두꺼비 노인은 두 손으로 다시 원을 감싼 듯한 자세를 취하고는 두꺼비 위에 앉아 동쪽으로 멀어져갔다.
그곳에서 수백 장 떨어진 좁다란 산골짜기에서는 남루한 사람들의 행렬이 산벽에 바짝 붙어 조심스레 전진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긴장한 표정이었고,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이 사람들 가장 앞에 선 것은 하얀 옷을 입은 중년 남자였는데, 양쪽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눈가에 희미하게 주름이 잡혔으며 용모가 상당히 준수했다. 바로 백소운이었다.
그는 손에 손바닥만 한 작은 경번(經幡)을 쥐고 있었다. 경번 위에는 금실로 불가의 경문이 수놓아져 있었고, 그 위에서는 엷은 금빛 물결이 넘실대며 반경 십수 장까지 뻗어 나갔다.
백소운의 뒤를 바짝 따르는 사람은 심협이었다.
“이 은종번(隱踪幡) 덕에 그 금빛 매 요괴의 추살을 피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오.”
그는 이틀 전 상황을 떠올리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오는 내내 수많은 고난을 겪었고, 많은 사람들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이틀 전처럼 대승기 요물 두 마리가 동시에 주시하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백소운이 제때 상황을 알아채고 먼저 나서서 금빛 매 요괴를 유인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