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막다른 골목
별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빛 광선은 불타는 것처럼 뜨거우면서도 환했는데, 핏빛 소용돌이에 닿자 불상의 허상처럼 거센 충돌이 발생해 양쪽 모두 닳아 없어지기 시작했다. 다만 녹아 없어지는 속도는 금색 별빛이 더 빨랐다.
100장, 70장, 50장, 30장, 10장…….
금빛 별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힘을 거의 다 소진했고, 마침내 금빛이 완전히 흩어지는 순간 격렬한 폭발음과 함께 터져버렸다.
“크윽!”
심협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별빛도 흩어졌고, 그는 순간적으로 탈진해 쓰러져서 쉬이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핏빛 소용돌이 위쪽 끄트머리에서 금색 불덩이가 하나 터지면서 겹겹이 금빛 물결이 사방으로 충돌하며 핏빛 소용돌이를 휘젓고 있었다.
한편, 금빛이 퍼져 나간 허공에는 구름 문양으로 둘러싸인 금빛 오각별 그림자가 떠올라 오랫동안 흩어지지 않았다.
삼성멸마의 힘이 한 차례 휘젓자 핏빛 소용돌이와 여섯 불상 사이에 이어진 팽팽한 긴장이 일순 깨졌다. 백소운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두 손을 몸 앞에서 빠르게 결인하더니 연달아 여섯 번이나 “폭(爆)!”이라고 외쳤다.
그 순간, 불상의 미간에 있던 여섯 알의 염주에 새겨진 진언이 하나둘 빛을 뿜어냈고, 다음 순간에는 한 알씩 차례로 터져나갔다.
쾅! 쾅! 쾅!
거대한 폭발음이 천지를 뒤흔들었고, 거대한 여섯 번의 폭발에 따른 소용돌이가 서로 충돌하면서 핏빛 소용돌이 전체를 갈라버렸다. 붉은색과 금색의 두 빛은 서로 엉기며 아래쪽 성벽의 절반을 집어삼켰다.
한편, 성 밖에서 달려오던 늑대 요괴와 핏빛 박쥐 대군은 이런 정세 때문인지 심협을 몇 걸음 앞에 두고도 멈칫거리며 감히 더는 다가오지 못했다.
그때, 폭발로 일어난 연기 속에서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와 탈진한 심협을 부축해 일으키고는 동쪽을 향해 쏜살같이 달아났다.
“괜찮은 거지?”
심협은 온몸의 옷이 너덜거리고 몸 곳곳이 핏자국으로 물든 백소운을 보며 물었다.
“괜찮소. 심 대형이야 말로 그런 신통력을 발휘하느라 무리한 것 아니오?”
“억지로 신통력의 위력을 끌어올리느라 법력이 조금 소모되었을 뿐, 아무 지장 없소.”
백소운의 걱정스런 물음에 심협이 씩 웃고 답했다. 이어서 심협은 진중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다시는 그렇게 앞뒤 없이 달려들어서는 안 되오.”
그러자 백소운은 형에게 혼난 동생처럼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까는 상황이 워낙 위급했으니 어디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나 있었겠소? 그리고 다행히도 진언 염주의 자폭은 위력이 약하지 않으니 본디 부상으로 정상이 아니었던 요풍 그자도 아마 더는 쫓아오지 않을 거요. 그렇다고 방심할 수도 없으니 최대한 빨리 떠나야…… 컥!”
백소운은 말을 하다 말고 울컥 피를 토해냈다.
“우선 부상부터 살피는 게 좋겠소.”
심협은 그의 안색이 누렇게 변한 것을 보고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권했다.
다행히 백소운도 고집 부리지 않고 어느 계곡을 찾아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급히 샛노란 단약 한 알을 꺼내 먹고는 두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채 상처를 돌보기 시작했다.
심협은 과산부를 한 장 꺼내 곁에 두고 물속에 들어가 무명공법을 운공함으로써 천지의 영기를 빨아들이며 법력을 회복했다.
오래 지체할 수는 없었기에 두 사람은 1각도 채 지나기 전에 다시 출발했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잡았을 때는 이미 반 시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살아남은 건업성 사람들은 동쪽 방향으로 미친 듯이 내달리는 중이었다. 비록 검문관의 경계를 벗어났다고는 하나 여전히 무산 산맥 부근이라 언제든 다시 요물들과 맞닥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협과 백소운이 무사히 돌아오자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백 선배님, 심 선배님. 두 분이 평안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심옥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녀는 지금껏 심가 사람들을 이끌고 가장 앞에서 달리는 내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을 만나게 되니 드디어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두 사람은 돌아오기 전에 몸에서 핏자국을 씻어내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터였다.
심협이 살펴보니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느라 지쳐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했고, 어떤 이들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으며, 어떤 이들은 가족을 잃었음에도 감히 대성통곡하지 못하고 소리 죽여 흐느꼈다.
“사상자는 어떠하오?”
백소운이 물었다.
“심가에서는 죽거나 다친 이들이 없으나, 백가와 임가에서는 각각 수사 한 사람과 집안사람 여섯을 잃었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사상자가 절반이 넘어 살아남은 이가 열에 셋도 안 됩니다.”
백벽은 땅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어서 심옥이 약간 노여운 목소리로 이를 악문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산수 네 명이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달아났습니다.”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갔단 말이오?”
심협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어서 그는 녹옹이 쪼그려 앉아 있는 길가 고목 아래를 흘끗 쳐다보았다. 여전히 꽤 많은 산수들이 그의 곁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다들 낮은 소리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모여 보시오!”
백소운이 크게 외치자 모든 수사(修士)들이 하나둘 모여 그의 앞에 섰고, 많은 백성들도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여러분, 이미 검문관을 잃었으니 장안으로 향하는 유일하고 안전한 통로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된 셈이오. 여러분께서는 어찌 하시겠소?”
백소운이 사람들을 훑어보며 물었다.
사람들은 낮게 탄식했다.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라 잠시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암울한 분위기였다.
“기왕 이리 되었으니 다들 예서 헤어지는 것도 괜찮지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오히려 요마들의 주의를 끌기 쉽지 않겠소?”
줄곧 녹옹을 따르던 구레나룻이 곱슬곱슬한 사내가 백소운을 슬쩍 보고는 침묵을 깨고 말했다.
눈썹 뼈가 툭 튀어나온 중년 남자 하나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그 말에 불쑥 불만을 터뜨렸다.
“당신은 말을 참 쉽게 하시오. 수사들이야 각자 흩어질 수 있겠지만, 저 백성들은 어찌 한단 말이오?”
그는 건업성 한 소가족의 가조(家祖)로서, 뒤따라 온 이들은 전부 그의 마지막 혈육들이었다. 여기서 모두 흩어지게 된다면 혼자서는 절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저 많은 가족들까지 이끌 수는 없었다.
녹옹이 그 말을 듣고 입을 열었다.
“진천(陳川) 도우,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듣기 안 좋은 소리를 했다고 원망치 말게. 지금이야 모두 제 코가 석자이지 않은가? 아직도 모두가 자네 가족을 지켜주길 바란다면, 그것이야말로 너무 이기적인 생각 아니겠는가?”
“녹옹 선배, 만약 다른 이가 그런 말을 했다면 또 모르겠으나 당신 입에서 그 말이 나왔으니 내 말을 좀 해야겠소.”
진천은 애써 억눌렀던 노여움이 폭발한 듯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녹옹은 그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진천은 그 모습에 순간 기세가 약간 죽긴 했지만, 그래도 움츠러들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전에 모두가 당신을 선배라고 공경하고,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모신 것은 위급할 때 당신이 조금이라도 보호해주기를 바라서가 아니었겠소? 당신도 그리 약속했고 말이오. 허나 아까 검문관에서 당신은 뭘 했소?”
그러자 주위의 적잖은 사람들이 시선이 녹옹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앞서 그를 따랐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의문을 지니고 있었다. 자기 가족들이 죽어가는 동안 왜 녹옹이 구하려고 나서는 걸 전혀 보지 못했단 말인가?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녹옹 선배님께서 성문을 부수고 모두 탈출하게 하시지 않았다면 피해는 훨씬 심각했을 걸세!”
구레나룻이 곱슬곱슬한 사내가 즉시 반박하고 나섰다.
“남의 은혜를 입고서도 감사할 줄도 모르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녹옹 편이라 할 수 있는 몇몇이 맞장구를 쳤다.
심옥과 백벽 등은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당기며 비웃었다. 이들은 매우 분명히 알고 있었다. 심협이 성벽 꼭대기에 올라가 검진을 파괴하고 성벽에 걸린 법진의 금제까지 풀지 않았다면 녹옹이 어찌 성문을 쪼갤 수 있었겠는가?
“지금 서로 탓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백소운이 그 한마디로 주의를 환기시키자 사람들도 입을 다물었다.
“백 선배님, 이제 검문관으로는 갈 수 없게 되었는데…… 우리가 무산을 곧장 지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구레나룻이 곱슬곱슬한 사내가 머뭇거리며 물었으나, 백소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백 선배님, 정말 모두를 이끌고 무산으로 들어가시려는 건 아니시지요?”
나이가 여든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인이 물었다.
“무산은 상황이 복잡하여 확실히 위험이 크긴 하나, 우리가 장안으로 갈 가장 가까운 길이오.”
백소운이 가볍게 탄식하며 설명했다.
“나는 무산으로는 안 가렵니다. 차라리 건업성으로 돌아가 죽으면 죽었지, 무산에 들어가지는 않을 거예요.”
건업성 소가족의 수사 하나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의 말이 이어졌다.
“저도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 나와 천리 길을 달려 장안으로 가면서 타지에서 객사하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무산에 뼈를 묻을 마음은 없습니다!”
“뼈를 묻는다고? 무산에 들어가면 뼈도 추리지 못할까 걱정이네.”
그때, 갑자기 녹옹이 선포하듯 외쳤다.
“백 선배님, 선배님 일행이 무산으로 들어갈 계획이라면, 이 후배는 동행할 수 없으니 용서해주시지요.”
“저도…….”
뒤이어 네댓 명이 연이어 대답했다.
그중에는 구레나룻이 곱슬곱슬한 사내도 있었고, 전부 다 앞서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산수들이었다.
“다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백벽이 이 모습을 보고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여러분 모두 악역을 맡고자 하지 않으니, 내가 하는 거요. 비록 내가 이 모진 말을 하고는 있으나, 솔직히 그대들 모두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을 것 같소만. 이런 평범한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그저 번거롭고 위험할 따름이지. 안 그렇소?”
녹옹의 말에 진천이 인상을 팩 구겼다.
“녹옹, 마침내 본심을 드러내는구나!”
“비아냥거리지 말게. 이 말은 나 한 사람만의 본심이 아니라, 이들 모두 속으로 아주 잘 알고 있을 테니. 지금까지도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모른다면 결과는 분명 전멸일 터. 그대들 생각은 어떻소?”
녹옹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너…….”
진천은 녹옹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으나, 어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 더욱이 많은 수사들이 녹옹의 말에 하나같이 난처한 표정으로 하나둘 고개를 떨구었다.
이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녹 도우의 말이 맞소.”
이에 다른 사람들은 분분히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특히 녹옹은 놀란 듯 인상을 팩 찌푸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심협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모두 생각들 해보셨소? 세상살이가 어려울 때 같은 인간족인 우리가 서로 돕지 못한다면 누가 지켜주길 더 바랄 수 있겠으며, 인간족 수사들이 제 목숨 부지하기에만 여념 없어 평범한 사람들을 기꺼이 피의 제물로 전락하게 하려한다면, 앞으로 다시 부흥할 기회가 있겠소?”
심협은 그렇게 화제를 돌려 반문했다.
그러자 일가 후손들을 데리고 도망치던 수사들의 표정이 모두 살짝 변했다.
“저 어린 아이들을 좀 보시오. 그들은 인간족의 미래요. 우리가 그들조차 지키려 하지 않는다면, 인간족에게 미래가 더 있겠소?”
심협의 말은 이어졌다. 말투는 평온했으나 그 내용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