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213화 (213/1,214)
  • 213화. 푸른 산이 남아 있는 한

    성벽 위도 건시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녀석들은 심협이 성벽 위로 돌진해 오는 것을 보자마자 모두 달려들었다.

    하지만 심협은 그들과 싸울 마음이 없었기에, 그대로 사월보를 이용해 잔상을 남기며 지나갔다. 건시들의 공격은 물론이고 검광에도 조금도 닿지 않은 채 성벽 모퉁이의 검진 앞에 이를 수 있었다.

    일단 살펴보니 빛기둥들 안에는 높이 3척 정도의 둥근 돌 받침대가 하나 있었고, 그 위에는 동서남북 사방에 각각 이상한 둥근 부적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양 안에는 등급이 매우 높은 선옥이 하나씩 박혀 있었는데, 선옥 안에는 수정처럼 반짝이는 빛이 맴돌며 영적인 기운을 끊임없이 사방으로 흘려 보냈다.

    돌 받침대 한가운데에는 검 형태의 홈이 하나 파여 있었는데, 그 안은 빛으로 가득했다. 아까의 그 광검들은 여기서 응집되어 나오는 것이었다.

    ‘법진의 중심이든 아니든 우선 파괴하고 보자.’

    심협은 그렇게 결심한 뒤 손목을 돌려 반월환을 꺼냈다. 이어서 손을 한 번 휘두르자 반월환에서 빛이 번득이더니 허공을 휘돌아 돌 받침대로 돌진했다.

    펑!

    돌 받침대는 번쩍이며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고, 받침대에서 내쏘던 빛기둥까지 좌우로 흔들거렸다. 그러자 홈에 가득한 빛이 어두워졌고, 더는 광검으로 굳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놀랍게도 다른 곳의 검광들 또한 멈춘 상태였다.

    심협은 매우 기뻐하며 반월환을 거둬들이고는 다시 한번 손을 써 둥근 돌 받침대를 완전히 부숴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둥근 돌 받침대들에서 갑자기 빛이 번쩍이더니, 다시 검광이 떠올라 광검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광검들은 아까처럼 성 아래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모여 긴 열을 이루더니 심협을 향해 날아왔다.

    심협은 재빨리 몇 걸음 물러난 뒤, 손바닥을 휘둘러 반월환을 쏘아 보냈다. 허공에서는 은빛 광인(光刃)이 새벽달의 빛 그림자처럼 반짝이며 광검의 대열과 맞부딪쳤다.

    까깡! 캉!

    한바탕 쇠붙이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고, 여러 줄기의 검광이 달그림자와 동시에 부서지며 점점이 별빛으로 바스러졌다.

    심협은 정신을 집중한 채 체내에 황정경 공법을 운공하여 주먹을 꽉 그러쥐고는 몸을 굽히면서 빛기둥이 감싸고 있는 둥근 돌 받침대를 세차게 내리쳤다.

    쾅!

    심협은 주먹이 빛기둥을 뚫고 들어가자 손을 활짝 펴서는 그 중간에 박혀 있는 선옥을 움켜쥐어 확 뽑아냈다.

    선옥 한 덩이가 떨어져 나가자 돌 받침대의 검진은 곧장 균형을 잃었고, 빛이 몇 번 깜빡거리더니 완전히 어두워져 사라져버렸다. 이어서 허공의 검진도 빛이 사그라들면서 광검들이 연이어 사라져갔다.

    이에 기운이 솟은 심협은 기세를 몰아 나머지 세 개의 선옥도 뽑아내 소매 안으로 챙겨 넣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막 달려들던 건시들을 두들겨 성 아래로 떨어뜨리고는 또 다른 검진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는 연달아 남은 검진들의 돌 받침대를 부쉈고, 선옥들을 파냈다.

    그런데 그때, 심협은 갑자기 성 밖에서 간간이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보니, 멀리서 검은 먼지구름이 수백 장에 걸쳐 밀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안력(眼力)을 집중해 살펴보니 밀물 같은 먼지구름 중앙에는 여러 마리의 거대한 검은 늑대들이 진격하고 있었고, 주위로는 푸른 늑대 일고여덟 마리가 뒤따르고 있었다. 앞서 그와 맞붙었던 늑대 머리 남자가 거대한 검은 늑대 위에 올라탄 채 대군을 이끌고 검문관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또한, 늑대 요괴 대군의 상공에는 핏빛 구름도 잔뜩 있었는데, 그 안에서는 간간이 푸드덕 거리는 핏빛 박쥐의 날갯소리가 들려왔다.

    ‘큰일이로군!’

    다급해진 심협은 앞을 막는 건시 몇 구를 잇달아 날려버리면서 성문을 향해 내달렸다.

    성벽의 검진은 이미 파괴되었지만, 성문의 법진은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은 듯 여전히 붉은 빛으로 덮여 있었다.

    “시간 없소! 모두 비키시오!”

    심협이 낮게 소리 지르자 사람들이 뿔뿔이 물러났다.

    그가 두 손을 동시에 휘두르자 낙뢰부(落雷符) 세 장이 튀어나와 성문 한가운데에 겹쳐진 채 떨어졌다.

    “부적으로 문을 부수겠다는 생각을 다 해내다니, 대단한데?”

    녹옹은 이죽거렸으나, 심협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 순간, 세 줄기 우레 소리가 동시에 울리면서 하나로 합쳐진 굵직한 번개가 내리쳤고, 뇌구(雷球)가 되어 다시 한번 폭발했다.

    꽈르릉!

    굉음에 이어 성문 위로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고, 그 위를 뒤덮었던 붉은 빛의 장막에는 구멍이 생겨나 그 너머의 문까지 온통 검게 그을렸다.

    사람들이 감탄사를 내뱉기도 전에 심협은 그들을 스쳐 지났다. 이어서 황정경 공법을 극한까지 운공하여 온몸의 힘을 곳곳에서 함께 불러일으킨 후, 전신의 맥을 따라 주먹 끝에 모아 문 위의 검은 흔적을 세게 두들겼다.

    펑!

    또다시 굉음이 울렸다. 이어서 그 두껍고 무거운 성문에 항아리만 한 구멍이 뚫렸고, 심협은 지체 없이 그 안으로 뚫고 들어갔다.

    뒤이어 구멍 가장자리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가닥가닥 뻗어나가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두 문짝 전체로 퍼졌다.

    “모두들 나를 따르시오! 성 밖으로 나가야 하오!”

    심협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전에 녹옹은 크게 기뻐하며 손도끼로 성문을 내리찍었다. 그러자 이미 산산조각이 나 있던 성문 전체가 완전히 부서지면서 탈출로가 활짝 열렸다.

    심가 사람들이 앞장서서 성 밖으로 뛰쳐나갔고, 백가를 비롯한 사람들도 그 뒤를 따라 연이어 도망쳐 나왔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사람이 죽은 후였고, 살아서 탈출한 사람은 3할이 채 되지 않았다.

    성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들은 기뻐할 겨를도 없이 천지를 뒤덮으며 몰려오는 늑대 요괴들과 핏빛 박쥐 떼를 보고는 경악했다.

    “이들을 데리고 곧장 동쪽으로 달아나시오! 멈춰선 안 되오!”

    심협은 초조한 표정으로 심옥에게 당부했다.

    “선배님은요? 저희와 함께 가시지 않는 건가요?”

    “먼저들 가시오. 나는 아직 할 일이 있소!”

    심협은 성벽 위를 올려다보며 답했다.

    한편, 이 무렵, 백소운은 여전히 전력으로 염주의 힘을 발휘하여 요풍을 가두어두고 있었다. 둘은 서로를 견제하며 팽팽한 힘겨루기를 하는 중이었다.

    앞서 건업성에서 심협은 백소천이 자폭하는 모습을 두 눈 뻔히 뜨고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백소운마저 위험에 처했다. 결코 또다시 같은 상황을 지켜볼 수 없었다. 뭐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러는 중에 목숨을 잃는다 해도 여한이 없을 터였다.

    상황이 긴박한지라 심옥은 더 물어볼 틈도 없이 심가 사람들을 이끌고 성벽을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 백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그 뒤를 바짝 따랐다.

    사람들이 떠난 뒤, 심협은 무섭게 몰려오는 요수 대군을 바라보다가 곧장 몸을 날려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소운, 이미 다들 무사히 떠났으니 그놈은 내버려두고 어서 떠나시오!”

    심협이 목소리 높여 외쳤다.

    “심 대형, 이놈의 법력은 높고도 깊어 조금이라도 더 가둬두지 않으면 모두들 금방 따라잡히고 말 거요! 먼저 모두를 이끌고 떠나시오. 나도 뒤따라가겠소.”

    백소운은 고개를 숙여 그를 흘끗 보고는 자못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늑대 요괴들과 핏빛 박쥐 떼가 돌아왔소. 지금이 아니면 갈 수 없을 게요!”

    심협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갈 수 없다면, 나는 이놈과 함께 목숨을 다할 것이오. 우리 형님의 복수를 한 셈이 되겠지.”

    백소운은 잠시 망설이더니 변함없이 평온하게 말했다.

    “이미 백소천을 잃었거늘, 백소운마저 잃어야 한단 말이오? 그럴 수는 없소! 어리석게 굴지 마시오! 살아 있기만 하다면, 복수는 언제든 할 수 있소. 푸른 산이 남아 있는 한, 땔감 걱정은 하지 않는다질 않소!”

    심협은 마음이 몹시 초조하여 급히 그를 타일렀다.

    그 말에 백소운도 망설이기 시작했다.

    “더욱이 저들은 그대가 없으면 장안에 도착할 수 없을 거요!”

    심협은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팽팽하게 긴장되었던 백소운의 얼굴이 살짝 풀어지면서 눈빛 깊은 곳에 한층 더 깊은 망설임이 스쳤다.

    그때, 요풍이 끼어들었다.

    “하! 떠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놈들 소관이 아닐 터인데?”

    거의 동시에 여섯 불상의 허상 미간에 있던 금빛 염주알들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그 위에 맺힌 불상의 모습도 차츰 흐릿해졌다. 그 안에 담긴 힘이 점점 고갈되는 듯했다.

    바로 그때, 요풍이 갑자기 두 손을 몸 앞에 포갠 채 기이한 구결을 몇 마디 읊조렸다. 그러자 순간 그의 몸에서 새빨간 빛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이어서 그가 갑자기 몸을 돌리자 휭 하고 바람소리가 크게 일더니 순식간에 핏빛 회오리가 되어 사방을 휘저으며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심협은 성벽 위에서도 회오리 속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전해지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소운, 어서……!”

    그는 다급히 외쳤으나, 그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거센 바람소리에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핏빛 소용돌이로 변한 요풍은 놀랍게도 한 순간에 열 배로 커지더니 하늘에 닿을 정도로 거대한 핏빛 소용돌이가 되었다. 이 소용돌이는 지면에 서있거나 쓰러져 있던 수백의 건시귀와 시신을 하늘 높이 휩쓸어 올렸다.

    성벽 위에 있던 심협도 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재빨리 온몸의 힘을 불러일으켜 천근추(千斤錘)를 시전했으나, 이내 몸을 가누지 못하고 결국 핏빛 소용돌이로 끌려갔다.

    이 핏빛 소용돌이는 여섯 불상의 허상들과 맞먹는 크기였는데, 그 가장자리의 돌개바람이 끊임없이 불상의 허상과 충돌했다. 그렇게 맞부딪친 곳에서는 계속해서 빛이 번득였고, 쟁쟁한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건시귀들도 소용돌이 가장자리에 휩쓸려 마치 맷돌의 콩처럼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버렸다.

    심협은 경악해 급히 한 손을 가슴 앞에 결인하고는 재빨리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의 읊조림을 따라 발아래에서는 금세 하얀 빛 그림자가 드리웠고, 사방의 허공에는 점점이 푸른 빛이 떠올랐다. 이 빛이 그에게 몰려들어 몸을 반투명한 상태로 만들었다.

    백소운은 심협이 핏빛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표정이 급변하여 구하려고 했지만, 요풍 때문에 나서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 심협이 펼친 법술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을목선둔!”

    심협은 허공에서 걸음을 내딛었고, 온몸에 푸른 빛이 번쩍이더니 몸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심협은 자신이 다시금 허공을 뚫고 지나가는 기이한 상태에 접어들었음을 분명히 느꼈다. 시야에는 무수한 녹색 빛 그림자가 가득했고, 큰 힘이 사방에서 몰려들어 끊임없이 앞으로 떠밀었다. 그럼에도 뒤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흡인력은 그대로였다.

    그때, 그의 몸이 곧 앞으로 가라앉으며 발이 땅에 닿았다. 눈앞의 수많은 녹색 빛들도 흩어지며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그러자마자 수십 장 너머에서 달려드는 늑대 요괴 대군이 보였다.

    몸을 돌려 보니 뒤에 성벽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검문관 성 밖까지 나는 듯이 내달렸던 것이다.

    한편, 이 무렵 하늘의 핏빛 소용돌이는 더욱 강력해져 여섯 불상의 그림자가 거의 잠길 것만 같았고, 염주를 조종하던 백소운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진 상태였다.

    “일단 그 둘 사이의 평행 관계를 끊어야 해.”

    심협은 중얼거리며 방법을 생각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이내 결정을 내리고는 망설임 없이 곧장 강보를 밟으며 결인한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의 두 눈이 번쩍이며 온몸에서 별빛이 뿜어져 나왔다.

    “삼성멸마!”

    심협이 가볍게 외치자, 단전과 법맥 안에 있던 거의 모든 법력이 쏟아져 나왔다. 두 손이 새하얗게 빛나더니 갑자기 허공을 잡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곧 저 아득한 은하수에서 이름 모를 한 줄기 힘이 그와 서로 호응했고, 하늘 깊은 곳에서 찬란한 금빛 별의 허상이 떠올라 별똥별처럼 떨어져 내렸다.

    이 금빛 별은 지면에서 300여 장 높이에 이르자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 폭이 백여 장에 달했는데, 이는 예전에 소환한 것의 열 배에 이르는 크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