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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211화 (211/1,214)
  • 211화. 드러난 정체

    녹옹도 이들이 하는 말을 듣고 다가와 궁금한 듯 끼어들었다.

    “선배님. 우리 사람들은 이미 다 온 것 아닙니까? 어찌 다른 사람이 더 있단 말입니까?”

    심협은 이 말을 듣자마자 순간 속에서 까닭 모를 분노가 치밀어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일을 성사시키기는커녕 그르치기만 하는 멍텅구리 같으니라고!’

    백소운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심협이 무엇을 발견했는지는 몰랐지만, 분명 그가 목적 없이 말하지는 않았을 거라 믿었기에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요봉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허허, 보아하니 여러분 중에 정말 똑똑한 이가 있나 봅니다. 그럼 나도 더는 속일 필요가 없겠지요. 어쨌거나 그대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니까요.”

    그 말이 울려 퍼졌을 때, 그의 몸은 이미 허공에 떠서 천천히 사람들 머리 위에 이르렀다.

    심협은 이 광경을 보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백소운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뒷짐을 진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손목에 앵두알 만한 여섯 알의 금색 염주를 차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각각 ‘옴(唵), 마(嘛), 니(呢), 반(叭), 메(咪), 흠(吽)’이라는 육자진언이 새겨져 있었고, 잔잔한 금빛 물결이 층층이 일고 있었다.

    건업성에서 도망쳐온 사람들은 잠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하나같이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모두 어서 성문 쪽으로 물러나시오!”

    심협의 커다란 외침은 혼잡한 군중 속에서 아주 우렁차게 들렸다.

    그러나 원래 행렬 끄트머리에 있었던 심가 사람들이 즉시 성문 쪽으로 다가선 것 말고는 일부 백씨 집안사람들만 뒤따라 물러섰을 뿐, 나머지는 영문도 모른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검문관에 들어온 이상 누구도 나갈 생각 말아라!”

    허공에 떠 있던 요봉이 또 한 번 분노에 차 소리를 질렀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목구비를 비롯한 일곱 구멍에서 검붉은 연무가 잇달아 솟아 나오더니, 순식간에 그의 몸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는 이미 모습이 완전히 바뀐 뒤였다.

    그는 온몸이 먹처럼 까맸고, 몸이 널찍한 통에 감싸여 있었으며, 머리에는 대나무로 엮은 커다란 삿갓을 써서 얼굴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심협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무의식중에 소리를 질렀다.

    “요봉……. 요풍!”

    심협이 그 이름을 내뱉자마자 건업성 수사들은 깜짝 놀랐고, 나머지 백성들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 이름이 수백 년 동안 그들에게 주었던 공포가 실로 너무나 컸던 것이리라.

    “어찌 그럴 수가! 백소천이 분명 그와 함께 죽었는데…….”

    심협은 백소천 정도의 자폭 아래서도 요풍이 아직 살아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요풍이야, 요풍이라고…….”

    이미 요풍과 백소천의 일전을 목도한 백성들은 그날 건업성이 함락되던 때의 처참했던 광경을 완전히 기억해내고 일순간 엄청난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와 동시에 아까 통로 양쪽에 빼곡히 늘어서 있던 백성들의 이목구비에서도 검붉은 안개가 흘러나오더니, 삽시간에 그들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러자 그들의 피부는 빠른 속도로 바싹 쪼그라들었고, 눈구멍이 움푹 들어가며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왔다. 잠깐 새에 몸 안의 모든 수분을 다 뽑힌 듯, 전부 건시(乾屍)로 변한 것이다.

    건시들은 형상을 갖추자마자 온몸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살기를 뿜어냈고, 입으로는 분명히 알아들을 수 없는 나지막한 소리를 끊임없이 흘리며 건업성 유민들을 향해 몰려들었다.

    백성들은 이 광경에 겁을 집어먹고 넋이 나가버렸다.

    “요, 요마다! 살려줘! 어서 도망쳐!”

    누가 먼저 외쳤는지 갑자기 수백 명이 앞다투어 뒤로 몰려가 성을 벗어나려 했다.

    “허둥대지 마시오! 모든 수사는 사방을 엄호하고 성문으로 물러나도록 백성들을 호송하시오!”

    심협은 황정경 공법으로 기를 모아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그의 외침은 놀랍게도 당황했던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이에 반응한 수행자들은 백성들 양쪽으로 이동해 두 줄의 드문드문한 인간 울타리를 만들어냈고, 백성들을 복판에서 호위하며 성문 쪽으로 이동했다.

    “하하! 놀라거라. 두려워하거라! 벌벌 떨수록 더 좋아!”

    공중에 떠 있던 요풍이 두 팔을 벌리자, 사방에서 천지간의 검은 기운이 가닥가닥 모여들어 그의 넓은 옷자락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검은 기운이 흘러 들어갈 때 그는 참지 못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심협은 상대의 수련 경지를 가늠할 수 없었지만, 요풍이 온몸에서 뿜어내는 마기가 사방을 맴돌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가 두려웠다.

    “우리 형님이 바로 저놈 손에 돌아가셨단 말이오?”

    백소운은 요풍을 뚫어질 듯 노려보며 한 글자 한 마디 힘주어 물었다.

    “소천 사형은 자폭을 대가로 저놈을 죽여 없애려 했소. 어째서 성공하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심협은 어두운 표정으로 낮게 말했다.

    “네놈이 바로 건업성 백소천 그놈의 아우로구나. 어쩐지 네 몸에서 비슷한 혈맥과 기운을 느꼈지. 한 집안 형제가 하나같이 쓸모없는 놈들이니 모두 내 손아래 귀신이 되어라! 하하하!”

    요풍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요풍의 말을 들은 백소운은 그저 눈썹만 슬쩍 움직였을 뿐 눈에 띄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요풍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는 짙은 살기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뒤이어 그의 오른손에서 은빛이 번쩍이고 한 줄기 은빛 날이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길이가 1장 정도 되는 은빛 석장(*錫杖:지팡이 모양 법기로, 위쪽에는 주석으로 만든 고리가 달려 있음. 승려들의 탁발도구)으로 변했다.

    석장의 머리 부분에는 12개의 고리가 두 갈래로 달려 있었고, 몸통에는 범어로 된 대비주(*大悲呪: <천수경>에 있는 천수관음의 공덕을 찬양한 82구절의 주문)가 새겨져 있었으며, 꼬리 쪽에는 호두알만 한 정명주(淨明珠) 한 알이 박힌 채 광명정대한 불가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가 한 손을 떨치자 손목에 차고 있던 염주가 손목에서 빠지면서 끈이 저절로 끊어졌다. 그러자 여섯 개의 금빛 구슬이 떠오르면서 그 위에 새겨진 불가의 육자진언이 불꽃같은 선홍색 빛을 뿌렸다.

    이어서 백소운이 한 발로 땅을 구르자 몸이 화살처럼 솟구치며 손에 든 은빛 석장이 장창처럼 불쑥 튀어나가 요풍의 명치를 향해 치달았다. 염주 여섯 알도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그 옆을 나는 듯이 스쳐 지나갔다.

    요풍은 훌쩍 몸을 날려 창끝을 피하며 후방 대각선으로 수십 장을 솟구쳤다. 그러더니 두 소매를 털었는데, 그러자 검은 안개가 무럭무럭 솟아올라 마치 두 마리 검은 뱀처럼 백소운을 향해 사납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백소운은 전혀 피할 마음이 없는 듯 손에 든 석장을 그대로 검은 안개 속으로 찔러 넣으며 손목을 비틀었다. 그러자 석장의 머리 부분에 걸려 있던 열두 개의 고리가 방울소리를 냈다.

    삽시간에 겹겹이 금빛 물결이 넘실거리며 사방으로 밀려들었다.

    검은색의 짙은 안개들은 금빛 물결에 닿자마자 마치 뙤약볕에 눈 녹듯 그대로 녹아내려 백소운의 공격을 조금도 막지 못했다.

    석장이 이미 코앞까지 이른 것을 본 요풍은 오른손을 재빨리 휘저었다. 그러자 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옷자락이 석장(錫杖)을 겹겹이 휘감았고, 끊임없이 치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하얀 연기를 무럭무럭 뿜어냈다.

    뒤이어 요풍은 석장을 감싼 오른손을 홱 잡아당기더니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백소운을 향해 왼손을 내리쳤다.

    그러나 미리 방비하고 있던 백소운은 재빨리 반응해 손에 든 석장을 가로로 휘둘러 그 몸체로 요풍을 때리려 했다.

    석장의 몸체에 새겨진 대비주 부적 문양이 순간 선홍색 빛을 뿜어내며, 빨갛게 달아오른 인판(印版)처럼 요풍의 두봉(*斗篷: 피풍. 소매 없는 외투) 위의 무늬를 찍었다.

    쿵!

    요풍의 두봉 위에 찍혀 나온 부적 문양에서 붉은 빛이 솟구치더니 마치 여러 송이의 화련(火蓮)처럼 피어났다. 그 안에 담긴 환하고 자비로운 기운은 불문(佛門)의 진법(眞法)을 품고 있어 더욱 강한 위력을 발산했다.

    맹렬한 불길 아래, 요풍의 두봉에서는 검은 안개가 무럭무럭 피어올랐고, 가운데에 불쑥 커더란 구멍이 생겨났다. 그렇게 드러난 요풍의 몸통에는 종횡으로 엇갈린 균열들이 가득했고, 그 안쪽은 검붉은 빛을 띠고 있어 깨지기 직전의 도자기 같았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요괴놈 같으니! 그 지경으로 중상을 입고도 감히 뻔뻔스레 큰 소리를 쳤더냐!”

    백소운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요풍은 두봉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라 표정을 볼 수는 없었으나, 그의 몸은 끊임없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가 옷소매를 다시 한번 휘두르자 세찬 마기가 솟아나와 모든 화련들을 집어삼키고 두봉에 생긴 구멍을 다시 메웠다.

    심협은 동공이 바짝 움츠러들었으나, 요풍이 절대로 그리 여유로운 상황은 아닐 거라 여겼다. 보아하니 백소천의 자폭은 요풍에게 진선기의 몸으로도 버티기 힘들 만큼의 심각한 상처를 입힌 것이었다.

    “호랑이도 평지에 내려오면 개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더니, 한낱 대승기 수사 따위가 감히 내 앞에서 큰소리를 치는구나! 피의 제물들을 먹고 난 뒤에 다시 너의 피와 살을 제대로 음미하겠다!”

    요풍은 이를 악물고 차갑게 내뱉더니 갑자기 두 손을 결인했고, 두 손의 장근(掌根:손바닥과 손목의 연결부위)를 서로 맞댄 채 열 손가락을 꽃송이처럼 벌려 가슴 앞에 받쳐 들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한가운데에서 눈부신 핏빛이 번쩍이며 마치 작열하는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심협은 그저 슬쩍 바라본 것만으로도 두 눈이 찌르는 듯 아팠다. 그러나 시선을 뗄 수도 없었다.

    이내 눈앞이 온통 시뻘겋게 변하더니 온 세상이 검붉은 색으로 한 겹 뒤덮인 것 같았다. 붉은 피가 끊임없이 굽이굽이 흐르고, 주위에는 사람들의 시신이 산처럼 쌓였으며, 더없이 진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때였다.

    “아우우~!”

    멀리서 야수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심협이 돌아보니, 등골에 뾰족한 뼈가 가시처럼 가득 돋친 흉악한 요수가 굽은 뿔이 돋아 있는 또 다른 요수와 다투며 한 청년을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둘이 물고 끌어당기자 그 청년이 산 채로 찢겨나가면서 뜨끈한 피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잔인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으나, 이 지옥 같은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기도 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설마…… 요풍이 만들어낸 환술인가?’

    심협은 두려운 와중에도 의아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는 조용히 사위를 살폈으나, 여기가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깊은 곳에 번갯불이 번득였으나, 천둥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심협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식해(識海)에도 간간이 잡음이 울리는 듯했다. 하지만 재빨리 놀란 마음을 억누른 그는 품을 더듬거리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푸른색 부적 한 장을 꺼내 법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종이 위의 부적 문양에서 푸른 빛이 피어올라 희미하게 반짝인 뒤, 순식간에 커져서 부적 전체를 비추었다.

    그가 손을 들어 가볍게 던지자 부적은 스스로 날아올라 그의 몸 앞에서 유유히 나부꼈다. 종이에서 펄럭이는 소리가 나면서 눈에 보이는 푸른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쳐 나와 그의 몸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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