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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210화 (210/1,214)
  • 210화. 뭔가 이상해

    성벽 위에 이른 심협은 늑대 요괴들이 물러가는 방향이 성 밖의 일행들이 숨어 있는 골짜기 쪽이 아님을 깨달은 후에야 마음을 놓았다.

    “도와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도우. 도우를 어찌 불러야 할지요?”

    그때 그의 뒤에서 갑자기 감사 인사가 들려왔다.

    심협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그 도포 차림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의 용모는 단정했고, 뜻밖에도 온화한 웃음기까지 띠고 있었다. 어디를 보더라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 지닐 법한 두려움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저는 심협이라고 합니다. 귀하의 성함은 어찌 되십니까?”

    심협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심 도우셨군요. 저는 요봉(姚峰)이라 합니다. 검각의 신임 각주(閣主)로, 분에 넘치게도 잠시 검문관의 책임자가 되었지요.”

    도포 차림의 남자는 포권을 하며 웃엇다.

    “그럼 귀하를 요 각주라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요 성주라 불러야 할까요?”

    심협은 눈썹 끝을 살짝 올리며 물었다.

    “그럴 거 없습니다. 이전 각주와 성주 모두 이미 전사했고, 성안에도 출규기 수사라고는 달랑 저 하나뿐이라 어쩔 수 없이 임시로 성주의 책임을 맡게 된 것뿐입니다. 그러니 그저 도우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요봉은 부끄러워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요 각주, 한데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아까 그리 위험한 상황에서도 왜 피하지 않으신 겁니까?”

    “아, 그게…… 아까는 성을 보호하던 검진을 복구하는 중요한 때였는데, 일단 정신이 분산되면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격이라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도우께서 그 늑대 요괴를 막아주지 않았다면 검진을 완전히 복구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리 됐다면 분명 검문관을 잃었을 겁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요봉이 탄식했다.

    “요 도우, 제게 감사하실 게 아닙니다. 지원하러 달려온 사람들이 적지 않거든요.”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말을 마치고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 높은 곳을 바라보니, 핏빛 박쥐들을 추격하러 갔다가 돌아온 백소운이 백벽 등과 합류해 다가왔다.

    “그건 당연하지요. 당연해요.”

    요봉이 황급히 말했다.

    심협이 성벽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부패한 듯 탁한 기운이 위로 훅 끼쳐 올라왔다. 아래쪽에 쌓인 시체들은 늑대 요괴고 할 것 없이 전부 뒤섞여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전쟁이 이리도 참혹하니 그대들이 성을 지켜내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그는 참지 못하고 탄식했다.

    “휴우. 건업성이 이미 뚫렸으니 이곳 검문관의 처지가 더 어려워질 뿐이지요. 우리 검각 제자들도 이미 반 이상이 전사했고, 장로들과 객경들도 몇 명 남지 않아 지금은 전부 칠성검진(七星劍陣)에 의지하여 성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요봉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심협은 일순 어찌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요 도우, 도우께서는 우선 전장의 일을 처리하시지요. 우리는 성 밖에 숨어 있는 사람들이 더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모이면 수고스러우시더라도 성문을 열고 우리를 들여보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심협의 말에 요봉이 경건한 표정으로 포권하며 답했다.

    “심 도우께서는 안심하십시오. 그대들은 건업성에서 산 넘고 물 건너 고생스레 오셨고, 또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니, 당연히 여러분께 검문관의 성문을 열어드릴 겁니다.”

    “그래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심협도 포권으로 답례하고는 성곽을 훌쩍 뛰어나가 성벽 위로 몇 걸음 비스듬히 걸어 사람들 곁에 내려섰다.

    “성곽 위에선 어찌 되었소?”

    백소운이 묻자 심협은 성벽 위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심협은 설명하던 도중 요봉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는 깨닫지 못했다.

    그때, 성벽 위에서 요봉이 부하들을 지휘하며 전장을 정리하는 호령 소리가 들려왔다.

    백소운은 성벽 위를 흘끗 한 번 보고는 몸을 돌려 백벽에게 말했다.

    “가서 숨어 있는 백성들을 데려오너라. 모두 함께 입성할 것이니.”

    “예.”

    백벽이 즉시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뛰어갔다.

    “저도 가서 모두 빨리 오도록 돕겠습니다.”

    심옥의 말에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겠지. 모두 최대한 빨리 입성시키고 요수(妖獸)들이 다시 쳐들어오는 것을 막읍시다.”

    그때 한쪽에서 무시하는 듯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놈들이 밀려나는 꼴을 보지 못했소? 다시 쳐들어오다니, 그것들이 감히?”

    막 떠나려던 심옥이 돌아보니 녹옹이 키득거리고 있었다.

    심옥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약간의 혐오감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비아냥거림 때문이 아니라, 요괴들과 싸우는 동안 보이지도 않던 그가 지금 갑자기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 짐승들도 아닌데 감히 못 그러리란 걸 어찌 알지?”

    심협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이놈 뭐라 했…….”

    녹옹은 그의 말을 듣고 벌컥 화를 냈으나, 옆에서 백소운이 마침 자기 쪽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는 가까스로 참았다.

    “난 물론 그런 짐승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짐승들의 말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건 알지. 아까 정말 누구 말마따나 코뿔소 따위의 말을 듣고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면 이 검문관은 아주 참담했을 것 아닌가!”

    그러자 녹옹 뒤에 선 사내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쉽게 믿지 않아 다행이지요. 그놈은 정말 나쁜 뜻을 품었다니까요.”

    “다음번에 또 그놈을 만난다면 속 시원히 죽여 없애는 게 좋을 겁니다.”

    또 누군가가 외쳤다.

    “됐네. 그 요괴가 과장을 하긴 했어도 사실 거짓은 아니었지 않나. 적어도 검문관이 공격당한다는 소식을 미리 알고 준비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네.”

    백소운이 그렇게 말하고서야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반 각 정도 후, 백벽 등이 백성들을 이끌고 천천히 달려와 성문 밖에 멈춰 섰다.

    성문 앞에 산처럼 쌓여 있던 시체들은 깨끗이 치운 후였지만, 길 양옆에 쌓인 시체 무더기는 그대로라 소름이 끼쳤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두 짝의 중후한 대문이 천천히 밖을 향해 열렸다.

    심협이 안쪽을 살펴보니, 양옆으로 남녀노소 수십 명이 서 있었다. 몸의 기운과 부상 정도로 보아 모두 수행 중인 사람인 듯했다.

    이 사람들 뒤에는 수백 명이 빈틈없이 촘촘하게 서 있었는데, 빼곡히 둘러 선 채로 성안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잠깐 살펴보니, 앞에 서 있는 수사들은 그래도 상태가 괜찮아 한 사람 한 사람 눈에 빛이 좀 돌았으나, 뒤쪽에 선 보통 백성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피로감이 가득하고 무표정했다. 요마(妖魔)들의 습격을 수없이 겪은 모습이었다.

    “도우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일단 들어오셔서 이야기 나누시지요.”

    푸른 도포를 걸친 요봉이 인파를 헤치고 가장 앞으로 걸어와 사람들을 향해 읍(*揖: 가슴 앞으로 두 손을 맞잡고 하는 인사)하며 예를 갖추고는 말했다.

    “우리도 잠깐 지나가는 길이니 너무 폐 끼치지는 않을 것이오. 고생이 많소.”

    백소운은 손바닥을 세우며 예를 갖추었다.

    “폐라니요, 당치않습니다. 여러분이 좀 더 오래 머무르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봉은 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편, 심협은 다시 한참이나 문 안쪽을 둘러보다가 슬그머니 심옥 옆으로 물러나 그녀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몇 마디 했다.

    그러자 심옥은 침착한 얼굴로 심화원에게 다가가 몇 마디를 일러주었다.

    사람들의 주의는 전부 문 안으로 향해 있어 누구도 이들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여러분, 어서 성안으로 드시지요. 비록 성대한 연회석은 없지만, 그래도 여러분들을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하였으니 마다하지 말아 주십시오.”

    요봉은 손짓하며 ‘청하는’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이에 백소운은 곧 모두에게 성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해 보인 뒤,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문 안으로 들어가 성을 향해 걸었다.

    성안 사람들은 분분히 물러나며 길을 비켰다.

    이어서 녹옹 등이 건들거리며 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심협은 급히 따라 들어가지 않고 대문가에 서서 백성들이 마차를 몰고 성안으로 들어가도록 이끌었다.

    심가 사람들은 심협의 당부를 들었기에 줄곧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간 뒤에야 원래 행렬의 제일 끝에 가서 섰다.

    모든 것은 질서 정연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음,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 같군.”

    심협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속으로 남몰래 한숨을 내쉰 뒤, 행렬 앞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앞쪽 행렬은 어느새 성안의 광장에 이르렀다.

    안의 담벼락 쪽 바닥에는 석유가 채워진 술 단지들과 가지런한 화살 뭉치들이 쌓여 있었다. 조금 멀리 떨어진 다른 한쪽에는 임시로 세운 화덕도 볼 수 있었는데, 전시에 보급은 모두 이 광장에서 해결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던 심협은 또다시 의문이 들었다. 화덕 아래에는 마치 아주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듯 불기운이 전혀 없었고, 심지어 한 가닥 온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앞서 요 도우가 말한 대로라면, 요수들이 성을 포위한 지는 이미 며칠 되었을 테니 이곳 화덕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어야 옳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심협은 요풍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자세히 떠올리다가 갑자기 눈빛이 번쩍였다. 마침내 자신이 뭐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생각 난 것이다.

    ‘아까 나는 요봉에게 건업성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는데도 그는 우리가 건업성에서 산 넘고 물 건너 수고스레 왔다고 했다! 더욱이 건업성은 함락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소식이 퍼졌을 가능성도 낮지. 이곳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고는 해도 이런 세상에서 어찌 제대로 소식을 접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심협은 최대한 덤덤한 목소리로 요봉에게 물었다.

    “요 도우, 우리에 앞서 누군가 도우러 온 적이 있소?”

    “지금은 다들 제 한 몸 돌보기도 바빠 피난 오는 이조차 없는데 어찌 와서 도와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니 우리도 정말 다행이지요.”

    요봉은 생각해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 또한 인연이긴 하군요.”

    심협은 비록 표정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백소운에게로 몇 걸음 다가가 막 이 일을 알리려 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성문 닫히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건업성에서 도망쳐온 모든 백성과 수사들이 이미 검문관으로 들어온 뒤였다.

    심협은 일이 잘못됐다는 생각에 신식을 통해 백소운에게 알리려 했다.

    하지만 그는 백소운이 성에 들어온 뒤로도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한 것을 떠올리고는 망설이기 시작했다. 이 검문관 안에 숨어 있는 이가 누구든 간에 대승기 수사인 백소운 앞에서도 들키지 않을 수 있다면 분명 평범한 놈이 아닐 터였다. 그런데 만약 신식으로 말을 전한다면 섣부른 행동으로 일을 그르치게 될지도 모르니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그래도 백소운에게 다가가 불러 세웠다.

    백소운은 무슨 일인지 묻는 듯한 눈빛이었고, 요봉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검문관에는 검진의 봉쇄가 있고, 요 각주께서 지키고 계시니 안전한 곳이긴 하오. 그러니 사우흔도 데려오는 게 낫지 않겠소?”

    심협은 태연한 표정으로 백소운에게 물었다.

    심협은 예전에 사우흔이 백가를 배반하고 도망친 일로 인해 백소운이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그 뒤 그 역시 화생사로 향했으니, 이 이야기에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눈치챌 거라 믿고 말했다.

    과연 백소운은 그 말에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형이 그리 말하다니, 나도 마침 그럴 생각이었소.”

    “사우흔? 여러분께 혹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친우분이 있으십니까?”

    요봉이 곧바로 다가와 물었다.

    “그렇습니다. 친구 몇몇이 성 밖에 더 있는데, 조금 늦게라도 이리로 올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의 벗이라면 당연히 모셔야지요. 우리 검각과 검문관의 백성들은 두 손 들어 환영합니다.”

    요봉은 그 말에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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