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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208화 (208/1,214)
  • 208화. 왜 또 너야

    한편, 심협은 마차 밖에 앉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넋을 놓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 허공을 맴돌았다. 그의 손에 끼워진 황지 부적은 가볍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따라 살짝 흔들리며 간간이 약하게 푸드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선배님, 건업성에서 오신 뒤로 줄곧 울적해하시는데, 마음에 맺힌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심옥이 옆에 앉아 인상을 살짝 찡그린 심협을 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 말에 심협은 정신을 차렸지만,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백소천의 죽음은 그에게 실로 큰 충격이었다. 그가 과거에 인정했든 인정하지 않았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꿈속 세계에서 겪은 일들을 한 번의 경험이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절친한 벗이 반선의 몸으로도 전사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는 이곳이 그냥 꿈속일 뿐만 아니라, 천 년 뒤에 확실히 일어날 일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만약 현실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춘화성이 무너지고, 건업성이 무너지고, 친족과 벗들이 전부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면? 그때 그는 지금처럼 어쩔 도리 없이 수수방관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최대한 더 강해져야만 해.’

    심협은 속으로 맹세하며 무의식적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선배님!”

    심협을 바라보던 심옥은 시선을 갑자기 아래로 옮기며 가볍게 외쳤다.

    그제야 심협은 고개를 숙여 손에 쥔 과산부를 내려다보았다. 부적에서는 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요기가 있소!”

    심협은 즉시 일어나 행렬을 불러 세웠다.

    심가의 수사들은 곧바로 방어태세를 취하고 흩어져서 자기 일가 사람들 주위를 호위했다.

    뒤이어 또 여러 사람의 형체가 뒤쪽에서 서둘러 달려왔는데, 그 우두머리는 녹옹이었다.

    “왜 그러오? 무슨 일이 났소?”

    녹옹이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

    심협이 설명하기도 전에 한 줄기 둔광이 뒤쪽에서 빠르게 다가왔다. 백소운이 행렬 끝자락에서 달려온 것이다.

    “앞에 한 가닥 요기가 이쪽으로 오고 있네만, 강해 보이지는 않는군.”

    “하나뿐입니까? 요괴 대군의 척후병은 아닐까요?”

    백소운이 말에 녹옹 뒤에 서 있던 구레나룻이 곱슬곱슬한 사내가 진중하게 물었다.

    “아닐 거요.”

    심협이 바로 대답했다.

    “아니라는 걸 그대가 어찌 아오?”

    구레나룻 사내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 그러나 심협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곧장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뎌 혼자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이 그를 따라 바라보니 저 앞쪽 길에 키가 거의 1장에 이르는 거대한 형체가 서 있었다. 체격이 아주 우람했는데, 상체는 벌거벗었고, 하체에는 긴 바지를 입었으며, 허리에는 사나운 사자 얼굴이 새겨진 낡은 허리띠를 두른 채, 어깨에는 커다란 귀두추를 메고 있어 아주 위풍당당해 보였다.

    “이 산은 내가 개척했고, 이 나무들은 내가 베었으니, 지나가고 싶으……. 아니, 왜 또 하필 네놈이냐?”

    우람한 체구의 무언가가 말을 하다 말고 깜짝 놀라 외쳤다.

    “코뿔소 장군. 나야말로 묻고 싶군.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심협도 이맛살을 찌푸리며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눈앞의 사람은 놀랍게도 지난날 심협 일행을 약탈하려 했던 그 코뿔소 요괴였다.

    “나는…… 그게…… 너…….”

    코뿔소 장군은 순간 말문이 막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 백소운과 사람들도 달려왔다.

    “길을 막고 강도질이나 하는 일개 코뿔소 요괴요. 요마(妖魔)들의 척후병 같은 건 아니니 안심들 하시오.”

    심협이 설명했다.

    맞은편의 코뿔소 장군은 갑자기 나타난 수선자(修仙者) 무리를 보고 잠시 넋이 나갔다. 그러다가 시선이 백소운에게 닿았을 때는 거의 숨도 쉬기 힘들었다.

    ‘더러워서 강도짓도 못해먹겠네! 이게 어디 강도가 길을 막고 약탈하는 것이겠는가? 그야말로 관아에 뛰어들어 관차(*官差: 관청의 하급 관리)들의 포위망 안으로 기어들어간 꼴이지!’

    코뿔소 장군이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데, 녹옹이 눈을 치켜뜨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마들의 척후병이든 아니든 일단 죽이고 봅시다.”

    그러자 심협이 싸늘한 목소리로 잘랐다.

    “이리 제멋대로 날뛴다면 그대가 요마와 다를 게 무어란 말이오?”

    그 순간, 녹옹의 뒤를 따라온 몇 사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그들 생각에 요물은 보이는 대로 죽이는 게 당연한 이치였다.

    “심 대형, 저자를 아시오?”

    백소운이 심협을 쳐다보며 물었다.

    “전에 만난 적이 있는데, 살의 같은 건 없는 자요. 극악무도한 놈은 아니지.”

    심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백소운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육을 즐기는 악한 요괴도 아닌 바에야, 그냥 두고 떠납시다. 우리 가는 길을 막지 말거라.”

    코뿔소 장군은 백소운의 말에 죽다가 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막 길을 비켜주려다가,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물었다.

    “네놈들은 어디로 가려느냐?”

    그 질문에 녹옹이 사납게 외쳤다.

    “감히 우리 행방을 염탐하려 들다니, 역시 요족의 척후병이로구나!”

    심협도 미간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네 녀석이 그건 물어 어디에 쓰려고?”

    “이 길은 검문관으로 곧장 통하지. 내 충고하건대 그리로 갈 바에야 돌아서는 것이 좋을 게다.”

    코뿔소 장군은 어깨 너머로 뒤쪽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녹옹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일갈했으나, 코뿔소 장군은 그에게 눈길조자 주지 않고 심협에게로 돌아서서 말했다.

    “전에 나를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거기에는 정말 기괴한 것이 있으니 가지 말란 말이다.”

    “어떤 기괴한 것이 있는지 분명히 말해줄 수 있는가?”

    “나도 자세한 건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미 앞서 많은 요수가 그쪽으로 집결했다. 지금 가봐야 그쪽은 이미 함락되었을 것이다.”

    심협은 그 말에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으름장을 놓아 겁을 주려 하다니. 검문관은 검각이 진을 치고 지키는데 어찌 그리 쉽게 뚫리겠느냐?”

    녹옹이 냉소했다.

    “맞습니다. 제 생각에 저놈이 저의를 가지고 우리를 막으려는 것 같습니다.”

    구레나룻이 곱슬곱슬한 사내도 따라서 외쳤다.

    “죽여라!”

    누가 먼저 외쳤는지,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외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요마들에게 분노와 원한이 너무 많이 쌓인 터이니, 요족이 선한지 악한지 어찌 가려내겠는가? 나와 동족이 아니면 그 마음이야 어떻든 일단 죽여서 분풀이하고 보는 상황이었다.

    “헤헤, 내가 이 요족 첩자를 죽이겠소!”

    녹옹이 히죽 웃고는 손을 맞비비며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심협이 한 발 성큼 나아가 그 앞을 막아서더니 차가운 눈으로 녹옹을 마주 보았다.

    “나를 막겠다는 게요?”

    녹옹은 심협을 힐끗 쳐다보았으나, 어쨌든 자신의 수련 경지가 훨씬 윗길인지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심협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소매에서는 바람 소리가 일어났고, 반월환이 이미 손바닥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그때, 백소운이 불쑥 입을 열었다.

    “누구든 저자를 치려거든 먼저 나와 겨뤄야 할 걸세.”

    그렇게 말하면서도 녹옹을 빤히 바라보는 게, 심협을 편드는 기색이 분명했다.

    “아이고,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저 작은 요괴를 겁줬을 뿐입니다.”

    녹옹은 재빨리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코뿔소 장군은 그들이 자신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자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심협, 나를 믿는다면 가지 마라.”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귀두추를 들쳐 멘 채 몸을 돌려 산속으로 멀어져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산속 멀리서 포효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늙은이가 감히 나를 작은 요괴라 불렀겠다! 이 몸은 조만간 대요가 되어 튀어나오기만 해도 네놈은 놀라 죽게 될 것이다!”

    그 말에 녹옹은 흠칫 놀랐다가 뒤이어 분노로 눈이 이글거렸다.

    “저 요괴 새끼가 감히 나를 욕해?”

    한편, 심협은 이 광경에 웃음을 참기 힘들어 잠깐 숨을 고른 후 입을 열었다.

    “이 코뿔소 요괴는 본성이 악하지 않으니,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닐 듯하오.”

    “심 도우, 정말 저 작은 요괴한테 속아 넘어갈 작정은 아니겠지요?”

    녹옹이 비웃었으나, 심협은 그를 상대하기 싫어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녹옹은 멈추려 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지금 당장 검문관 말고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그대도 알 거요. 그리로 가지 않는다면 길을 돌아 무산(巫山)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지 않소?”

    그 말에 나머지 사람들의 낯빛도 약간 변했다.

    “무산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절대 안 돼요!”

    곱슬곱슬한 구레나룻의 남자가 고개를 도리질했다.

    심협은 이유를 몰랐지만, 섣불리 묻지 않고 그저 고개를 돌려 백소운을 바라보았다. 어쨌거나 지금 온 행렬에서 진정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 아닌가.

    “무산 산맥은 요마들이 차지한 지 오래라 위험이 너무 많지. 분명 좋은 선택이 아니오. 전에 내가 건업으로 왔을 때도 검문관을 지났었는데, 성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눈길 닿는 곳들 모두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 무사했소. 그 짧은 시간 안에 무슨 큰 변고가 생기진 않았을 것 같소만.”

    백소운이 잠깐 생각해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그 말에 심협도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백소운도 잠시 생각하고는 다시 말했다.

    “그럼 이리 합시다. 검문관까지 가서 일단 성안으로 급히 들어가지 말고, 내가 들어가서 정탐해본 후에 아무 이상이 없으면 모두 들어가는 거요. 어떻소?”

    “선배님 말씀이 아주 지당하십니다. 그리하는 게 좋겠어요!”

    녹응이 재빨리 손뼉을 치며 찬성하자 다른 사람들도 잇달아 응했다.

    백소운이 자기를 바라보자 심협도 약간 망설인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나 검문관으로 향했다.

    코뿔소 장군이 먼저 귀띔해주었기에 사람들은 속도를 높일 수밖에 없었고, 한나절도 채 되지 않아 검문관 부근에 이르렀다.

    그런데 검문관까지 3, 4리 정도 남은 산속 평지에 도착했을 때, 멀리서 사람들의 외침과 야수들의 울부짖음이 잇따라 들려왔다. 코뿔소 장군의 말이 진실이었음은 물론, 이곳 검문관에 과연 큰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수사들 절반은 남아서 이곳 백성들을 호위하고, 남은 사람들은 나와 함께 검문관을 지원하러 갑시다!”

    백소운이 입을 열어 소리쳤다.

    “노조님,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백벽이 제일 먼저 응답했다.

    “나도 가겠소.”

    심협도 말했다.

    이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응했다.

    “저도 선배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검문관 쪽을 힐끗 보고는 얼굴에 잠시 망설임이 스쳤으나, 녹옹도 그렇게 외쳤다.

    백소운은 사람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말했다.

    “화규(花奎) 도우, 자네가 백성들의 보호를 맡게. 그 외에는 모두 나를 따라 함께 검문관으로 갑시다.”

    “좋습니다!”

    얼굴에 수염이 가득한 중년 사내가 바로 대꾸했다.

    “예!”

    “선배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나머지 사람들도 줄줄이 대답했다.

    백소운 일행은 화규가 일반 백성들을 이끌고 피하자 자연히 속도를 높여 순식간에 검문관에 도착했다.

    검문관은 본디 무산 산맥 정중앙에 박혀 있는 웅장한 관문으로, 양쪽 모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한가운데가 성의 본체였다. 또한 전체적으로 거대한 바위들이 겹겹이 쌓여 있고 그 높이가 백 장을 넘어 수비하기는 쉬워도 공격하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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