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207화 (207/1,214)
  • 207화. 녹(鹿) 대인

    심협 쪽에서 가장 앞에 가던 것은 심가의 마차 행렬이었는데, 수레를 끌던 말 한 마리가 놀라 울부짖으며 상대 행렬의 그 화려한 마차를 향해 돌진했다.

    마차를 몰던 이는 온 힘을 다해 고삐를 당기며 놀란 말을 붙들려고 했다.

    “어디서 온 잡놈들이냐! 녹 대인의 마차를 들이받다니 죽고 싶은 게로구나!”

    회색 옷의 사내가 표정이 급변하더니 손바닥을 뒤집어 허공을 한 번 쳤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땅이 피식하고 갈라지면서 두 개의 물줄기가 솟아나왔다. 한 줄기는 파란 빛을 반짝이며 광분한 말을 휘감아 멈춰 세웠고, 다른 한 줄기는 커다란 손이 되어 회색 옷 사내의 퍼런 손바닥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튕겼다.

    펑!

    푸른 손바닥이 단숨에 폭발해버리면서 회색 옷의 사내는 크게 휘청거렸고, 몇 걸음이나 물러난 후에야 가까스로 바로 설 수 있었다. 그의 안색은 온통 창백했고,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나른한 목소리 하나가 화려한 마차 안에서 들려왔다.

    “실로 정묘한 어수지술(御水之術)이오. 내가 한 수 배워야겠구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심가 마차의 상공에서 바람 소리가 나더니, 하얗고 커다란 손이 어디선가 나타나 물로 된 손바닥을 잡아채려 했다. 다섯 손가락이 허공에 검은 흔적을 남기며 세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물 손바닥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시 날아들어 칼같이 날카로운 상대의 손끝을 단숨에 피하고는 손가락을 굽혀 희고 큰 손의 장심을 찍었다.

    하얀 손은 휙 뒤집히며 바짝 스쳐 지나가더니, 칼처럼 손가락을 모아 물 손바닥의 손등을 베려고 했다.

    두 손바닥은 허공에서 번개처럼 빠르게 서로를 공격했다. 하얀 손의 위력이 눈에 띄게 커졌지만, 물 손바닥은 상당히 날렵해 위기의 순간에도 공세를 피해가며 맹렬히 반격했다.

    “흥!”

    화려한 마차 안에서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하얗고 커다란 손 주위의 공기가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하얀 바람 줄기 3개가 갑자기 떠올라 물 손바닥을 향해 감겨들었다. 동시에 하얀 손의 표면에서 하얀 빛이 한 층 나타나더니 갑자기 두 배쯤 커지면서 사납게 아래로 내리쳐 주위 반경 몇 장을 뒤덮었다.

    이때, 아래쪽에 있던 물 손바닥이 허공 높은 곳에서 결인을 했다. 그러자 그 위에 푸른 빛이 번쩍였고, 물 손바닥 역시 순식간에 커졌다. 이어서 손가락을 연달아 세 번 튕겼다.

    펑! 펑! 펑!

    세 줄기 수인(水刃)이 날아가 세 가닥의 바람과 맞부딪치며 서로 소멸했다.

    푸른 물 손바닥도 별똥별처럼 위를 향해 날아가 하얀 손과 부딪치며 둔탁한 굉음을 냈다.

    하지만 뜻밖에도 물 손바닥은 일격을 견뎌내지 못한 듯 무너져 수없이 많은 물방울로 부서져 내렸다. 그러자 화려한 마차 안에서는 득의양양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으나, 이내 뚝 그쳤다. 부서진 물방울 속에서 어느새 물로 된 가시가 솟아나더니 눈 깜짝할 새에 하얀 손을 꿰뚫어버렸기 때문이다.

    커다란 손에서는 하얀 빛이 어지러이 번쩍이더니 마침내 폭발하며 광풍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양쪽의 마차 행렬 모두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화려한 마차 안의 사람은 화가 난 듯 또다시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얀 빛이 줄줄이 떠오르며 주변 공기가 다시 한번 요동쳤다.

    “두 선배님께서는 멈추시지요!”

    큰 고함이 울렸다. 백벽이 뒤에서 급히 말을 몰아 앞으로 나 온 것이다.

    “백벽, 자네였구먼! 백가도 건업성에서 탈출했을 줄은 생각지 못했네.”

    마차 안의 사람은 놀란 듯 외쳤지만, 여전히 몸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퍽이나 거만한 모습이었다.

    “역시 녹옹(鹿雍) 선배님이셨군요. 후배가 인사 올립니다.”

    백벽은 눈빛이 한 번 움찔 흔들리더니 공수했다.

    한편, 그 말에 백가와 임가 두 집안의 비교적 경지가 높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약간 경멸하는 듯한 기색이 드러났다.

    “백벽, 아까 나선 그 도우는 자네 백씨 집안 객경인가?”

    녹옹은 목소리에 전혀 부끄러운 기색 없이 경박한 어조로 물었다. 백가에 대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아닙니다, 그 선배님께서는 우리 백씨 집안의 벗이십니다. 녹 선배님, 그저 오해였을 뿐이고 지금은 마겁이 눈앞에 닥쳤으니 우리끼리 더는 충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악수하고 화해하는 게 어떨지요?”

    백벽이 차분하게 말했다.

    “백벽, 아직도 자네에게 나를 중재할 위신이 남아 있을까 걱정이 되는군.”

    완연한 비웃음과 함께 화려한 마차의 천으로 된 휘장이 갑자기 걷히더니 안에서 금빛 옷을 입은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눈은 매처럼 날카로웠고, 입술은 아주 얇아서 음흉하고 몰인정한 느낌을 주었다.

    그때, 심협이 탄 마차의 휘장이 천천히 걷혔다.

    “백벽의 위신으로 모자란다면 내 위신은 어떠한가?”

    이 말을 한 이는 당연히 백소운이었다.

    “서, 설마…… 백소운 선배님!”

    녹옹은 눈이 휘둥그레져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지어 그의 행렬 사람들이 소란해진 것을 보니 모두 백소운을 아는 것이 틀림없었다.

    “녹 도우께서 이 백모를 아직 알아보시는구먼. 정말이지 영광이야. 녹 도우가 이제 우리 백씨 집안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줄로만 알았지 뭔가. 허허허!”

    백소운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눈동자에는 싸늘한 냉기가 스쳐갔다.

    “후, 후배가 허튼소리를 지껄였습니다요. 절대 감히 백가에 불경한 마음이 있어서 한 말은 아니니 백 선배님께서는 용서해주십시오.”

    녹옹은 낯빛이 돌변하여 황급히 허리를 굽히고 사죄했다.

    백소운은 말없이 녹옹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숨까지 죽이며 감히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해, 깊은 정적이 흘렀다.

    바로 그때, 녹옹의 머릿속이 갑자기 웅웅 울리더니 현기증이 일었고, 큰 바다 같이 광오하고 거대한 압력이 그의 몸을 짓눌렀다.

    녹옹은 낯빛이 크게 변하여 있는 힘껏 반항했지만, 이 압력은 하늘만큼 높았다. 그 앞에서 그는 땅강아지나 개미처럼 보잘것없고 비천하여 어떤 반항도 헛수고였다.

    녹옹은 안색이 창백해지고 호흡도 가빠왔으며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했는데, 녹옹이 갑자기 괴로운 얼굴로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고는 다들 의아해했다.

    심협은 어렴풋이 뭔가를 느끼고 흥미롭다는 듯 두 눈을 번쩍였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백소운이 어떤 신통력을 발휘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순식간에 녹옹을 제압하는 백소운의 실력에 속으로 감탄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자 녹옹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졌고, 온몸은 풀처럼 끈적이는 땀으로 뒤덮였으며, 두 다리는 와들와들 떨려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그때, 백소운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갑자기 사라지자, 동시에 녹옹을 짓누르던 압력도 흩어졌다. 녹옹은 손으로 마차를 부여잡고서야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는 입을 최대한 크게 벌려 숨을 헐떡였다.

    “손속에 사정을 두는 것은 이번 한 번뿐일세!”

    백소운이 느릿느릿 말했다.

    “예, 선배님. 인정을 베풀어주심에 실로 감사합니다.”

    녹옹은 헐떡거림조차 멈추고 허리까지 숙여가며 공수했다.

    백소운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마차 휘장이 드리워졌다.

    녹옹은 긴장이 탁 풀어지며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몸을 꼿꼿이 세웠다.

    “백벽 도우, 그대들은 어디로 가려는 것이오?”

    그는 벌써 웃는 낯으로 몸을 돌려 백벽을 바라보면서 공수하고는 물었다. 이에 백벽은 어이가 없었으나, 애써 사람 좋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장안으로 가려던 참입니다.”

    “걸출한 이들의 의견은 대부분 같을 수밖에 없지. 이 녹모 역시도 장안으로 가던 길이니 우리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소? 녹모의 수행이 얕아 사나운 요물을 만나기라도 하면 백 선배님의 힘을 좀 빌리고자 하는데…….”

    녹옹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제가 노조께 여쭤보겠습니다.”

    백벽은 곤란한 얼굴로 백소운의 마차를 향해 두 걸음을 옮기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말했다.

    “노조께서 허하셨습니다. 앞으로 녹 선배님께 많은 가르침 부탁드리지요.”

    백소운이 그의 머릿속으로 소리를 전한 것이리라.

    “천만의 말씀! 백 도우, 그대들 먼저 지나가시지요.”

    녹옹은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자신들의 마차 행렬을 뒤로 물리고 길을 양보했다.

    녹옹의 일행은 모두 건업성의 소가족과 산수들로, 이들 역시 백소운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와 동행하는 드문 기회를 마다할 리 없었다.

    백벽도 사양치 않고 마차 행렬을 이끌고 앞으로 향했고, 녹옹과 일행은 그 뒤를 따랐다.

    한편, 백소운이 갑자기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두어 번 낮게 기침을 했다.

    “괜찮소?”

    심협이 걱정스런 얼굴로 급히 물었다.

    “괜찮소. 화생사에서 여기로 달려오는 길에 동급의 요물을 마주쳤는데, 한 차례 대전을 치르며 내상을 좀 입었소. 지금에야 부상이 발작을 일으키는군요.”

    “얼른 회복하시기 바라오. 앞으로 사나운 요물들을 만나면 백 도우가 진두지휘해야 하니 말이오.”

    심협이 방해하지 않기 위해 몸을 일으키며 인사를 건네자 백소운도 만류하지 않았다. 그는 가부좌를 틀었고, 곧 몸에 한 겹 금빛이 감돌았다.

    심가의 마차 행렬로 돌아간 심협 역시 눈을 감은 채 수련을 시작했다.

    * * *

    녹옹 일행이 합류한 후로 며칠이 지났다.

    심협 무리는 그 뒤로도 또 수많은 산수와 유민들을 계속 거두었고, 이제 그 수가 300여 명에 육박했다. 하지만 그런 까닭에 이동 속도는 크게 늦춰져 아직 검문관 그림자조차 볼 수가 없었다.

    심협은 심가 사람들을 거느리고 전체의 선봉을 맡았고, 백가 사람들은 무리의 가장 뒤에서 행군했다. 백소운도 그 안에서 진두지휘하며 요마들이 뒤따라오지 못하게 막았다. 녹옹은 행렬의 중간쯤에서 앞뒤 사람들의 협동을 책임졌다.

    “녹 선배님, 검문관까지 얼마나 더 남았습니까?”

    옆에서 따라오던 산수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녹옹은 그를 한 번 흘끗 보고 ‘이 몸이 어찌 알겠느냐’고 욕을 한마디 하려다가 다시 그대로 꿀꺽 삼키며 겨우 참았다.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리에 유민을 받는 것이 사실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그 유민들은 본디 땅에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벌레들과 다를 바 없었다. 조금 일찍 죽으나 늦게 죽으나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그들을 곁에 두는 건 그저 부담일 뿐이었다.

    “어르신 쉬시는 걸 방해하다니, 저리 가게! 선배님을 귀찮게 하지 말고.”

    한 사람이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손을 내저어 그 산수를 쫓아내고는 녹옹에게 알랑거렸다.

    그들은 원래 백소운을 따라 가고 싶었다. 어쨌거나 그의 경지가 워낙 높으니 그를 따라다니면 더 안전할 것 아닌가?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자신들이 있는 아양 없는 아양을 다 떠는데도 백소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대할 줄이야! 하물며 그는 심협이라는 수사(修士)만 특별히 챙기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무리 중 수련 경지가 두 번째로 높은 녹옹을 찾아가 위험이 닥쳤을 때 그를 붙들고 더 많은 보살핌을 받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녹옹은 사람들이 자신을 떠받드는 것을 매우 즐겼다. 게다가 앞서 거두었던 소가족 사람들까지 더해지면서 주위에 적잖은 사람들이 모여, 엄연히 이 행렬에서도 많은 사람의 중심이 되었다.

    사람들이 이리도 절박하게 검문관으로 달려가고자 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그곳이 현재 장안성까지 무사히 도달할 수 있는 필수 요충지라는 게 첫째였다. 또한 본디 험준한 관문이자 큰 성인 만큼 방어가 견고한 데다가 앞서 검각(劍閣) 종문의 핵심이 성안으로 이동해, 아직 함락되지 않은 몇 안 되는 웅대한 성이라는 점이 둘째 이유다. 이제 막 건업성에서 도망쳐 나온 이들은 극도로 긴장되어 있어, 안전한 곳이 절실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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