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206화 (206/1,214)
  • 206화. 장안으로 달아나다

    “백 도우, 말 그대로, 실로 오랜만이오.”

    솔직히 말해 심협은 지금 백소운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다소 어색한 안부 인사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정말 심 대형이구려! 그때 몽성(蒙城)에서 헤어진 뒤로 행방이 묘연했는데 오늘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소!”

    백소운은 희색이 가득한 얼굴로 두 팔을 들어 심협을 껴안으려는 듯했으나, 뭔가 어색했는지 멈칫하더니 심협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게 말이오. 나도 여기서 그대를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구려.”

    심협은 속으로 백소운이 말한 몽성이란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으나, 캐묻지 않고 활짝 웃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협이 백소운과 아는 사이인 것으로 보였는데, 심지어 오랜 벗인 듯하지 않은가.

    한편, 심가 사람들은 더욱 놀랐다. 심협은 스물을 갓 넘긴 모습이었는데 백소운과 절친한 벗인 데다가, 하물며 백소운이 ‘형’이라 불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설마 그가 깊이 숨어 있던 천년 묵은 노괴(老怪)라도 된단 말인가?

    “참, 심 대형은 어찌 여기 있는 것이오?”

    백소운은 반갑고 기쁜 와중에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내 이곳 춘화성이 요마들의 공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살펴보러 왔소. 심가 일맥(一脈)은 어쨌거나 나의 후손이니 말이오. 허나 아직 그들에게 내 정체는 이야기하지 않았으니, 백 도우도 모르는 척해주시오.”

    심협은 멀리 심가 사람들을 흘끗 보고는 머릿속으로 목소리를 전했다.

    백소운은 어리둥절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백 도우는 어찌 여기 있는 것이오? 어쨌든 덕분에 살았소.”

    심협이 말을 돌리자 백소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내 화생사에서 수련하고 있다가 며칠 전 요마들이 건업성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도우러 달려가던 길이오. 도중에 백가 자제들의 구조요청을 받아 우회하여 여기로 왔소.”

    “그런 거였군.”

    심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 대형, 건업성이 함락되었다는 게 사실이오? 진짜로…… 우리 형님도 이미 돌아가셨소?”

    백소운은 아직 한 줄기 기대가 남아 있는지 심협의 눈을 보며 물었다.

    “사실이오.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보았소. 백형은 같은 경지의 요괴 두 마리를 연달아 죽이고 세 번째 요괴의 습격에 중상을 입은 뒤 자폭했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실로 일세의 영웅이었소.”

    심협이 탄식하며 말했다.

    “형…… 형님이…….”

    백소운은 몸을 떨었다. 일말의 기대감마저 철저히 부서져 버린 인간의 모습이었다.

    “백 도우, 그는 우리 인간족의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으니 결코 여한이 없었을 것이오.”

    심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그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슬프지 않소. 오히려 형님이 자랑스럽지. 마겁이 내려와 천하의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으니 우리 같은 수사(修士)들은 천하의 백성들을 위해 싸워 마땅하지요. 생사쯤이야 얼마든지 내던질 수 있는 것 아니겠소?”

    백소운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천천히 내뱉으며 말했다.

    “백 도우는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소? 우리는 장안성으로 갈 계획이오.”

    심협이 화제를 돌렸다.

    “백가의 남은 자손은 이들이 전부이니 내 그들을 보호할 거요. 장안으로 가겠다는 결정은 옳소. 그나마 그곳만은 안전하니까.”

    백소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백 도우가 동행한다면 제아무리 지독한 요물이라도 두려울 것이 없겠구려.”

    심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는 줄곧 노심초사했는데, 백소운이라는 대승기 수사가 합류했으니 마음 놓고 자신의 봉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여기가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곳이 아니니 가면서 이야기합시다.”

    백소운은 세 집안의 마차 행렬을 향해 손짓하여 장안성 방향을 향해 가도록 지시했다.

    막 변고를 겪으면서 세 집안 모두 사상자가 적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망가진 마차는 많지 않아 길을 가는 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벡가에서 마차를 한 대 마련해주자 백소운은 심협을 이끌고 함께 올랐다. 심협도 사양하지 않았다.

    “지금 심 대형의 수련은 어느 경지까지 이르렀소? 법력을 지니면 육신의 노화가 늦어지긴 하지만 세월이 이리 많이 흘렀으니, 아무리 젊음을 유지하는 재주가 있다 해도 외모에 큰 변화가 생기기 마련이거늘 심 대형은 그때와 똑같아 보이니 말이오. 설마 벌써 육신이 쇠하지 않는 진선의 경지에 이른 것이오?”

    백소운은 심협의 용모를 살펴보고 잠시 주저하더니 물었다.

    “그럴 리가. 난 그저 운 좋게도 상고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주안단(駐顔丹)한 알을 먹어 얼굴이 늙지 않았을 뿐이오. 나의 수련 경지는 이제 겨우 출규 중기에 불과한 데다 앞서 춘화성에서 천염노조라는 이의 공격에 맞아 법력을 봉인 당했소. 요 며칠간 쉬지 않고 시도하여 겨우 일부를 풀었고 말이오.”

    심협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젓고는 거짓말을 섞어가며 말했다.

    “출규 중기? 대형의 자질로는 그럴 리가…….”

    백소운은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심협의 기분을 생각하여 말을 절반쯤 내뱉다가 바로 멈추고는 화제를 돌렸다.

    “천염노조 그 늙은 놈의 수법은 나도 알지. 심 대형이 괜찮다면 봉인 푸는 것을 내가 도와줄 수 있소.”

    백소운의 말에 심협은 반색하며 공수해 감사를 표했다.

    “그렇다면 아주 감사하겠소.”

    “형님과 나 사이에 감사는 무슨…….”

    백소운이 어린 시절처럼 장난스레 웃더니 소매를 한 번 휘두르자 하얀 빛이 쏘아져 나와 온 마차 안을 뒤덮었다. 그러자 바깥의 기척이 완벽히 차단됐고, 심지어 마차의 흔들림조차도 사라졌다.

    심협은 마차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틈 채 눈을 감고 법력을 운공했다.

    백소운이 팔을 움직여 그의 등 복판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순간 금색 빛살 한 줄기가 세차게 뿜어져 나오더니, 금빛 물결처럼 심협의 몸으로 몰려가 타는 듯이 뜨거운 거대한 법력이 되어 온몸의 경맥을 타고 흘렀다.

    심협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가 다시 펴고는 공법을 운공하여 몸에 들어온 금빛이 남아 있는 금제들을 향해 가도록 유도했다.

    펑! 펑! 펑!

    그의 몸에서 둔탁한 소리가 연달아 울렸고, 백소운이 주입한 뜨거운 법력이 으르렁거리는 세찬 파도처럼 남은 금제들을 산산이 부수며 차례로 풀어버렸다.

    심협은 속으로 기뻐하며 천천히 법력을 운공해 몸 안 곳곳으로 흐르게 했다.

    그는 법력이 온몸의 경맥에서 막힘없이 운행하는 느낌에 꽤나 매료되어 연속으로 36번이나 운공하고는 수련 경지가 완전히 굳어지고 난 뒤에야 눈을 떴다.

    “백 도우의 은혜, 이 심모의 가슴에 깊이 새기겠소.”

    심협이 몸을 일으켜 백소운을 향해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감사할 필요 없다지 않았소. 왜 또 인사치레를 하는 거요? 보답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지. 그때 심 대형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지금 나는 벌써 한 줌 흙이 되었을 거요. 그 은혜를 내 어찌 갚겠소? 하하하!”

    이 순간, 심협은 또다시 백소운에게서 소년 시절의 소탈함을 보았다.

    “그렇다면 고맙다는 말은 이제 그만하겠소. 하하! 한데 지금 백 도우의 수행은 어느 경지에 이르렀소?”

    심협도 따라 웃으며 물었다.

    “막 대승 중기를 돌파했소.”

    백소운은 인을 맺어 마차 주위의 하얀 빛을 흩어버리며 말했다.

    심협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이 높은 단계에 이를수록 한 걸음 나아가기가 더 어려운 법이라 천 년 동안 대승 중기까지 수련한 것만으로도 놀라울 정도였다.

    두 사람은 마차 안에서 한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대부분 백소운이 말하고 심협이 들었다.

    백소운은 지금 수련 경지가 심협보다 훨씬 높았기에, 수행이 뒤떨어진 것때문에 혹여 심협의 기분이 상할까 우려해 그의 상황은 묻지 않고, 주로 자신과 건업성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건업성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가 기억하기로 임씨 집안과 백씨 집안은 원수지간 아니었소? 지금은 어찌 이리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오?”

    심협이 마차 뒤편 휘장을 통해 바깥에 있는 백가, 임가 두 집안의 수사들을 보고 궁금해 하며 물었다.

    “어쩌다 보니 서로 혼인도 많이 하는 친족이 되었소. 천 년이 지났거늘, 무슨 일이든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지 않겠소? 더구나 우리 형님이 거기 눌러앉았으니 건업성 안의 누가 감히 우리 백가와 맞서겠소?”

    백소운이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소천이 더 이상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다시금 떠올렸다. 아까 더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그 눈빛에는 슬픔이 그대로 묻어났다.

    심협도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화제를 돌리려는데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노조님, 앞에 갈림길이 나타났습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백벽이 마차 옆까지 다가와 공손히 물었다.

    백소운이 휘장을 올려 보니 마차 행렬은 어느새 이미 서하산을 빠져나왔고, 앞쪽 관도에는 각각 서북쪽, 북쪽, 동북쪽으로 향하는 세 갈래 나타났다.

    “각각 어디로 통하는 길들인가?”

    백소운이 눈길을 거둬들이며 물었다.

    “지도대로라면 서북쪽 길 앞쪽은 검문관(劍門關)이고, 북쪽 길은 규산성(奎山城), 동북쪽 길은 망상군(望湘郡)으로 통하는데, 모두 장안으로 이어집니다.”

    백벽이 답했다.

    심협은 건업성 부근의 지도를 본 적이 있어 상황을 대략 기억했다. 검문관과 망상군으로 가는 두 갈래 길은 장안으로 갈 수는 있으나 둘 다 먼 길을 돌아가야 했으므로, 북쪽 규산성으로 가는 길이 가장 가까웠다.

    “검문관 길로 가세.”

    백소운이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백벽은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별말 하지 못하고 허리를 숙인 뒤 몸을 돌려 떠났다.

    “백 도우, 내 알기로는 검문관으로 가는 길은 거리가 가장 먼데 왜 그리로 가려는 것이오?”

    심협이 물었다.

    “화생사의 정보에 따르면 지금 대당 곳곳이 모두 요마(妖魔)에게 점령당했소. 장안으로 가는 길은 많으나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검문관 하나만 남았다고 들었소.”

    백소운의 대답에 심협은 한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였군.”

    마차 행렬은 서북쪽 길로 우회하여 전진했다.

    심협은 백소운과 계속해서 한담을 나눴지만, 속으로는 어떻게 상대의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천 년 동안의 일에 대해 들어야 할지, 현실로 돌아가 어떻게 대비할 수 있을지 곰곰이 궁리하고 있었다.

    그때, 딸랑거리는 소리가 갈림길에서 들려왔다. 또 하나의 피난 행렬이었다.

    이 행렬의 인원은 그들보다 적었지만, 그래도 백여 명 정도였고, 복식의 색깔과 양식이 각자 다른 일고여덟 집안으로 이루진 것 같았다.

    행렬의 가장 앞에는 사치스러운 마차가 한 대 있었는데, 널찍하고 클 뿐만 아니라 장식도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두 마리가 나란히 끌고 있는 마차는 위풍당당했다.

    이 길은 넓지가 않아서 두 행렬이 마주치자 길이 막혀버렸고, 양쪽 모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웬 놈들이냐? 감히 녹(鹿) 대인의 앞길을 막다니, 어서 비켜서지 못할까!”

    상대방 마차 행렬에서 회색 옷을 입은 거구의 남자가 걸어 나왔는데, 벽곡기 수사였다. 그는 얼굴 가득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일부러 거들먹거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법력이 담겨 있어 마치 토뢰(*土雷: 작은 단지 등에 폭약을 담아 만든 일종의 지뢰)가 터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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