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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205화 (205/1,214)
  • 205화. 위기일발

    심협의 두 발 위에서 달그림자가 반짝이더니, 공기 중에 눈부신 곡선을 그리며 다시 한번 가까스로 공격을 피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완전히 피하지 못한 탓에 백족 장군의 꼬리에 몸이 살짝 쓸렸는데, 그것만으로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근처 수풀에 처박히고야 말았다.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들이 연이어 들려왔고, 아름드리나무 네댓 그루가 쓰러졌다.

    심협은 거대한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입가에는 한 줄기 피가 흘렀고, 옷은 넝마가 됐으며, 왼쪽 어깨는 시퍼렇게 멍이 든 채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한 가닥 희색이 엿보였다. 그는 조용히 손을 뒤집어 신행갑마부 두 장을 꺼내고는 즉시 결인하며 효력을 불러일으켰다.

    부적은 화르륵 불타오르며 순식간에 두 무더기 재가 되어 그의 두 발에 들러붙었다.

    그가 뭔가를 더 하기도 전에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더니, 백족 장군의 몸이 다시 날아왔다. 녀석은 거대한 머리로 운석처럼 세차게 내리찍으며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았다.

    심협은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곧장 두 발로 땅을 딛고 왼쪽으로 가로질렀다.

    쐐액!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은 희미한 환영으로 변해 30여 장을 단숨에 가로질러 백족 장군의 일격을 가뿐히 피했다.

    심협은 처음으로 시험해본 신행갑마부의 효과에 아주 만족해 백족 장군에 대해서도 잠시 잊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곧 요괴가 내뿜은 자줏빛 요화와 날카로운 꼬리 공격이 10여 그루의 커다란 나무들을 가볍게 부러뜨리며 날아오자 놀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의 심협은 방금 전과 달라, 발에 달그림자가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눈에 보이지도 않을 환영으로 변해 공격들을 가뿐히 피해냈다. 이어서 그는 숲의 다른 끝으로 달아났다. 세 가문 사람들은 분명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테니, 백족 장군을 유인하려는 생각이었다.

    한편, 백족 장군은 정말 화가 끓어오른 듯 포효하며 그를 바짝 뒤쫓았다.

    심협은 신행갑마부의 도움을 빌려 발로는 나무줄기들을 디뎠고, 몸으로는 공중에 긴 허상을 그리며 내달렸다. 그 속도는 경이로울 정도로 빨라 호흡 몇 번 할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는 이미 숲을 빠져나와 있었다.

    그가 더 멀리 달아나려는데, 갑자기 겁에 질린 비명이 저 멀리서 들려왔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아직 멀리 가지 못한 세 집안의 사람들이 다시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길이가 10여 장에 이르는, 지렁이 같은 황토색 요물이 난데없이 튀어나와 세 집안의 마차 행렬로 달려들어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지렁이 요괴는 백족 장군과 달리 사람을 집어삼키는 데에는 별 취미가 없는 듯, 그저 살육만을 저질렀다. 흥분에 찬 울음소리로 미루어 살육 자체에서 쾌감을 느끼는 듯했다.

    순식간에 10여 구의 시체가 피범벅이 되어 땅바닥에 드러누웠고, 세 집안의 수사들은 울부짖으며 지렁이 요괴에게 빗발치듯 갖은 공격을 퍼부었다.

    허공에서는 백벽이 새빨간 비검 한 자루 위에 올라선 채 두 손으로 결인하여 공법을 시전했다. 그러자 붉은 검기가 끊임없이 쏘아져 나와 지렁이 요괴를 베었다.

    하지만 지렁이 요괴는 실력이 보통이 아닌 데다 피부가 두꺼워 백벽의 공격 외에는 녀석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심협은 초조해졌지만, 백족 장군 하나 상대하기도 벅찬 상황이라 그들을 구하러 갈 겨를조차 없었다.

    이 무렵, 백족 장군도 그를 쫓아 숲을 벗어났는데, 심협의 다급한 표정과 멀리 세 집안의 마차 행렬을 보고는 시뻘건 눈에 한 줄기 잔인함이 스쳐 지났다. 그리고는 갑자기 심협을 버려두고 마차 행렬을 향해 돌진했다.

    심협은 안색이 급변하여 뒤쫓아 가려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아주 빠르게 연달아 강보를 밟고 두 손을 포개어 복잡한 수인을 하나 짓더니 번쩍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눈부신 별빛이 그의 몸에서 솟아났고, 눈에서도 두 줄기 밝은 빛이 쏘아져 나왔다.

    백족 장군은 심협의 움직임을 감지하고는 다소 놀란 듯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다시 내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심협은 주문을 외우며 두 손을 짐승의 발처럼 오므리고 뭔가를 끌어내리듯 아래로 힘껏 휘저었다.

    날이 차츰 밝아 어슴푸레해진 하늘에 갑자기 금빛이 한층 감돌더니, 거의 절반 가까이 되는 하늘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는 커다란 포효가 허공에서 울렸고, 눈부신 금빛이 번쩍였다. 이어서 크기가 10여 장에 이르는 금빛 별의 허상이 허공에 떠올라 마치 별똥별처럼 백족 장군을 향해 쏘아져 날아갔다.

    “헉!”

    백족 장군은 그제야 표정이 돌변해 우뚝 멈춰 섰다. 그의 몸에서는 붉은 빛이 폭발적으로 솟아났고, 뒤이어 굵직한 몸이 흔들리면서 순식간에 붉은 지네 그림자가 되어 금빛 별의 허상을 공격했다. 그러나 별 허상의 표면에 금빛 물결이 일자, 붉은 지네 그림자는 천적을 만난 듯 마디마디 부서져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금빛 별은 쏜살같이 떨어져 내리면서 크기가 몇 배로 불어났고, 속도도 점점 빨라져 순식간에 10여 장을 뛰어넘어 잔뜩 겁에 질린 백족 장군에게 꽂혔다.

    콰쾅!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세찬 먼지 폭풍이 인근 땅 위의 진흙을 훑었고, 작은 돌덩이들도 함께 휩쓸려 날아갔다.

    30여 장에 이르는 금빛 오각별 도안이 땅바닥에 새겨져 있었고, 주위에는 구름무늬 같은 부적 문양이 한 바퀴 감싸며 간간이 별빛의 파동을 내뿜었다.

    백족 장군은 오각별 한가운데에 봉인되어 있었는데, 그의 몸에 빛나던 붉은 빛은 모두 흩어져버렸고, 호박(琥珀) 속의 파리처럼 온몸을 옴짝달싹 못 했다.

    이를 본 심협의 눈에 경악이 스쳤다. 그는 삼성멸마로 백족 장군을 잠시 묶어둘 생각뿐이었건만, 그 위력이 출규 후기의 요물을 순식간에 봉인할 만큼 막강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한편, 그 사이에도 처참한 비명은 끊임없이 들려왔고, 이 짧은 시간 동안 또 10여 명이 지렁이 요괴에게 죽어 나갔다.

    심협은 백족 장군을 내버려둔 채,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시고는 지렁이 요괴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피부가 두꺼운 이 지렁이 요괴를 단시간에 제압할 수 있을지는 그도 자신이 없었다.

    바로 그때, 멀리서부터 천둥소리 같은 커다란 고함이 두 귀를 웅웅 울렸다.

    “어느 요물이 감히 우리 백가 사람들을 추살(*追殺: 뒤쫓아가 죽임)하는 것이냐!”

    백벽의 몸이 몇 번 흔들리면서 하마터면 공중에서 떨어질 뻔했고, 지렁이 요괴도 순간 부르르 떨었다.

    멀리서 금빛 줄기가 소리를 따라 눈 깜짝할 사이 지렁이 요괴 근처에 이르렀는데, 너무 빠르다 보니 마치 금빛 번개가 요괴의 머리에 꽂힌 것만 같았다.

    지렁이 요괴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머리가 터져 나가면서 하얀 뇌수와 핏방울이 뒤섞여 사방으로 튀었다.

    심협은 자세히 살펴본 후에야 금색 빛줄기의 실체를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금빛 금강저로, 백소천이 건업성에서 발휘했던 신통력과 똑같았다. 다만 그 위력만큼은 백소천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또 화생사의 신통력이군! 그런데 좀 낯이 익은 목소리 같은데?”

    심협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는데, 때마침 허공에서 금빛이 번쩍이더니 하얀 옷의 중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풍채가 당당한 중년 남자로,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눈가에 주름이 살짝 잡히긴 했지만, 젊은 시철 훤칠한 남자였음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엇! 저 사람은……?”

    심협은 허공에 떠 있는 흰옷의 중년 남자를 바라보며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소운 노조! 드디어 오셨군요! 건업성이 요괴에게 함락되었고 백가는 멸문지화를 당했습니다. 몇몇 숙부님과 백부님들께서 목숨을 걸고 엄호하시어 우리 백가에서 겨우 우리만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허튼소리! 건업성은 우리 형님께서 지키고 계시고 진산(鎭山), 진해(鎭海) 대승기 도우도 힘을 합쳐 지키고 있는데 어찌 무너질 수 있단 말이냐!”

    흰옷의 중년 남자는 금빛으로 은은하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낮은 소리로 외쳤다.

    “정말입니다. 수도 없이 많은 요마(妖魔)들이 성을 공격했고, 반선급 대요 다섯도 나타났습니다. 소천 노조께서는 반선 요물 세 마리를 연이어 베시고 그들과 함께……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백벽은 건업성의 상황을 간단히 이야기한 뒤 고개를 푹 숙였다.

    중년 남자는 하얗게 변했던 안색이 붉어지더니, 다시 파랗게 변했고, 마침내는 얼굴 가득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는 살기를 드러냈다.

    “그래, 그래. 너희 요마 놈들이 감히 우리 성을 파괴하고 내 형님을 죽인 것도 모자라 우리 가족을 멸했단 말이지? 나 백소운, 이곳에서 맹세하노니, 요마들을 모조리 몰살시키기 전에는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흰옷의 중년 남자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러자 강력한 법력의 파동이 그의 몸에서 폭발하여 근처 허공을 울렸고, 광풍이 난무하며 지면 또한 흔들려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백벽은 그의 옆에 있다가 급히 뒤로 피했지만, 광풍 속의 낙엽처럼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다행히 그의 수련 경지가 깊고 두터운 편이라 재빨리 멀리서 몸을 가눌 수 있었기에 부상은 면할 수 있었다.

    땅 위에 있던 사람들도 한바탕 이리저리 비틀거렸고,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지만, 눈빛에는 어쨌든 살아남았다는 안도의 감정도 엿보였다.

    한편, 심협은 먼 곳에 서서 허공에 있는 흰옷 남자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과연 백소운이로군. 천 년이 지나고 나니 그의 수련 경지도 대성했어! 이 위세를 보아하니, 대승의 경지에 이른 것 같군. 지난번 천염노조보다도 훨씬 위인 것 같아.’

    그때, 백벽이 다가와 백소운 앞에 무릎 꿇고 절하며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저희도 소운 노조님을 따라 요마들을 뿌리 뽑을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임을 목숨 걸고 맹세합니다!”

    “노조님을 따를 것을 목숨 걸고 맹세합니다!”

    백가의 다른 수사들도 모두 달려와 땅에 무릎을 꿇고 절했다.

    “좋다. 너희들은 백가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구나. 모두 일어나거라.”

    백소운이 옷소매를 가볍게 휘두르자 백벽과 백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힘에 떠받쳐 일어났다.

    ‘저 녀석, 성격도 적잖이 바뀐 것 같군.’

    심협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서 아는 척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바로 그때, 뒤에서 쩍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금빛 별의 허상이 번쩍거리며 갈래갈래 균열이 나타났다.

    심협은 낯빛이 급변하여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런데 금색 빛줄기 하나가 뒤에서 번개처럼 날아와 순식간에 심협을 추월하더니, 금강저의 허상으로 변해 금빛 별을 내리쳤다.

    카캉!

    짧은 타격음에 이어 금빛 별은 무너져 내렸고, 그 밑에 있던 백족 장군은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산산조각이 나 시체조차 남지 않았다.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힘이 계속 퍼부어지자, 굉음과 함께 땅 위에 수십 장에 이르는 깊은 구덩이가 생기면서 자갈이 튀고 연기와 먼지가 흩날렸다. 또한 고리 모양 광풍이 휘몰아치더니, 한참 뒤에야 서서히 흩어졌다.

    심협은 이 광경을 보고 숨을 들이마시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때, 그 앞의 허공이 갑자기 흐릿해지더니만 갑자기 백소운이 나타나 천천히 날아 내려왔다.

    “귀하가 바로 심 도우구려. 내 백벽에게 들었소. 앞서 나서서 도와준 것에 깊이 감사드리오. 우리 백가 자제들을 보호…….”

    백소운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네다가 말을 맺기도 전에 갑자기 멈칫하더니 심협을 자세히 살폈다.

    심협은 또다시 고민했으나, 결국 정체를 숨길 생각을 버리고는 피식 웃었다.

    “다…… 당신은…… 심 대형!”

    백소운은 몸을 흠칫 떨더니 갑자기 심협을 가리키며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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