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204화 (204/1,214)

204화. 백족 장군(百足將軍)

백벽은 심협이 떠나간 후에야 천천히 몸을 곧게 세웠다. 그의 등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는 좀 전에 심협에게 번쩍 스치던, 지금까지도 가슴이 약간 두근거릴 정도로 매서운 살기를 떠올렸다. 살도검술(殺道劍術)을 수련하던 백가의 어느 출규기 선배에게서나 겨우 느껴봤던 살기였다. 아니, 오히려 그 선배의 살기보다도 더 강했다.

‘심 도우는 결코 평범한 수사가 아니야. 같은 편이 될 수만 있다면 큰 힘이 될 터.’

한편, 심협은 곧장 자기 마차로 되돌아와 즉시 소뢰부를 그리기 시작했다. 꿈속 세계에서의 그는 부적을 그리는 솜씨가 빼어나 소뢰부는 거의 실패하는 일이 없었다. 덕분에 어느새 백여 장의 소뢰부가 생겨났다.

“이제 신행갑마부와 청풍파장부(淸風破障符)를 시도해볼까?”

그는 다 그린 소뢰부를 칠성필에 챙겨 넣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금은 수련 경지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이긴 하나, 이왕 재료를 갖췄으니 새로 얻게 된 두 부적을 시험 삼아 그려보고 싶었다. 꿈속에서 요령을 습득할 수 있다면, 현실에 돌아가더라도 이 두 부적을 익히는 데에는 과산부를 익힐 때만큼 애를 먹지 않을 테니까.

심협은 먼저 작은 잔을 하나 꺼내 부묵을 따라낸 뒤, 지성초 한 포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금빛에 물든 손으로 지성초를 감싸고 가볍게 빻기 시작했다.

황정경의 위력을 당해내지 못한 지성초는 순식간에 녹색 액체가 되었다.

그는 불순물을 걸러낸 녹색 액체를 부묵에 붓고 함께 섞었다. 부묵은 금방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며 붓을 들고 머릿속으로 신행갑마부를 자세히 떠올려본 뒤, 붓을 움직여 부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신행갑마부는 부적의 문양이 복잡하긴 했지만, 꿈속의 그는 경지도 높고 부적을 그리는 솜씨도 뛰어난 만큼 다섯 장을 실패한 후에는 성공할 수 있었다.

그는 부적을 손에 들고 살펴보며 법력을 주입하고는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부적은 곧바로 타올랐다. 허공을 떠다니던 재들은 심협이 결인을 맺자 흩날리다가 둘로 나뉘더니, 그의 두 발에 달라붙었다.

그 순간, 심협은 몸이 엄청나게 가벼워지고 체중이 절반쯤 줄어든 것을 느꼈다. 가벼운 힘으로도 날아다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심협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법력을 불러일으키거나 육신의 힘을 애써 끌어내지 않아도 말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을 거야. 사월보와 조화를 이룬다면 효과가 더 좋을 터. 특히 이 부적은 법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는 결인하여 발 위의 재들을 흩어버린 뒤, 방금 부적을 그렸을 때의 깨달음을 되짚어가며 또다시 다섯 장을 연거푸 그렸다. 그리고 나서야 청상지 뭉치를 집어 들고 청풍파장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밤은 빨리 지나갔고, 바깥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심협은 손에 든 신행갑마부 다섯 장과 청풍파장부 세 장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부적들을 품에 챙긴 뒤 마차에서 내렸다.

그때였다. 붉은 빛 한 덩이가 마차 한구석에서 반짝이더니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며 빠르게 깜빡였다. 과산부가 발동한 것이다!

“요물이 다가옵니다! 모두들 조심하십시오!”

심협은 낯빛이 굳은 채 소리 높여 외쳤다.

바깥에서 한창 행장을 꾸리던 심가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발 빠르게 반응했다. 부녀자들과 아이들은 마차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수사들은 무기를 움켜쥔 채 마차들 주위를 보호했다.

이때 백가와 임가 사람들도 이미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하다가 심협의 경고에 긴장한 얼굴로 경계하듯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주위는 고요했고, 요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신비해 보이고 싶어 수작을 부린 것인가? 흥!”

임한월의 냉소에는 비웃음이 역력했다.

백벽은 손을 뒤집어 하얀 부적을 한 장 꺼내더니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부적이 쫙 갈라지며 밝은 백색광으로 변한 뒤 물결처럼 주위에 넘실거리며 주변 수백 장을 가득 메웠다.

하얀빛 물결은 공중에서 한차례 일렁이더니 천천히 사라졌다. 그러는 동안 어떤 이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백가 사람들과 그 옆의 임가 사람들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심 도우, 그 요물이 어느 방향에 잠복해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미 멀어진 것 아닐까요?”

백벽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긴장은 늦추지 않았다.

심협은 백벽의 행동을 눈여겨보고 있던 터였고, 그의 신식도 이미 널리 퍼져나가 주위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 역시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마차 안의 과산부는 여전히 붉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요물은 근처에 잠복해 있는 듯합니다. 저의 과산부는 주변의 요기를 감지할 수 있으니 다들 필히 조심하셔야만 합니다.”

심협은 과산부를 꺼내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힘주어 말했다.

백벽은 말없이 심협의 손에 들린 부적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흥! 어디서 났는지 모를 조잡한 부적 한 장으로 모두를 지휘하려 하다니. 심 도우, 잘난 체를 하려거든 좀 더 좋은 구실을 대시오! 난 갈 길이 급하니 이만 실례하겠소.”

임한월은 또다시 그리 비웃고는 몸을 날려 말에 올라 타 내달렸다.

임가 사람들 역시 조롱하듯 심협을 돌아보며 떠나갔다.

이 광경을 본 백벽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막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순간!

콰르릉!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저 앞에서 내달리던 임한월의 말 발아래 땅바닥이 갑자기 쩍 갈라지면서 시커먼 구멍이 드러났다.

말은 그대로 구멍 속으로 사라졌지만, 임한월은 응혼기 수사(修士)답게 재빨리 몸에서 푸른빛을 내뿜으며 위로 솟구쳤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높이 날아오르기도 전에 땅의 검고 커다란 구멍 속에서 우우우 하는 괴성이 울리더니, 거의 형체가 눈에 보일 정도의 돌개바람이 나타나 주위 모든 것을 미친 듯이 집어삼켰다.

임한월은 아무런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겁에 질린 비명을 내지르며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져버렸다. 가까이 있던 임가 사람 몇 명도 함께 끌려갔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던 백벽은 대경실색하여 임한월을 구하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잠시 후, 검은 구멍은 빨아들이기를 멈췄고, 뒤이어 갑자기 땅이 불쑥 솟아오르더니 집채만 한 붉은 머리가 튀어나왔다. 그 윗면은 커다란 선홍색 비늘들로 덮여 있었고, 커다랗고 붉은 입안에는 크고 날카로운 이빨들이 가득했다. 마치 거대한 벌레 같아 보이는 요물이었다.

남은 임가 사람들은 방금 일어난 이변에 놀라 얼이 빠져 있다가 거충(巨蟲)의 머리를 보고 그제야 경악했다. 그들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면서 되돌아왔다.

무시무시한 붉은 머리는 비웃는 듯한 소리로 울부짖으며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10여 장을 날아와 한 임가 중년 사내의 허리를 물어뜯었다.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고, 그 사내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 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이 요물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적갈색의 거대한 지네였는데 얼마나 긴지 알 수 없었다. 꼬리가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그 길이는 십여 장이었다.

지네 요괴는 입을 쩍 벌려 물고 있던 임가 사람을 꿀떡 삼키고는 다시금 몸을 비틀어 다른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뿔싸! 저건 백족(*百足: 지네의 속칭) 장군이오!”

백벽은 이 요물의 정체를 아는 듯 경악에 찬 고함을 지르고는 손에서 붉은 빛을 거세게 내뿜으며 하늘 높이 휘둘렀다. 그러자 붉은 비검 한 자루가 그의 손을 떠나 날아올랐다. 그 위로 세찬 불꽃이 활활 타오르며 귀를 찢는 듯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사나운 기세로 붉은 지네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백족 장군의 새빨간 두 눈에 가소롭다는 기색이 살짝 스쳤다. 그러더니 녀석은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붉은 비검을 쳐냈다.

펑!

커다란 소리가 울리며 불티가 사방으로 튀었다.

붉은 비검은 팽글팽글 돌며 날아 돌아왔고, 그 위의 불길은 진동에 절반 이상 흩어져버렸다.

백벽은 몸을 크게 휘청거리더니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낯빛은 창백해졌고, 눈에는 한 가닥 두려움이 떠올랐다.

반면 백족 장군은 머리의 비늘조각에 긁힌 듯한 하얀 자국이 한 줄 생기더니 희미한 균열이 나타났다.

“크아악!”

녀석은 화가 난 듯 낮게 포효하며 몸을 돌려 백벽에게로 곧장 달려들었다. 백족 장군이 잔영을 드리우며 눈 깜짝할 새에 백벽 앞까지 다가와 시뻘건 입을 쩍 벌리자, 피비린내가 얼굴을 확 덮쳐왔다.

백벽은 몸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비검마저 놓친 상황이라 절망한 기색이었다.

그때였다. 금빛 그림자가 스쳐 지나면서 백족 장군 앞에 금빛으로 감싸인 사람 형체가 유령처럼 나타나더니 두 주먹을 번개처럼 휘둘렀다.

펑! 퍼펑!

천둥소리 같은 격타음(擊打音)이 울렸고, 산산이 부서진 권풍(*拳風: 주먹을 내지를 때 생기는 바람)이 사방에서 날아들어 근처 땅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백족 장군의 거대한 몸뚱이는 뒤로 물러났지만, 가볍게 한 번 흔들린 뒤 곧 자세를 가다듬었다.

녀석은 이제 좁고 기다란 몸을 완전히 드러낸 상태였는데, 그 길이는 족히 20여 장쯤 되었고, 온몸은 거대한 적갈색 비늘갑옷으로 덮여 있었다. 몸 양쪽 옆에는 빈틈없이 빽빽한 다리가 두 줄 달려 있어 끔찍했다.

그 무렵, 금빛 그림자는 거꾸로 날아 돌아가 땅에 내려앉은 뒤, 예닐곱 걸음을 뒤로 물러난 후에야 몸을 추슬렀다. 물론 그는 심협이었는데, 표정에는 충격을 받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황정경을 수련하고 난 뒤로 힘에서 밀린 적이 없었다. 이전에 춘화성에서 출규기의 검은 개미 두 마리를 상대했을 때도 그랬다. 그러나 저 지네 요괴와 정면으로 맞부딪치니 뜻밖에도 자신이 열세에 처한 것이다.

“어서 이곳을 떠나 멀리 도망치시오! 저놈은 내가 막겠소!”

심협은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크게 외쳤다.

이에 심가 사람들은 군소리 없이 심화원과 심옥의 인도 아래, 겁을 잔뜩 집어먹은 말들을 이끌고 물러갔다. 백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고, 임가 사람들은 더 잔뜩 겁에 질려 도망치기에 바빴다.

순식간에 그 자리에는 심협과 백벽 두 사람만이 남게 됐다.

“백 도우, 도우도 어서 가서 다른 이들을 잘 보호하십시오!”

심협이 절박하게 머릿속으로 소리를 전했다.

“목숨을 구해준 심 도우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부디 몸 조심하십시오.”

자신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백벽도 고집 부리지 않고 그리 말한 뒤, 손을 휘둘러 붉은 비검을 불러들이고는 내달렸다.

“도망을 치겠다고? 이 백족 장군 앞에서는 너희 인간 놈들은 하나도 도망칠 수 없다!”

백족 장군은 사람의 말을 내뱉고는 쉰 목소리로 노여움 가득한 고함을 내지르며 다시 달려들었다. 머리의 반들반들한 갑각(甲殼)에는 움푹 파인 주먹 자국이 두 개 있었고, 그 주위로는 몇 줄기 기다란 균열이 엿보였다. 심지어 그 안에서는 핏기가 언뜻 비치기도 했다. 녀석은 그 상태로 엄청난 요기를 폭발적으로 내뿜으며 성난 파도처럼 심협을 압박해왔다.

‘망했다! 이놈 출규 후기쯤 되는 것 같은데?’

심협은 간담이 서늘해져서는 두 발 위에 달빛을 반짝이며 옆으로 쏜살같이 스쳐 지나갔다.

백족 장군이 머리를 비틀고 커다란 입을 벌리자, 자줏빛 요화가 튀어나와 심협의 머리 위로 밀려들며 하늘을 뒤덮을 듯이 쏟아져 내렸다.

심협은 두 발을 움직여 옆으로 스쳐가던 방향을 바꿔 뒤로 날아가며, 동시에 인을 한 번 맺었다. 그러자 커다란 물보라 치는 소리와 함께 근처 작은 강에서 굵직한 물줄기가 여러 갈래 일어나며 마치 교룡이 춤을 추듯 요화를 내리쳤다.

하지만 자줏빛 요화들은 너무나도 강력해 불꽃이 꺼지기는커녕 오히려 물줄기를 증발시켜버렸다.

그러나 자줏빛 요화의 돌진도 일순 멈칫했는데, 심협은 그 틈을 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쿵!

방금 전까지 심협이 서 있던 빈터에 떨어진 자줏빛 요화는 곧 타다닥 타올랐고, 땅바닥은 양초처럼 녹아 시커멓게 변했다.

심협이 한숨 돌리려는데, 그의 옆에서 세찬 폭풍이 휘몰아치더니 백족 장군의 꼬리가 순식간에 날아들었다. 그 속도는 정말이지 무서울 정도로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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