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뜻밖의 동행
바깥의 심가 사람들은 저녁을 먹고 곧 각자 휴식을 취했고, 수사(修士) 두 사람만 남아 불침번을 섰다.
한밤중이 되자, 심협이 감고 있던 두 눈을 번쩍 뜨고는 벌떡 일어나 마차에서 나왔다.
“심 선배님.”
불침번을 서던 심가의 수사들이 재빨리 공손하게 예를 갖췄다.
“모두 깨우시오. 누군가 뒤편에 왔소. 수가 적지 않은 것으로 보아 피난민인 것 같구려.”
심협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침번을 서던 수사들은 잠깐 멍해졌다가 뒤쪽을 한 번 바라보고 기척이 있는지 귀를 기울여 봤지만,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심협의 말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당장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깨우고 말을 전했다. 순식간에 숙영지 전체가 사람들로 술렁였다.
싸울 수 없는 부녀자들과 아이들은 마차 안으로 들어갔고, 심옥과 심화원을 비롯한 수사들은 각자 법기와 부기를 손에 쥔 채 잔뜩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근래 들어 요마들이 날뛰고 세상이 혼란한지라 결코 방심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쪽 큰길에서 덜컹거리는 수레와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며 점점이 불빛들이 나타났다. 이에 심가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심협이 신식을 발휘해 훑어보니 다가오는 사람들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80여 명에 달하는 행렬이었는데, 스무 대에 조금 못 미치는 마차를 빼곡히 둘러싼 모든 사람의 옷차림은 아주 화려했다.
사람들은 은근히 두 무리로 나뉘었는데, 한 무리는 흰 장포 차림에 사람 수가 조금 더 많았고, 다른 무리는 사람 수가 비교적 적고 푸른색 복장이었다. 아무래도 서로 다른 두 집안인 듯했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수사였다. 벽곡기인 사람이 대여섯 명에, 응혼기도 둘이 있었다.
이들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감이 묻어 있었고, 옷은 더럽고 흐트러져 있었다. 어떤 이들의 옷에는 핏자국도 있는 것이, 한바탕 치열한 전투를 벌인 듯했다.
행렬이 계속 가까워지자 심가 사람들도 그들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표정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공교롭기도 하지, 이 두 가문이라니!”
심협은 눈썹 끝을 치켜세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중얼거림은 아주 작아서 옆에 서 있던 심옥만이 겨우 알아듣고는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행렬은 약 60여 장 앞에 멈춰 섰다.
“감히 여쭙겠소만, 앞에 분들은 어느 가문이시오?”
얼굴에 흉터가 있는 흰옷의 중년 남자가 대열에서 걸어 나와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두 응혼기 수사 중 하나였다.
“우리는 춘화성 심씨 일가 사람들이오. 그대들은 뉘시오?”
심화원도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남자는 심화원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심가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다가 시선을 곧 심협에게 떨궜다. 그러더니 얼굴색이 약간 변해 가볍게 공수를 해 보였다.
심협도 포권으로 답했다.
심화원은 무시를 당한 탓에 조금 화가 치밀었지만, 심협이 상대와 말없이 인사를 나눈 것을 보고서야 뭔가를 어렴풋이 알아차린 듯 마음을 다잡았다.
흉터의 사내는 상황을 살피고는 몸을 돌려 뒤에 있는 사람들과 몇 마디를 나눈 뒤 입을 열었다.
“우리는 건업성의 백가와 임가 사람들입니다. 건업성에서 도망쳐 여기에 이르렀지요. 우리 모두 너무 지친 상태인지라 이곳을 빌려 잠시 쉬고자 하는데,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도우. 여기는 우리 땅도 아니니 여러분 편하실 대로 하시지요.”
심가 사람들을 대신해 심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흉터의 중년 사내는 감사를 표한 뒤, 몸을 돌려 마차 행렬 사람들을 쉬게 하고 물을 길어다 밥을 지었다.
심가 사람들은 달갑지 않았으나, 이미 심협이 허가했기 때문에 참는 수밖에 없었다.
“백가? 설마 건업성의 그 구마세가란 말입니까?”
심화원은 분주한 백가와 임가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아니겠지요. 어디 그리 공교로울 리 있겠습니까.”
옆에 있던 심가의 수사 하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심 선배님, 어찌 생각하십니까?”
심화원은 옆에 있는 심협에게 질문을 던지고 시선을 돌렸다가 일순 멍해졌다. 방금 전까지 옆에 서 있던 심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저기 있습니다.”
심옥이 손을 들어 앞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심협이 백가와 임가 두 집안이 진을 친 곳에 있었는데, 얼굴에 흉터가 난 사내가 푸른 옷의 젊은 여인과 함께 그에게 다가갔다.
젊은 여인은 용모가 수려하고 몸매도 우아하고 아리따웠으나, 두 눈썹이 칼날같이 반듯하고 표정도 조금 도도해 보였다. 그녀 역시 얼굴에 흉터가 난 사내와 같은 응혼기 수사였다.
“여기에 머물게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도우.”
흉터가 난 사내가 매우 겸손하게 공수하며 말했다.
“이 땅이 저자들 것도 아닌데 백 도우께서는 뭘 그리 예의를 차리시오?”
심협을 흘끗 보고는 멀리 심가 일행에게 시선을 던진 젊은 여인의 눈에는 깔보는 듯한 기색이 스쳤다. 마치 성안의 대갓집 여인이 시골 촌뜨기를 보듯 오만한 모습이었다.
“임 도우, 어찌 그리 말하는 거요? 이곳에는 심 도우 일행이 먼저 도착했으니 우리가 여기서 발붙이고 쉬려면 당연히 이들에게 물어봐야 마땅하오.”
흉터의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훈계하듯 혀를 찼다.
푸른 옷의 젊은 여인은 그 남자를 조금 두려워하는 것인지 조그맣게 콧방귀를 뀌고는 입을 다물었다.
“다들 똑같이 천지를 떠도는 신세인데, 그런 작은 일에 신경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심협이라 합니다. 두 도우께서는 함자가 어찌 되시는지요?”
심협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저는 백벽(白壁)이고, 이분은 임한월(林寒月)이라 합니다.”
흉이 진 얼굴의 사내가 소개했다.
“백 도우와 임 도우셨군요. 우리는 원래 건업성으로 피난을 가려 했으나 건업성이 요수(妖獸)들에 포위당한 탓에 황급히 떠나왔습니다. 두 분께서는 건업성에서 오셨다니, 그곳은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심협이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백벽의 눈에는 한 줄기 비통함이 어렸고, 임한월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후우. 이제 세상 어디에도 건업성이라는 곳은 없습니다.”
백벽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탄식하고는 수심에 잠겨 말했다.
“번듯한 육조고도(*六朝古都: 후한부터 수나라 때까지 여섯 왕조가 도읍지로 삼았던 도시. 남경의 별칭)가 끝내 요마(妖魔)들의 손아귀에 망가질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심협은 이미 건업성의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듣고 마찬가지로 개탄했다.
“심 도우 일행께서는 어디로 갈 계획입니까?”
백벽은 말을 돌리듯 물었다.
“지금은 요마가 세상을 휩쓸어 건업성도 이미 함락되었으니, 다른 성들도 아마 상황이 비슷할 겁니다. 지금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장안성뿐이라 여겨 그곳으로 가려던 참이었지요.”
심협의 말에 백벽이 반가운 듯 웃었다.
“이리 공교로울 수가! 우리도 그리로 가는 길입니다. 이왕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이니, 함께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자들과 동행한다고? 백 도우, 그럴 필요는 없잖소. 저들 심씨 집안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라 일을 당하면 분명 우리 발목을 잡을 것이오.”
임한월이 눈썹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우리 사람들도 마차를 탔으니 다들 속도도 비슷한데 무슨 발목을 잡는단 말이오? 그리고 심 도우가 합류하면 우리도 더 든든하지 않겠소?”
백벽이 그렇게 말하자 임한월은 심협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마음대로 하시오. 그때 가서 우리에게 누가 되지만 않으면 되오.”
심협은 거절하지 않았다. 백벽의 말대로 모두들 마차를 타고 이동하여 속도가 엇비슷하니, 두 집안과 함께 간다 해도 더 늦어지지는 않을 것이고, 안전은 더 많이 확보가 되는 셈이다. 그리 되면 자신도 더 많은 시간을 내 수련할 수 있을 터였다.
“이 심모는 잠깐 동안 심가 사람들과 동행하고 있긴 하나 일을 결정하는 이가 아니니, 백 도우께서는 그들의 가주께 물어보시지요.”
심협은 백벽에게 그 말을 남기고는 몸을 돌려 심화원을 바라보면서 손짓했다.
백벽은 심협의 이런 행동에 놀라는 눈치였다.
“심 선배님, 그리고 두 분 선배님들. 부르셨습니까?”
심화원은 심협의 손짓에 급히 다가왔다.
백벽은 심화원이 겨우 연기기 수사에 불과하다고 해서 무시하는 기색 없이, 심협에게 했던 제안을 다시 했다.
“이 두 분은 건업성의 유명한 구마세가인 백가와 임가의 책임자이십니다.”
심협이 끼어들어 백가와 임가 두 집안의 신분을 밝혔다. 그러자 심화원은 살짝 들뜬 기색으로 포권을 했다.
“문제없습니다. 두 분 선배님의 가족과 동행할 수 있다니, 오히려 우리 심가의 영광이지요.”
“그럼 좋소.”
백벽도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심화원은 눈치 빠르게 인사를 남긴 뒤 집안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백벽의 제안을 전해 들은 심가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다. 심옥 또한 더욱 존경이 담긴 눈으로 저 멀리 심협을 바라보았다.
“심 도우께서 특별히 걸음 하신 것은 우리 두 사람과 한담을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겠지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터놓고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심화원이 떠난 뒤 백벽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는 심협이 심가의 책임자일 거라 여겼으나, 좀 전의 상황을 보니 그게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아까 그들 두 집안이 이곳에 이르러 머물기를 청했을 때 심협이 심가를 대표해 응낙한 데에는 분명 다른 뜻이 있을 터였다.
“백 도우께서는 말씀도 호쾌하게 하십니다. 시원스럽지 못했던 제가 부끄러워지는군요. 사실 여쭐 게 있어 온 것이긴 합니다. 두 분 수중에 혹시 부적 종이와 부묵이 있는지요? 평범한 황지와 청상지 그리고 부묵이면 됩니다. 많을수록 좋고요.”
심협이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그간 칠성필 공간 안에 모아둔 부적 종이와 부묵은 거의 다 썼고, 소뢰부(小雷符)도 몇 장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장안으로 가는 길에 길흉을 예측하기 어려우니 보충해야만 했다.
“허허, 심 도우께서 부적술에 정통하실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우리 백가에는 많은 부사(*符師:부적술사)가 있으니 물어보겠습니다. 잠깐 기다리시지요.”
백벽은 호쾌하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사라졌다.
한편, 임한월은 다소 짜증난 기색이었는데, 이내 심협 같은 산수(*散修, 가문이나 종파에 소속되지 않은 수사) 따위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잠시 뒤 돌아온 백벽의 손에는 두툼한 황지와 청상지가 한 뭉치, 다른 손에는 검은색 작은 단지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임 도우는 성격이 원래 저러니 심 도우께서는 개의치 말아 주십시오.”
그는 임한월이 이미 떠난 것을 보고 조금 난처해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염치없게 부탁을 드린 제가 죄송하지요.”
심협이 손사래를 치자 백벽은 부탁을 떠올리고는 손에 든 물건을 건넸다.
“건업성을 떠날 때 좀 다급했던 터라 물건들을 많이 챙겨오지 못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심협은 물건들을 건네받고는 신식으로 잠깐 살펴보았다. 황지 200여 장에 청상지도 약 50여 장이었으며, 부묵도 넉넉했다.
“심모가 가진 것은 많지 않으나, 감사의 뜻으로 이걸 드리지요.”
심협은 손을 뒤집어 길이 1척가량의 비취색 영초를 꺼냈다. 연잎 형태에 뿌리 부분은 무 같이 생긴 것으로, 방촌산에서 채집해온 잎사귀였다.
“감라초(甘羅草)! 이런 평범한 부적지와 부묵의 대가로 감라초라니, 우리 백가에서는 도우께 이런 이득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백벽은 물건을 볼 줄 아는 사람인지 당황해 극구 사양했다.
“그럼 이리 하시지요. 백 도우께서 혹여 지성초를 가지신 게 있다면 몇 포기 주시거나, 대신 선옥 몇 개를 주시는 겁니다.”
심협은 이렇게 말했다. 백벽이 지성초를 가지고 있다면 신행갑마부(神行甲馬符)를 시험 삼아 그려볼 수도 있을 터였다.
그때, 조금 거만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제게 지성초 다섯 포기가 있으니 도우의 감라초와 바꾸지요.”
임한월이 그렇게 말하며 다가오더니 옥합을 하나 휙 내졌다. 옥합은 덜그럭 소리를 내며 심협의 발치에 떨어졌다.
심협은 임한월에게 지성초가 있다는 말에 기뻤지만, 상대방의 이런 태도를 보고는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하! 임 도우의 수중에 지성초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구려. 그럼 아주 잘되었습니다. 심 도우, 이 지성초 다섯 포기와 부적지, 부묵을 도우의 감라초와 바꾸지요. 어떻습니까?”
심협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백벽이 급히 나서서 땅바닥에 떨어진 옥합을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그 안에서 손바닥만 한, 뿌리줄기가 가늘고 긴 진녹색 영초를 얼른 꺼내 심협에게 건넸다.
심협은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화를 억누르고 옥합과 부적지 등을 챙긴 뒤, 감라초를 건네주고는 말없이 몸을 돌려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