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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202화 (202/1,214)
  • 202화. 친구여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지네와 검은 매 요괴의 몸에서는 하얀 불꽃이 타올랐다.

    본래도 중상을 입었던 지네는 이 화염이 몸을 덮치자 처량한 비명을 짧게 내지르더니 눈구멍에 타오르던 칠흑같이 검은 불꽃이 꺼져버렸다. 거대한 몸뚱이는 빠르게 투명해지더니 공중에 산산이 흩어져 사라졌다.

    검은 매 요괴도 끔찍한 비명을 터뜨렸고, 온몸의 깃털은 거의 타버렸으며, 몸통은 온통 새카맣게 변했다. 그럼에도 아직 여력이 남아 있었는지 두 날개를 힘차게 펼치며 하얀 불기둥에서 뛰쳐나와 멀리 달아났다.

    그러나 그 하얀 불꽃은 매 요괴에게 달라붙은 채 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활활 타올랐고, 점점 더 거세지며 눈 깜짝할 새에 커다란 불덩이가 되어 매 요괴를 완전히 감싸버렸다.

    검은 매 요괴는 얼마 가지 못하고 점점 느려지더니, 거대한 몸뚱이가 불덩어리 안에서 빠르게 오그라들며 이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분홍치마의 젊은 여인과 녹색 옷의 노인은 이 광경에 몸을 떨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얼굴에는 겁에 질린 기색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한편, 단번에 두 요괴를 죽여 없애긴 했으나 백소천 또한 상황이 좋지 않았다. 피부는 온통 창백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핏줄기가 배어 나왔다.

    그는 화생사의 금술(禁術)인 열반단멸대법(涅槃斷滅大法)을 펼치며 자신의 목숨과 원기를 불태워 무리하게 수련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려 놓은 상황이었다. 이 금술의 대가는 너무도 커서 수련 경지가 한 단계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다시 상승할 가능성은 완전히 잃었고, 수명도 백 년이나 소모됐다.

    그러나 건업성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백소천은 분홍치마 여인과 녹색 옷의 노인을 바라보고는 가까스로 기운을 짜내어 등 뒤의 등심부문을 다시금 빛나게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는 푹 소리와 함께 아랫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복부에서 뻗어 나온 시커먼 손바닥 위로 막 흘러나온 붉은 피가 가득했다.

    온몸이 얼어붙은 듯 굳어버린 그는 피로 번들거리는 손바닥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심협의 표정도 차갑게 굳어버렸다. 어느새 검은 그림자가 연화대의 방어를 뚫고 백소천 등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온몸은 검고 넓은 두봉(*斗篷: 소매 없는 외투)에 싸여 있었고, 머리에는 대나무로 짠 커다란 삿갓을 쓴 상태였으며, 열 손가락 끝은 길고도 날카로운 존재였다.

    심협은 그 검은 그림자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 형상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바로 이전에 장풍곡에서 맞닥뜨렸던 요풍이었던 것이다.

    멀리 분홍치마 여인과 녹색 옷의 노인은 이 광경을 보고 긴장을 풀었다.

    “백 도우는 과연 대단하오. 반선의 수련 경지로 진선의 신통력을 쓸 수 있다니, 가히 천재라 할 만해. 그대 같은 인물이 인간족 따위를 위해 온 힘을 다하다니, 실로 안타깝구려. 차라리 우리 마족을 따르시오! 하하하!”

    요풍은 백소천의 급소를 꿰뚫어 놓고도 바로 몸을 빼거나 물러나려는 기색조차 없이 비아냥거렸다. 그러는 사이 그의 손에서는 짙은 검은 기운이 피어올라 백소천의 몸 안으로 빠르게 침투했다.

    검은 빛은 백소천의 아랫배를 빠르게 물들이더니 다른 부위로 퍼져나갔다.

    그때, 뻣뻣하게 굳어 있던 백소천이 놀라운 속도로 오른손을 움직여 자신을 꿰뚫은 요풍의 팔뚝을 꽉 움켜쥐었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는 찬란한 금빛이 확 피어올라 검은 기운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았다.

    “저들의 우두머리인 당신이 근처에 숨어 있었음을 내 알아채지 못한 줄 알았나? 정말로 밑천을 많이 들였더군. 반선 능력자를 다섯이나 보내 건업성을 습격하게 하다니 말이야. 이 건업성도 언젠가는 함락되겠지. 허나, 그전에 내가 먼저 네 목숨을 거둬 건업의 백성들을 위해 순장시킬 것이다!”

    백소천이 차디찬 고함을 내지르자, 아래의 금빛 연화대와 뒤쪽의 등심부문이 두 갈래 금빛으로 변하여 그의 몸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그의 몸에서는 금빛 문양들이 가닥가닥 떠올랐고, 몸은 마치 풍선처럼 빠르게 팽창하면서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냈다.

    요풍은 기겁하여 물러나려 했으나, 백소천의 몸에서 엄청난 흡인력이 흘러나와 맹렬하게 빨아들이는 바람에 팔도 뽑아낼 수가 없었다.

    “놔라!”

    요풍은 크게 외치더니 남은 손에 검은 빛을 번득이며 빨려 들어간 팔을 어깨에서부터 크게 베었다. 순간 팔이 어깨에서 떨어져 나가며 붉은 피가 왈칵 쏟아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한 줄기 검은 바람으로 변해 뒤로 날아갔다.

    꽈르릉!

    하늘도 놀랄 만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미 팽창하여 둥근 공이 된 백소천이 폭발하면서 직경이 수백 장은 될 불같은 태양이 허공에 언뜻 나타났고, 뒤로 날아가던 요풍을 끌어들였다.

    금빛 폭풍이 미친 듯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순식간에 거대한 회오리를 이루어 건업성 전체를 휩쓸었다.

    “백 형!”

    심협은 이 모든 것을 목격하고 눈시울이 시큰했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왔다.

    천 년 후의 세상에서 절친한 벗을 다시 만났건만,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한 채, 벗이 죽는 것을 두 눈 멀쩡히 뜨고 지켜봐야 하다니…….

    백소천의 자폭이 불러일으킨 폭풍은 금방 가라앉았고, 분홍치마의 젊은 여인과 녹색 옷의 노인은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노기 가득한 얼굴로 말없이 성 아래쪽으로 돌진했다.

    두 요괴가 동시에 손을 쓰자 분홍색과 초록색의 두 갈래 거대한 빛이 한곳을 향해 날아갔다.

    수많은 빛줄기가 건업성에서 쏘아져 나와 이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두 빛에 닿자마자 튕겨 날아가 버렸다.

    콰쾅!

    건업성의 성벽이 무너져 내리며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성 밖에 있던 수많은 요물들은 흥분에 차 울부짖으며 밀물처럼 성안으로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온 성이 비명과 절규로 가득 찼고, 핏방울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심협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고 여수하로 들어가 왔던 길을 쏜살같이 되돌아갔다.

    백소천이 죽은 순간, 건업성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과 같았다.

    ‘요물들이 움직이기 전에 반드시 심가 사람들과 이곳을 떠나야만 한다.’

    성안의 백성들을 구해내고픈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럴 능력이 없었다.

    심협은 어수지술(御水之術)의 효력을 발휘하여 전력으로 되돌아갔고, 곧 심가의 마차 행렬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요물들이 습격해오지 않은 덕에 평안했던 심가 사람들은 심협이 돌아오자 모두 몰려들어 그를 에워쌌다.

    “심 선배님, 건업성 상황은 어떻습니까?”

    어느 정도 평정심을 되찾은 심협은 심화원의 물음에 간략하게 건업성 상황을 알렸다.

    심가 사람들의 안색이 처참할 정도로 굳어갔다.

    “건업성의 반선께서조차 그 요물들을 막아내지 못하셨으니, 우리가 어디로 더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설마 하늘이 우리 인간들을 멸망시키려는 걸까요? 모든 사람이 저 요물들 주둥이에 죽을 운명이란 말입니까?”

    낮은 수군거림에는 절망한 기색이 가득했고, 흐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 입 다물게! 작은 좌절 앞에 이리 흔들리다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우리 심가의 가훈이 자네들을 이리 나약하게 가르쳤던가?”

    심화원의 벼락같은 호통이 터져 나오자 심가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심 선배님, 혹시 고견이 있으십니까?”

    심화원이 조심스레 묻자, 심협은 장수촌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답했다.

    “지금으로서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국경으로 향해 대당을 떠나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 대당 국경 밖에도 요물들이 있긴 하나, 이곳보다는 훨씬 적다고 하더이다.”

    “당을 떠난다고요?”

    심가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또 다른 길은 장안으로 가는 겁니다. 그곳은 이 나라의 도성이고, 전국의 걸출한 인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 분명 아직 함락되지 않았을 겁니다.”

    이어진 심협의 말에 심화원을 비롯한 심가 사람들의 눈이 미미하게 빛났다.

    “옳소. 장안 그곳은 분명 괜찮을 겁니다. 잠시 경황이 없어 잊고 있었군요.”

    본토박이인 대당 백성으로서 그들은 두 번째 길을 선호하는 것이 분명했다.

    심화원이 입가를 달싹이며 막 뭔가를 말하려는데, 심옥이 불쑥 끼어었다.

    “심 선배님, 그 뒤로 선배님께는 어떤 계획이 있는지요?”

    심화원을 비롯한 사람들은 즉시 그녀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하나둘 심협을 쳐다보았다.

    국경으로 가든 장안으로 가든 심협의 도움이 없다면 그들 모두 절대 평안히 도착할 수 없을 터였다.

    “저는 장안에 가보고자 합니다.”

    심협은 잠시 생각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마겁의 정체를 철저하게 파악하려면 장안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옳습니다. 우리도 그리 생각했습니다. 장안으로 가는 것이 더 안전하지요.”

    심화원이 곧바로 화답하자 심가의 다른 수사들도 잇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들 서두르시지요. 건업성으로 쳐들어간 요물들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는 게 좋을 겁니다.”

    심협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곧 마차 행렬은 방향을 바꾸어 장안으로 향했다.

    건업성의 요마들이 쫓아올까 걱정이 되어 그들 일행은 길을 재촉했고,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멈춰 섰다. 그들이 쉬고 싶어서가 아니라, 마차를 끄는 말들이 탈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남은 길을 생각하더라도 말들이 쉬어야만 했다.

    “여기가 어디인가?”

    심화원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종일 황급히 달려오느라 이미 어디까지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근처에는 단풍나무가 가득 자란 높고 큰 산봉우리가 있었는데, 때는 바야흐로 가을이라 단풍이 불타는 듯하여 경치가 아주 아름다웠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모두 마음이 무거운 탓에 풍경을 감상할 겨를이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단풍나무가 우거진 것으로 보아 임천현(臨川縣)의 서하산(棲霞山)일 겁니다.”

    일 년 내내 바깥을 분주히 돌아다니는 덕에 지리를 잘 아는 심전이 대답했다.

    “서하산? 음, 그럼 방향은 맞게 잡았군.”

    심화원은 지도를 꺼내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심가의 부녀자와 아이들은 길가 한쪽의 평평한 빈터에 구덩이를 파서 아궁이를 대강 만들고 길 근처의 작은 실개천에서 물을 길어다가 밥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도 빈둥거리지 않고 말들을 끌고 가 물을 먹이고 풀을 뜯게 했다.

    따끈따끈한 음식들이 곧 완성됐다. 단출한 채소 탕에 만두(*饅頭: 소가 없는 찐빵)를 곁들인 것뿐이었지만, 온종일 달려오느라 굶주렸던 사람들은 아주 맛있게 먹었다.

    “심 선배님께서는 아직 안 나오셨는가?”

    심화원이 문이 굳게 닫힌 마차를 보며 심옥에게 조용히 물었다.

    사실 심협과 같은 경지에 이르면 몇 달 동안 먹지 않고 마시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기에 심가 사람들도 걱정은 하지 않았다.

    “마차에서 수련 중이시니 방해하지 마시지요.”

    심옥도 마차 쪽을 한 번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가 있어 참 다행이야. 그렇지 않으면 장안으로 가는 까마득한 길에 무슨 일을 더 당하게 될지 모르지 않느냐.”

    심화원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아버지. 하늘에서 우리 심가를 평안히 보살펴주실 겁니다.”

    심옥이 그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심협은 마차 안에서 가부좌를 튼 채, 황정경을 전력으로 운공하며 몸 안의 금제를 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건업성에서 본 장면들이 떠올랐다. 출규기라면 장수촌이나 동래현성 등을 비롯한 작은 지방들에서는 고수라 할 만하겠지만, 큰 도시에서 사나운 요물을 마주한다면 더없이 약한 존재일 터였다. 최대한 수련 경지를 회복해도 위험을 당했을 때 자신을 지킬 힘을 약간 더하는 데 불과하리라.

    수련 경지를 응혼 후기까지 회복한 뒤, 심협은 몸 안의 금제가 적잖이 느슨해졌다는 것과 금제를 푸는 속도가 다시 빨라졌음을 분명히 느꼈다. 아마 사나흘 정도면 출규기 경지까지 회복할 수 있을 것이고, 그때가 되면 머지않아 모든 수련 경지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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