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반선 백소천
양측이 팽팽히 맞서고 있던 때, 가장 앞쪽에 있는 자색 무늬 거미 일고여덟 마리의 발밑이 갑자기 갈라지더니, 여러 줄기의 수인(水刃)이 솟아 나와 녀석들을 베었다.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자색 무늬 거미들의 단단한 껍질이 뎅겅 잘려나갔고,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뒤이어 수인들은 방향을 바꿔가며 나머지 거미들을 계속 베어 순식간에 몰살시켜버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심협이 마차에서 뛰어 내리며 손의 결인을 풀고는 무척 흡족해했다.
그동안 고된 수행을 통해 법력을 적잖이 회복해 응혼 후기에 도달한 터였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심옥을 비롯한 사람들이 다가와 감사를 표했다.
“이곳은 건업성과 멀지 않건만 인적은 없고 요물들만 출몰하는 게, 뭔가 이상하오.”
심협은 손사래를 치고 주위를 몇 번 둘러보며 말했다.
여수하 맞은편 기슭에는 제법 큰 마을이 있었으나, 마을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개나 고양이 한 마리 보이지 않아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확실히 상황이 좀 이상하긴 합니다. 선배님께서는 어떤 고견이 있으신지요?”
심화원이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여러분은 이곳에 진을 치고 기다리십시오. 제가 먼저 가서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심협이 그렇게 말했을 때, 심옥이 불쑥 나섰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심화원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딸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멈췄다.
그러자 오히려 심협이 입을 열었다.
“이곳도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소. 언제든 요물들이 나타날 수 있으니, 도우는 이곳에 남아 가족들을 잘 지키는 것이 좋겠소.”
말을 마친 그는 여수하로 몸을 날렸는데, 두 발이 강의 수면에 닿는 순간 물보라가 솟구쳐 올라 발을 받친 채 건업성 방향으로 나는 듯이 달려갔다. 어찌나 빠른지, 숨 몇 번 쉴 동안에 심협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심가 사람들은 이 광경에 탄성을 지르면서도 부러워했다.
심옥은 심협의 그림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눈빛이 일렁이는 것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 *
심협은 어수지술(御水之術)을 이용해 서둘러 갔기에, 달리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건업성 십여 리 바깥에 이르렀다. 저 앞에서 포효와 군사들의 함성, 쩌렁쩌렁 울리는 충돌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건업성이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인가?’
심협은 속으로 깜짝 놀라 결인을 하며 멈춰 섰다.
정말 전에 심가 사람들이 말대로 건업성에 대군이 주둔하고 있고, 백씨 집안에 반선노조가 수선자(修仙者)들을 이끌고 성을 지키는 상황에서 요마(妖魔)들이 간 크게 성을 덮친 거라면, 사정은 절대 간단치 않을 터였다.
춘화성의 처지가 아직 눈에 선했기에 그는 감히 더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는 피수결(避水訣)을 펼쳐 여수하 안으로 들어가 물밑에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전진하면 속도는 조금 느린 대신 더욱 은밀하고 안전할 터였다.
반각(*半刻, 시간의 단위. 약 15분인 1각의 절반)쯤 뒤 건업성 바로 앞에 도착한 심협은 눈앞의 광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가 짐작했던 그대로, 현재 건업성은 이미 온갖 요물들에게 물샐 틈 없이 둘러싸여 있었다. 범과 늑대 같은 평범한 요물들 외에도 허공에 강력한 요기를 내뿜는 존재들만 해도 수백은 되었는데, 얼핏 봐도 응혼기는 되어 보였다. 심지어 출규기의 대요(大妖)들까지도 적지 않았다.
요물들의 우두머리는 반은 사람이고 반은 호랑이인 세 마리 요물이었다. 그들의 요기는 출규기 대요들을 훨씬 뛰어넘어, 심협으로서는 그 수련 경지를 꿰뚫어볼 수도 없었다.
‘저 세 마리 요물의 기운은 천염노조보다 아랫길은 아닌데, 설마 대승기 존재들인가?’
심협은 흠칫 놀라 최선을 다해 기운을 거둬들이고 기척을 숨겼다.
깨알같이 빽빽한 요물 대군은 사방에서 건업성을 향해 연이어 맹공격을 퍼부었다.
건업성도 천 년 전에 비해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는데, 우선 성벽이 훨씬 더 높고 두꺼워졌다. 또한 성벽 위에는 투석기 같은 것이 아주 많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부적 문양이 여러 가닥 새겨져 있었다. 투석기는 불타오르는 거대한 돌들을 성 아래 요물들을 향해 끊임없이 내던졌다.
불타는 거대한 돌들이 땅에 떨어질 때마다 폭발로 반경 몇 장에 이르는 불바다가 요수 무리를 집어삼켰다.
위에는 쇠뇌도 수두룩했는데, 그 위에는 거대한 화살 통들이 놓여 있었다. 통마다 화살이 촘촘히 들어찬 모습이었다.
쇠뇌를 당길 때마다 검은 화살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표면에 법력 파동이 어렴풋이 드러나는 것이 평범한 화살은 분명 아닐 터였다.
화살들은 요수 무리 속으로 날아가며 한바탕 피바람을 일으켰다.
성벽 위에는 갑옷을 입은 병사들과 수선자들도 가득했다. 그들 사이에서는 칼날이 번쩍였고, 매서운 살기가 감돌았다. 그들은 여러 기구들과 호흡을 맞춰가면서 요물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중이었다.
한편, 건업성 위쪽 하늘에는 수백 명의 수선자가 허공에 뜬 채 몸에서 갖가지 색 밝은 영광(靈光)을 피워내고 있었다. 대부분은 응혼기 수사로, 출규기의 수선자도 30여 명 있는 듯했다.
그들의 수장은 머리에 우관(*羽冠: 깃털 달린 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은 두 노인이었는데, 관부 사람인 것 같았다. 이들의 기운도 놀라워, 역시 대승기 존재인 듯했다.
두 자색 옷 노인의 지휘 아래, 수사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짓거나 혼자서 열심히 전투를 벌이면서 강력한 요물들과 한 데 뒤엉켜 싸웠다.
심협이 보기에 인간 편은 수부터 열세였고, 실력도 훨씬 약했다. 그런 그들이 요수 대군과 팽팽한 대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건업성 위 하늘에 떠 있는, 크기가 족히 천 장은 될 법한 금빛 광진(光陣) 덕분이었다.
광진 안에서는 수많은 금빛 부적 문양이 끊임없이 용솟음쳤고, 금갑(金甲)의 허상들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끊임없는 범음(*梵音: 불경을 외는 소리)을 내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심신이 편안해져 넋까지도 취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 광진에서 가장 신기한 부분은 수사가 그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소모된 법력과 피로감, 심지어 부상까지 모두 빠른 속도로 회복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광진 안에서는 수사들의 몸에 쉬지 않고 여러 갈래의 금빛 빛줄기를 쏘아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수사들의 온몸에서 곧바로 금색 빛무리가 떠올랐고, 방어와 공격 모두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다만 이 금색 빛무리에는 시간제한이 있는지, 1각 정도 지속하고 나면 사라져버렸다.
이 신비한 금색 광진 덕에 수사들이 가까스로 요물들과 비등하게 겨루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 현묘한 광진이로군!’
심협은 여수하에 몸을 반쯤 담근 채 광진을 올려다보며 엄청난 경이로움을 느꼈다.
자세히 보니, 금빛 광진 한가운데에는 노인 하나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머리와 수염은 전부 새하얗게 세었지만, 더없이 아주 맑아 보이는 노인은 열 손가락을 몸 앞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만 가닥의 금색 빛줄기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끊임없이 금색 광진으로 들어가며 광진의 작동을 유지시켰다.
‘광진은 저 백발노인의 신통력인 모양이군! 겨우 법진 하나로 전세를 역전시키다니, 정말 놀라워!’
보면 볼수록 감탄스러웠다.
그런데 호기심에 노인을 살펴보던 그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백 사형?’
백발노인은 나이가 들기는 했어도 이목구비의 윤곽은 훤칠하고 범상치 않은 게, 바로 절친한 친구이자 의형제인 백소천이었다.
‘심옥과 사람들이 말한 백가 노조가 정말로 백소천 사형이었다니!’
반가움과 놀라움, 걱정 등의 복합적인 감정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마음이 흐트러지고 법력도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에 심협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한편, 허공에 가부좌를 튼 채 몸에서 금색 광을 번득이는 백소천을 보면서도 심협은 그의 수련 경지를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듣기로 백가 노조는 이미 반선의 경지에 이르렀다더니, 거짓이 아닌 모양이었다.
‘요물들의 수가 많다고는 해도 관건은 역시 대승기 호랑이 요괴들이다. 반선 백소천이 있으니 건업성은 한동안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때, 허공에서 자색 옷을 입은 대승기 도인 한 사람이 호랑이 요괴에게 있는 힘껏 일격을 가했고, 둘은 그대로 저 뒤쪽으로 날아갔다.
자색 옷의 노인이 거꾸로 날아가 금빛 광진 안으로 들어가자, 부드럽고 순수한 힘이 그의 몸에 녹아들어 흐트러진 법력을 금세 가다듬어주었다.
노인의 몸 표면에서는 붉은 빛이 번뜩이더니 곧 진정되었다.
“백 선배님, 바깥에 요물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이리 버티는 것도 장구지책(*長久之策:오래도록 지속할 계책)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색 옷의 노인이 몸을 돌리며 백소천에게 물었다.
“내 벌써 이곳 상황을 관부와 화생사에 알렸네. 그들이 지원 인력을 보냈으니 사흘 후에는 도착할 걸세.”
백소천이 손의 법결을 풀지 않은 채 침착하게 말하자 자색 옷의 도인은 기가 막힌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흘이라고요? 그때까지 못 버틸 겁니다!”
“근래 요마들이 사방에서 들끓는 탓에 관부와 화생사 모두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네. 아무리 서둘러도 사흘은 걸릴 수밖에 없어. 우리 수사들은 건업성을 지키라는 황명을 받았으니 정말 불행을 당하게 된다면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해야지.”
백소천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
그러나 그때, 상황이 돌변했다. 멀리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거대한 검은 구름이 떠올라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것이다.
이어서 그 안에서 무겁기 그지없는 위압이 뿜어져 나와 마치 큰 바다가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멀리 대승기 호랑이 요괴들 위에 떠 있었다. 이에 온 건업성의 하늘이 어두워졌다.
이 기운은 결코 단순한 요기가 아니라, 짙은 마기가 섞여 있어, 심협은 멀리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금빛 광진 안에 있던 백소천도 표정이 약간 변하며 일어났다.
반면, 자색 옷의 도인은 표정이 크게 변하여 재빨리 옆으로 물러섰다.
“법택(法澤)을 널리 베풀어 중생을 교화한다! 화생사의 신통력이 과연 명불허전이었구나! 불광보조대진(佛光普照大陣) 하나만으로 우리 요족의 대군을 이리 오랫동안 막아내다니 말이야. 허나 우리 요족의 부흥은 대세인지라, 백도우 자네가 아무리 목숨을 걸어봐야 수레에 맞서는 사마귀 꼴일 뿐이다!”
귀청이 찢어질 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먹구름 속에서 들려왔다. 목소리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커다란 강줄기 같은 검은 빛이 구름 속에서 떨어지면서 하늘을 떠받칠 것처럼 굵은 백여 장 길이의 검은 칼날이 되었다. 그리고는 마치 하늘을 가르는 검은 번개처럼 엄청난 속도로 금빛 광진을 베었다.
이를 본 백소천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한 손으로 허리춤을 쳤다. 그러자 한 줄기 금색 빛살이 튀어나왔는데, 뜻밖에도 금빛 목어(*木魚: 나무를 잉어 모양으로 만들어 매달고 불사를 할 때 두드리는 기구)였다. 금빛 목어는 후발선지(*後發先至: 상대보다 늦게 공격했지만, 상대에게 일찍 가 닿는 것)하여 금색 광진 바깥으로 쏘아져 날아갔다.
목어는 핑그르르 한 번 돌더니 어슴푸레한 금빛 광막이 되어 검은 칼날 앞을 막았다.
카캉!
검은 칼날이 금빛 광막 위를 베면서 일순간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그러자 광막이 격렬하게 요동치면서 무수한 금빛 부적 문양이 충격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금빛 광막은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