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여수하(麗水河)
유명서생은 심협을 향해 몇 걸음 뛰어오더니 갑자기 속도를 높였다. 등 뒤에서는 검은 그림자가 여러 겹 연이어 나타나더니, 한 번 번쩍거리는 사이 심협 앞에까지 이르렀다.
심협은 즉시 사월보를 써서 뒤로 급히 물러나는 동시에 반월환을 날렸다.
유명서생은 무리해서 쫓기보다는 검은 계척을 휘둘러 맞서기 시작했다.
쩔그렁!
계척과 반월환이 부딪히자 맑은 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심협은 문득 가슴께가 꽉 막혀 한참이나 숨을 내쉬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츰 가라앉히기 힘든 울분까지 생겨났다.
이따금 들려오는 방울 소리에 울화가 점점 더 강렬하게 치밀어 오르자, 심협은 자신이 유명서생의 수에 걸려든 것임을 깨닫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황급히 정신을 가다듬고 억지로 울분을 억누르며 한 손을 들어 반월환을 불러들였다.
반월환이 손에 들어오자마자 심협의 손바닥이 미세하게 떨렸다. 재빨리 살펴보니, 뜻밖에도 반월환 위에는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검붉은 마기(魔氣)가 가닥가닥 감겨 있었다. 반월환이 마기에 감염된 게 틀림없었다.
‘음흉하기 이를 데 없는 수작이군.’
심협은 속으로 한바탕 유명서생을 저주하고는 반월환을 칠성필 안으로 거둬들였다. 반월환의 영성이 마기에 손상될까 우려한 것이다.
한편, 유명서생은 그런 심협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공격해왔다. 이제 심협은 맨손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명서생이 매개체로 삼았던 법기가 사라졌음에도 심협은 가슴의 울화가 가시기는커녕 더욱 거세게 일고 있음을 곧 알아차렸다. 오싹한 순간이었다.
‘저놈이 이미 마화(魔化)시켰으니 이러다가는 내 몸에도 마기가 침입하겠어. 어쩔 수 없이 그 방법을 써야 하나?’
결정을 내린 그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들어 너른 하늘을 힐끗 살핀 뒤, 다시 사월보로 유명서생과 거리를 벌렸다.
그가 도망치는 거라 생각한 유명서생은 곧장 쫓아왔다.
심협은 뒤로 물러나면서도 두 손을 재빨리 결인하면서 속으로는 삼성멸마(三星滅魔)의 구결을 되뇌었다.
그는 이 신통력을 며칠 동안 수련해왔지만, 아직 효과를 온전히 발휘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니 사실 성공할 자신도 없긴 했다.
뒤로 수십 장쯤 물러나던 심협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더니, 그 자리에서 강보(*罡步: 별자리 모양을 따라 걷는 도교의 보법)를 연달아 밟았다. 동시에 두 손을 몸 앞에서 포개어 복잡한 수인(手印)을 맺었고, 갑자기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듯이 가리켰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별빛이 뿜어져 나왔고, 눈에서도 밝은 빛이 반짝였다.
코앞까지 달려들었던 유명서생은 멈칫하더니 감히 더는 다가오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결인을 마친 심협은 허공을 끌어내리듯 두 손을 아래로 휙 휘둘렀다. 그러자 아득히 먼 밤하늘의 은하수에서 금빛 별 하나가 반응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번득였다. 허공에는 금빛 별의 허상이 떠올랐고, 뒤이어 별똥별처럼 밤하늘을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멸마의 별이 떨어지는 순간, 유명서생은 표정이 급변하더니 검은 안개를 모락모락 피워 올렸다. 그리고 허공으로 솟구쳐 원래 있던 곳으로 재빨리 달아나려 했다.
그 순간,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막 땅으로 떨어지려던 금빛 별이 둘레가 10여 장에 이르는 크기로 변하더니,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어 곧장 유명서생을 쫓아가 세게 내리친 것이다.
별빛에 휩싸이는 순간, 유명서생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더니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소매에서 검은 안개가 세차게 용솟음쳐 하늘을 떠받칠 듯한 커다란 손으로 변해 금빛 별을 막아섰다.
하지만 굼실대며 소용돌이치던 검은 안개는 별의 금색 빛에 닿는 순간, 눈처럼 녹아내려 사라졌다.
꽝!
금빛 별은 끝내 땅바닥에 내리꽂히며 엄청난 굉음을 냈고, 이에 치솟은 거대한 먼지구름이 수십 장까지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근처 복숭아나무들이 쓰러질 듯 휘청댔다.
심협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는데,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별빛은 조금씩 흩어져 사라졌다. 눈에서 번득이던 밝은 빛도 따라서 어두워졌다.
그는 몰려드는 극심한 피로감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단 한 번이었을 뿐인데 체내의 법력이 거의 다 소모될 줄이야. 육신까지도 이렇게 피곤해지다니, 이 공법은 한동안 함부로 쓰면 안 되겠군.’
심협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별이 떨어진 곳을 향해 힘겹게 다가갔다.
놀랍게도 그 근방 땅바닥에는 커다란 검은 무늬가 있었다. 무늬 중간에는 오각별 같은 금빛 도안이 있었고, 구름무늬 같은 부적 문양이 주위를 둘러싼 모습이었다. 그 위로 별빛의 파동도 은은하게 느껴졌다.
심협은 도안의 중심으로 걸어갔고, 오각별 한가운데에 놓인, 검게 타버린 마른 뼈를 보았다. 여전히 두 손으로 하늘을 떠받친 자세를 하고 있는 걸 보니, 그는 유명서생임이 분명했다.
“어쨌든 위력은 보통이 아니구나. 하하하!”
심협은 통쾌하게 웃고는 자리에 가부좌를 튼 채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한편, 아무 기척이 없자 참고 기다리기 힘들어진 심옥은 슬쩍 살펴보러 왔다가 심협이 마른 뼈 옆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기겁했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심협을 방해하지 않고 기다란 천으로 된 법기를 되찾아 조용히 그의 옆을 지켰다.
심협이 깨어난 뒤, 일행은 만도림에 하룻밤 머물며 휴식을 취하고는 이튿날 이른 아침에야 건업성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났다.
* * *
며칠 뒤, 일행은 드디어 건업성 근처에 다다랐다.
오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던 심가 사람들은 그제야 기운을 좀 차렸는지 웃음을 되찾았다.
마차 행렬의 어느 마차 안, 심옥과 심화원을 비롯한 심가의 몇몇 수사(修士)들은 한데 모여 한창 뭔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한나절 뒤면 건업성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니 드디어 마음을 놓을 수 있겠군요.”
심전이 기뻐하며 말했다.
“건업성이 정말 그 무시무시한 요마(妖魔)들을 막아낼 수 있을까요?”
서른이 조금 넘어 보이는 수려한 여인의 목소리에는 우려가 담겨 있었다.
“형(????) 누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누님은 자주 출타하지 않으니 건업성 사정을 잘 모를 테지요. 그곳에는 관부의 대군이 주둔하고 있고, 성안의 백씨 집안은 커다란 문파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구마세가입니다. 더욱이 백가의 노조는 반신선(半神仙)이라 할 만한 분이고, 들어보니 화생사와의 관계도 아주 깊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분명 성을 평안하게 지킬 수 있을 겁니다.”
“맞다. 건업성은 안전할 게다. 다만 요즘 사방에서 요마들이 일어나 근처 각지에서 피난 온 백성들이 모두 몰려들었을 테니, 건업성이 사람들로 넘쳐날까 걱정이구나. 그곳에서 가업을 어찌 계속 이어나갈지 내 잘 생각해봐야겠다.”
심전의 희망적인 말에 심화원이 동조하면서도 내심 우려가 되는 듯 말했다.
“우리 심가에서는 대대로 약초 장사를 해왔으니, 건업성에서도 당연히 옛 사업을 다시 일으켜야지요. 요즘 사방에서 요마들이 날뛰고 있으니 의약 사업은 잘될 겁니다.”
심전이 또다시 희망적인 목소리로 용기를 북돋았다.
“우리 심가의 의술은 대대로 전해지며 나날이 발전해왔으니 당연히 문제없다. 단지 다시 시작하려면 약재 공급원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야 하지.”
다른 사람들도 그 말에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세상이 어지러우니 화물 운송이 큰 문제인데, 약재가 없으면 아무리 뛰어난 의술도 헛수고인 것은 당연했다.
“옥아, 너는 어찌 아무 말이 없느냐?”
심화원이 줄곧 말없이 마차 밖만 바라보고 있는 딸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그냥 듣고 있었어요. 제가 그런 일에 밝지 못하다는 건 아버지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심옥은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움찔하더니 말했다.
형이라는 여인은 심옥의 시선 끝에 서 있는 마차를 확인하고는 짓궂게 웃었다.
“동생 머릿속에는 심협 선배님뿐인 모양이지? 호호호!”
“형 언니, 저는 그저 심협 선배님을 존경하는 것뿐이에요. 다른 엉뚱한 생각 같은 건 없다고요.”
심옥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지만, 심화원은 그 말에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리고 그런 심화원의 표정을 본 심옥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형 언니의 객쩍은 농은 듣지 마세요. 저는 그저 심협 선배님이 계승한 문파가 어디였을까 추측해봤을 뿐이니까요.”
“옥아, 생각해보면 요즘 세상이 어지럽건만, 우리 심가 역시 실력이 너무 얕아 벽곡기 수사는 너뿐이지 않으냐. 만약 심협이 남아준다면 우리 심가는 근심 걱정이 없을 게야. 요즘 너와 자주 한담을 나누는 걸 보니 어쩌면 그도 네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닌가 싶더구나.”
심화원은 약간 흥분한 듯했고, 마차 안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몇 마디 덧붙였다.
“그를 데릴사위로 들일 수 있다면 확실히 우리 심가를 보존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그럼요! 확실히 든든하겠지요!”
상황이 이렇게 되니 처음 말을 꺼낸 심형이 곤란해졌다.
“저……. 가주, 제가 방금 한 말은 그저 농이었을 뿐입니다. 옥아의 혼사는 이 아이 스스로가 결정해야지요.”
하지만 심옥은 오히려 화를 내기는커녕 더없이 평온했다.
“아버지, 제가 느끼기로 심 선배님께서는 제게 남녀 간의 정은 결코 없습니다. 그분이 저를 찾으신 것도 수련에 가르침을 주신 것뿐이고요. 아버지 뜻은 알았으니 노력해보긴 하겠으나, 아무것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일이 성사되고 말고는 그분 뜻도 보아야 하니까요.”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허허, 그야 당연하지. 그 일은 옥아 네게 맡기마. 성사되지 않는다 해도 그와 가까워져서 해로울 건 없으니 말이야.”
심화원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한편, 다른 마차에서 눈을 감은 채 수련하던 심협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였다. 저 앞에서 여러 짐승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심협은 눈썹꼬리를 추켜올리며 마차에서 나왔다.
네댓 마리 잿빛 늑대가 흥분한 표정으로 앞쪽 수풀에서 튀어나와 달려들고 있었다.
심가의 마차 행렬은 즉시 멈췄고, 호위대 수사 두 명이 나섰다.
심옥 등도 급히 뛰쳐나와 도왔다.
이 잿빛 늑대들은 평범한 요수(妖獸)로, 고작 연기 초기 수준이라 상황은 금방 종료됐다.
심협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마차 안으로 돌아갔다.
이후로도 수차례 요물들의 습격이 있었지만, 심가 사람들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금세 상황을 정리하고는 계속해서 건업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건업성에 가까워질수록 요물의 습격도 잦아졌다. 한나절도 채 지나기 전에 네댓 번이나 습격을 당했을 정도였다.
이쯤 되자, 건업성은 안전할 거라 믿었던 사람들도 내심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건업성에서 30여 리 떨어진 어느 큰 강가에서 심가 일행은 다시 한번 요물 무리의 습격을 받았다.
이 강은 바로 여수하였다.
습격해온 요물들은 흉악하게 생긴 자색 무늬의 거미 떼였다. 한 마리 한 마리가 맷돌만 했고, 껍데기가 철같이 단단했으며, 연기 초기에서 중기 수사(修士)와 맞먹을 정도였다. 그러니 심옥이 심가의 연기기 수사 무리를 데리고 필사적으로 싸워도 겨우겨우 막아내는 정도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