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98화 (198/1,214)

198화. 홀로 적과 맞서다

그 서생은 세 번째로 ‘그 사람은’이라는 구절까지 읊고는 책 읽기를 멈췄다. 이어서 책궤에 달린 작고 정교한 방울이 돌연 땡그랑 하고 울렸다.

뒤이어 서생은 책을 천천히 내려놓고 거의 파랗게 보일 정도로 창백한 젊은 얼굴을 드러냈다.

서생의 용모는 추하기는커녕 수려할 정도였다. 다만 두 눈에는 흰자가 전혀 없이 밤의 어둠보다도 짙은 흑색이었고, 온몸에서는 죽음과 쇠락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저승에서 걸어 나온 것만 같았다.

“거기 두 분, 밤길을 너무 다니시면 귀신과 마주친답니다. 두 분께서는 어디를 가려 하시는지요?”

그 유명서생(幽冥書生)은 시커먼 눈으로 두 사람을 빤히 보며 갑자기 사악하게 웃더니 물었다.

심협과 심옥은 눈빛을 한 번 교환하고는 대답하지 않은 채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이왕 오셨으니, 그냥 가지 마십시오.”

유명서생은 두 사람이 멀어지려 하자 갑자기 표정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렸다.

그러는 사이 그의 옷들이 갑자기 바람도 불지 않는데 저절로 부풀어 올랐고, 그 안에서 검은 연기가 무럭무럭 솟아나와 반경 3~4 장을 가득 채웠다.

유명서생의 몸도 검은 연기가 떠받쳐주어 천천히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더니 불쑥 고개를 숙여 심협 일행을 내려다보았다.

“다 죽어야지. 하하하! 너희도 다 죽어야 돼!”

그의 목소리는 몹시 거칠어져서 마치 목구멍 깊은 곳에서 쥐어짜내는 것만 같았다.

그때, 그의 등 뒤에 메고 있던 책궤가 덜덜거리며 들썩이더니, 문이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리고 그 안에서 더 짙은 검은 안개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는 10여 마리의 악귀로 변해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휘두르면서 서생의 뒤에 매달렸다.

자세히 보니, 이 악귀들에는 남녀노소가 모두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검은 기운을 머금은 채, 흉악한 표정을 지으며 목을 비틀었고, 끊임없이 깩깩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만찬이다! 크하하하!”

유명서생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10여 마리의 악귀들은 뒤에 시커먼 안개를 드리우며 두 사람에게로 달려들었다. 하나하나 모두 크고 시뻘건 입을 벌리고 있었는데, 그 안의 하얗고 날카로운 이빨이 소름끼쳤다.

심협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몰래 심옥에게 눈짓하여 뒤로 조금 물러서게 했다.

이윽고 악귀들이 몸 앞까지 달려들었고, 머리를 산발한 노파가 가장 높이 뛰어올라 심협의 머리를 물어뜯으려 들었다. 요염한 여인네 하나는 몸 뒤로 돌아와 그의 목을 뜯어먹으려 했고, 키가 2척이나 될 듯한 꼬마아이도 그의 발치로 굴러와 종아리를 물어뜯으려 했다.

다른 귀물들도 바짝 따라와 순식간에 심협은 완전히 포위됐다.

한데 그 순간, 갑자기 촤르륵 하는 물소리가 들리더니 소용돌이 형태의 물결이 심협의 발치에서 솟아 마치 물의 장벽처럼 그를 모든 귀물들과 갈라놓았다. 심지어 귀물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이미 그들의 목덜미마다 물줄기가 하나씩 감겨 있었다.

“공격!”

심협이 가볍게 외치자, 새하얀 번갯불 한 줄기가 갑자기 폭발했다.

콰르릉!

이어서 갈래갈래의 번갯불이 물줄기를 따라 퍼져나갔고, 여러 가닥의 새하얀 번개 줄기가 되어 모든 귀물의 체내로 쏟아져 들어갔다.

“끼야악!”

“끄아아아!”

소름끼치는 비명들과 함께 모든 귀물들이 하나하나 번갯불에 갈가리 찢겨나갔고, 검은 기운을 자욱하게 뿜어내며 순식간에 모두 사라져버렸다.

유명서생은 이 장면을 보고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단지 옷소매를 휘둘러 흩어졌던 검은 안개를 책궤 속으로 돌아가게 했을 뿐이다.

“대단한 뇌부로군요.”

유명서생은 찬탄했지만, 말과는 달리 소매 안에서 길이 1척 정도의 하얀 피리를 꺼내 입가에 가로로 가져다댔다.

심협은 자세히 살펴보고서야 그 피리가 중간은 약간 가늘고, 양 끝부분이 조금 굵직하다는 걸 알아차렸는데, 소름 돋게도 사람의 팔뚝 뼈였다.

“조심하시오.”

심협은 재빨리 심옥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낮고 무거운 피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심협은 식해(識海) 안에 마치 거대한 산 하나가 박혀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어서 멍하니 넋을 잃었고, 시야도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사방에 연기가 흩날리고 옆에서는 매미 날개 같이 얇고 고운 분홍빛 천이 춤추듯 휘날리는 것을 몽롱한 상태에서 보았다. 귓가에도 은은하게 감미로운 음악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느 선가(仙家)의 보전(寶殿)에 와 있었다.

그의 옆에는 분홍빛 고운 천으로 만든 옷을 입은 아리따운 궁녀가 아름다운 자태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의 옷소매가 흔들리는 순간, 수정같이 맑은 가루가 흩날리는 듯했다. 코끝에 감미로운 향기가 맴돌며 그를 취하게 만들었다.

그때, 문득 발아래에 뭔가가 부딪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숙여 보니 뜻밖에도 배두렁이(어린아이가 입는, 배만 겨우 가리는 좁고 짧은 옷)를 입고 머리를 땋은, 희고 여린 어린아이가 두 손으로 그를 안은 채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심협은 옥으로 깎은 듯 뽀얗고 보드라운 아이를 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까닭 없이 긴장이 되어 두 손으로 결인해 피수결(避水訣)을 시전했다. 그러자 몸에서 길이가 1촌에 이르는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훅!

피수결의 빛이 사방으로 돌진하자, 안개들이 순식간에 흩어지고 사방의 허황된 광경들도 사라지며 본래의 광경을 되찾았다. 심협은 그제야 궁녀며 선인 따위는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됐다.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건 책궤에서 뛰쳐나왔던 악귀들이었다.

우웅…… 우웅…….

간간이 이어지는 뼈 피리 소리와 함께 맨눈으로는 식별하기 어려운 음파가 날아 심협의 몸을 감싼 피수결에 부딪히며 잔물결을 일으켰다. 하지만 끝내 뚫고 들어오지는 못했다.

심협은 이에 약간 안도했으나, 그 순간 뒤에서 갑자기 바람소리가 들렸다!

쌔액! 쌔액!

그가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홱 돌리자 귓가에 물화살 두 개가 피수결 광막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또한, 심옥이 그를 향해 빠르게 돌진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손에 든 기다란 물빛 천을 한 번 말아 올리자 천이 마치 파도처럼 물결치며 다가왔다.

심협은 시선을 집중하고 몸을 훌쩍 날려 물빛 천 위에 그대로 내려앉아 가벼운 발걸음으로 심옥을 향해 달려갔다.

“심옥 도우! 정신 차리시오! 이건 환술이오!”

심협은 성큼성큼 내달리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돌진해오던 심옥은 그의 목소리를 못 들은 듯 손에 든 천을 휙 털었다. 그러자 갑자기 강력한 흡입력이 생겨났다.

심협은 한 걸음 내딛다가 복사뼈 근처에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물줄기가 가닥가닥 휘감는 것이, 마치 소용돌이 속에 발을 들인 것처럼 강한 힘에 이끌려 일순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

곧이어 주위에서 또다시 푸른 빛이 번쩍이더니, 좌우 양끝의 긴 천이 거꾸로 돌돌 말려 돌아와 그의 몸을 휘감으며 꽁꽁 싸매려 했다.

심협은 발끝으로 아래를 한 번 내리찍었다. 그러자 발아래로 빛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사월보를 시전한 것이다.

심협의 모습이 일순 희미해지더니 순식간에 심옥의 곁에 와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심옥의 어깨를 붙잡고 몇 차례 힘껏 흔들어 깨우려 했다. 그러나 심옥은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요사(妖邪)!”

그녀는 오히려 크게 외치더니 심협을 향해 한 손을 내리쳤다.

심협은 재빨리 피하며 속으로 탄식했다. 심옥은 아직 응혼기에 도달하지 못해 혼이 연약한 까닭에 유명서생의 환술에 빠져 스스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군.”

심협은 낮게 혀를 찼다. 일단 결심하자 단숨에 거리를 벌렸고, 소뢰부(小雷符)를 꺼내 망설임 없이 심옥의 머리 위로 던졌다.

쾅!

제법 격렬한 소리와 함께 번갯불이 그녀의 몸에 내리 꽂혔다.

심옥은 온몸이 쭈뼛 마비되어 그대로 고꾸라졌다.

심협은 몸을 쉴 새 없이 빠르게 움직여 심옥 곁에 서더니, 한 손으로 그녀를 끌어당겨 부축한 채 뒤로 백여 장쯤 물러났다.

두 사람이 막 몸을 가누자마자 심협은 뒤에서 사각사각 하는 발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들었다. 심가 사람들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음이 급해져 황급히 외쳤다.

“오지 마시오! 다들 물러가시오!”

심화원을 비롯한 사람들은 방금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그때, 땡그랑 하고 방울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뼈 피리 소리가 따라 들려오며 유명서생도 뒤쫓아 왔다.

심협은 곧장 몸을 돌리며 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몸 앞에 물보라가 솟아나 심옥을 떠받친 채 재빨리 뒤로 밀려갔다.

“어서 그녀를 데리고 여기를 뜨시오. 전투가 끝나기 전에는 누구도 와서는 안 되오!”

그는 크게 외친 뒤, 쏜살같이 몸을 날려 유명서생 앞을 막아섰다. 심화원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환술에 빠질까 우려한 것이다. 만약 저들도 환술에 빠져 자신을 공격해온다면 얼마나 곤란할 것인가!

심화원은 심옥을 안아 들더니 망설임 없이 심가 사람들을 이끌고 물러났다.

한편, 유명서생은 심협이 정면으로 달려드는 것을 보고는 뼈 피리를 잠시 놔두고는 양쪽 소매를 부풀렸다. 그러자 그의 뒤에서 끝없는 검은 안개가 솟아나와 모래폭풍처럼 심협에게로 몰려갔다.

검은 안개 속에서는 방금 나타났던 귀물들 외에도 흉악한 얼굴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를 드러낸 채 손톱을 휘두르며 사납게 돌진해왔다.

심가 사람들이 물러난 덕에 뒷걱정이 사라진 심협이 손을 들어 올리자 수십 개의 빛줄기가 연이어 나타나더니, 소뢰부(小雷符)가 연거푸 날아가 허공에서 눈부신 백색광을 내뿜었다.

우르릉! 콰쾅!

폭발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고, 갈래갈래 번갯불이 귀신들의 흉악한 얼굴에 내리꽂혔다. 귀신들은 썩은 나무처럼 터져 나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녀석들은 불사불멸의 존재라도 되는 것인지, 이쪽에서 섬멸당한 뒤, 잠시 후 다른 쪽에서 또다시 나타나 사납게 심협에게 엉겨 붙었다.

“적어도 응혼 후기는 되는 것 같군. 한참을 싸웠는데도 본체는 건드리지도 못하다니, 만만찮은 놈이야. 휴우.”

심협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한번 손목을 떨쳐 소뢰부 10여 장을 동시에 내던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동시에 몸을 날려 부적들 뒤를 따랐다.

펑! 펑! 펑!

소뢰부는 연이어 폭발하며 끊임없는 굉음과 함께 겹겹이 몰려드는 귀물들을 소멸시켜 가운데 구멍을 만들었다.

그 구멍으로 재빨리 빠져나와 유명서생 앞에 이른 심협이 양손을 크게 떨치자, 두 소매에서 빛이 번쩍였다. 거의 동시에 반월환과 낙뢰부(落雷符) 한 장이 유명서생의 이마로 쌩하니 날아갔다.

갑작스러운 이번 일격에 유명서생은 목을 뒤로 움츠리고는 입을 벌려 짙고 검붉은 안개를 토해냈다.

이 안개에 닿은 순간, 낙뢰부는 눈에 띄게 희뿌연 색으로 변했고, 그 위의 문양은 한 번 번득이더니 느닷없이 힘이 다한 것처럼 픽 꺼져버렸다.

그러나 반월환은 여전히 귀청을 찢을 듯한 울부짖음을 울리며 은빛 달그림자가 되어 검붉은 안개를 베고 유명서생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심협은 이 기세를 몰아 몸을 날렸고, 속으로 황정경 공법을 운공하며 유명서생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퍽!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유명서생이 수십 장이나 나가떨어졌다.

“이런, 엄청 단단하군.”

심협은 시큰거리는 주먹을 가볍게 털고는 반대쪽 손을 휘둘러 반월환을 불러들여 움켜쥐었다.

그 무렵, 바닥에 처박혔던 유명서생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더니 온몸에서 내뿜었던 검붉은 안개를 차츰 거둬들였다. 안개는 그의 옷자락 안으로 꾸물꾸물 몰려 들어가 사라져버렸다.

그는 처음 나타났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했지만, 손에는 어느새 2척 길이의 검은 계척(*戒尺: 글방 선생이 학생들을 체벌하기 위해 쓰던 나무 막대, 혹은 불교에서 독경 등을 할 때 박자를 맞추는 기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에는 점점 짙은 살기가 돌았고, 이목구비에도 음산한 그림자가 한 겹 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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