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97화 (197/1,214)

197화. 삼성멸마

며칠 뒤, 해 질 무렵. 서쪽에는 해가 아직 지지 않아 구름과 노을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심가 일행은 비가 오락가락하는 전화현(前化縣) 경내를 어렵사리 빠져나와 유전산(楡錢山) 어귀를 지나 유음현(兪陰縣)에 들어섰다.

심협은 예전처럼 마차 안에 앉아 수련하지 않고 직접 마차를 몰았고, 보름이 넘도록 내내 마차를 몰아준 젊은 마부를 반대편에 앉아 쉬게 했다.

마부의 이름은 왕원(王遠). 원래 심가 집사의 아들이었으나, 성이 함락당할 때 일가족이 모두 성안에 남았고, 노 집사의 간곡한 부탁에 오직 그만 심화원에게 끌려 나왔다.

“심 선사님, 저 산이 바로 유전산입니까?”

왕원이 손을 들어 저 멀리 캄캄하고 흐릿하게 이어진 산봉우리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맞소. 저곳이오.”

심협은 그가 가리키는 곳을 한 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 아버지께 이야기는 들은 적 있습니다. 예전에 저곳은 심가의 중요한 약재 생산지 중 하나였는데, 느릅나무가 아주 많았고, 해마다 철이 되면 향기롭고 달콤한 느릅나무 열매가 가득 자란다고 하셨지요. 그 생김새는 작은 동전과 같은데, 날로 먹을 수도 있고 쪄서 밥을 지을 수도 있으며, 먹은 사람마다 재운이 따른다고도 하셨습니다.”

왕원의 눈에 잠시 그리워하는 기색이 내비쳤다.

“느릅나무 열매라……. 나도 어렸을 때 먹어보긴 했소.”

그 말에 심협도 옛일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맛이 어떠합니까?”

왕원은 눈빛을 살짝 빛내며 재빨리 물었다.

심협은 그 기대하는 모습을 보자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나질 않소.”

사실 어렸을 때 느릅나무 열매로 지은 밥을 먹어봤으나, 그다지 향기롭거나 달콤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때는 맛있는 것들이 훨씬 많았으니 귀한 줄도 몰랐다. 한데 지금, 천 년 뒤의 세상에서는 그런 것조차도 귀하디귀한 것이 될 줄이야.

“사실 우리 아버지께서도 드셔본 적이 없답니다. 그저 매번 이야기하실 때면 늘 제 입에 침이 고였지요. 한데 그게 도대체 어떤 맛일지 전혀 상상이 가질 않아서요. 하하.”

왕원은 멀리 유전산을 바라보며 다소 실망한 듯 말했다.

“내 기억으로는 춘화현성에도 느릅나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심협이 잠깐 생각해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왕원은 그 말을 듣고도 심협이 그걸 어찌 아는지는 생각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아주 늙은 느릅나무가 있긴 했습니다. 수령이 200여 년은 됐을 텐데, 아쉽게도 진작 말라죽어버렸지요.”

심협은 그 말에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어쨌거나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춘화현성이 주성에 비견될 만한 커다란 성으로 변하기까지 했는데, 느릅나무라고 변하지 않을 게 무엇이겠는가?

두 사람이 한창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선두 마차에서 갑자기 말울음소리가 한 차례 들리더니 멈춰 섰다. 심협은 옅은 피비린내를 맡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마차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심전이 빠른 걸음으로 뛰어오는 게 보였다.

“심 선배님, 앞에 뭔가가 있습니다!”

심전은 멀리서 포권하며 외쳤다.

심협은 망설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행렬 앞쪽에 가까워질수록 공기 중에 자욱한 피비린내는 더 짙어졌고, 그의 미간도 더욱 찌푸려졌다.

그가 도착해 보니, 땅에 흩뿌려진 커다란 핏자국이 한눈에 들어왔다. 색깔은 탁했고, 이미 말라서 딱지가 앉았으며, 더 먼 곳에는 수많은 사람의 잔해가 사방에 널려 있어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많은 사람이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고, 구역질을 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심협은 이미 삶과 죽음을 보는 것에 익숙해 졌지만, 잘려나간 손과 발이 온 땅 가득 널려 있는 것을 보자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선배님, 대강 세어보니, 시신은 다 합쳐서 10여 구입니다. 오장육부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요수에게 습격당한 것 같습니다.”

심옥이 다가오며 말했다.

심협은 말없이 가만히 몸을 굽혀 잘려나간 어린아이의 손을 집어 들고는 단면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는 품에서 황지 부적 하나를 꺼내 허공에 흔들었다.

과산부 문양이 그려진 황지 부적이 가늘게 소리를 냈지만, 빛은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요수의 소행이 아니오.”

심협은 부적을 거두어들이고는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시신이 이리 심각하게 훼손된 것으로 보아 이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존재의 소행 같기는 하나, 과산부로 살펴보아도 주위에는 요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더구나 시신들은 갈가리 찢겨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자세히 보면 잔해의 단면 부분에 남은 잇자국에서 요족의 흔적도 뚜렷하지 않지요.”

심협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심화원은 그의 말을 듣고 바로 잔해 속을 뒤적이다가 이빨 자국이 난 팔뚝 한 토막을 찾아내 살펴본 뒤, 참지 못하고 놀라 소리를 질렀다.

“이 이빨 자국은…… 어찌 사람의 것 같단 말인가?”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다가가 살펴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람은 사람을 죽여도 이런 식으로 장기를 파내고 뼈를 씹으며 시체를 토막 내는 일 따윈 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들이 마물을 만나 마기에 감염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마도 마물로 변했겠지요.”

심협이 ‘마물’이라는 말을 강조하자 심가 사람들의 안색이 굳어갔다.

“선배님 말씀이 옳은 듯합니다. 만약 정말 마물이 이곳에 있다면, 앞에 마을에서 밤을 보내며 대열을 정비하려던 우리의 계획을 바꿔야 할 것 같군요.”

심화원이 잠깐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마물은 여느 요괴들보다도 상대하기 어려우니, 피할 수 있으면 최대한 피해야 합니다. 오늘 밤에는 계속 길을 재촉해 앞쪽의 청암진(靑岩鎭)을 돌아 적운산(積雲山) 쪽으로 가서 쉬도록 하지요.”

심옥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좋겠소.”

심협이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땅 위의 유해들을 한데 모아 묻어준 뒤, 이미 버려진 지 오래인 청암진을 돌아 마을 바깥의 만도림(萬桃林)을 경유해서 떠났다.

* * *

청암진 밖, 만 묘(畝)의 복숭아나무 숲.

원래는 생기가 충만해야 할 복숭아나무 숲이지만, 지금은 땅이 바싹 말라 곳곳에 거북이 등껍질처럼 쩍쩍 갈라지고 검게 그을린 자국이 있었다. 주위의 모든 복숭아나무는 이미 완전히 말라죽어 검은 곁가지가 마치 절망한 커다란 손처럼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차츰 하늘이 어두워지자, 사방에 고목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심가 사람들이 그 사이를 지나가는 동안 밤바람이 나뭇가지 끝을 스치며 낮은 흐느낌 같은 소리를 냈다.

심협과 심옥은 같은 마차를 타고 대열의 가장 앞에서 가고 있었다.

“너무 긴장할 필요 없소. 오랫동안 신경이 곤두선 채로 있는 것은 결코 좋지 않소.”

심협은 심옥의 표정이 굳은 것을 보고는 차분히 일깨워주었다.

삼성멸마신통을 수련하기 시작해 별빛을 몸에 끌어들인 뒤로, 그는 봉인을 푸는 속도가 크게 증가하여 지금은 응혼 중기의 실력을 회복한 터였다. 신식도 어느 정도 바깥으로 내보낼 수 있게 됐으니, 만약 위험이 가까워지면 미리 알아차릴 수 있을 터였다.

“오래 전부터 생긴 습관입니다. 춘화성을 떠나 바깥에 나가기만하면 언제든 스스로 경계태세를 유지하여 고칠 수가 없더군요.”

심옥은 살짝 멍해졌다가 곧 웃으면서 말했다.

심협은 옆의 심옥을 보면서 장수촌에서 만난 영락이 떠올랐다. 그녀 역시 말세의 여인이었고, 한 마을과 일족의 마지막 기댈 곳이 된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내가 있으니 조금은 마음을 놓아도 좋소.”

심협이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심옥의 얼굴에도 조금이나마 온기가 감돌았지만, 팽팽히 곤두서 있는 신경은 여전히 느슨해지지 않았다. 그녀의 말처럼 이미 습관이 되어 고치기 힘든 것 같았다.

“지난 수행 때 이미 난관이 좀 해소되지 않았소? 왜 돌파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거요?”

심협은 억지로 몰아붙이지 않고 화제를 바꾸었다.

“저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어쩐지 아직 덜 여문 듯한 느낌이 드는데, 도대체 어디가 부족한 것 인지 스스로도 말하기 어렵습니다.”

심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도우가 최근 수행하면서 느낀 것들을 이야기해 보시오.”

심협의 말에 심옥은 주저하지 않고 곧 이야기를 시작했다.

심협은 진지한 표정으로 끝까지 들었고, 꿈속과 현실이라는 두 세계에서의 수행 경험을 통해 심옥의 말을 자세히 분석했다.

금세 문제의 원인을 찾아낸 그가 해답을 주자, 심옥은 깨달음을 얻고는 몹시도 기뻐했다.

“그런 것이었군요. 이제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심옥은 거듭 포권하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사소한 일일 뿐이오. 감사할…….”

손을 저으며 겸손을 떨던 심협이 우뚝 굳더니 콧날을 찡그렸다. 그는 표정이 어두워진 상태였고, 앞가슴에서는 빛무리가 생겨났다. 뒤이어 품에서 과산부를 꺼내자, 그 위에 밝아졌다 어두워졌다하며 깜빡이는 빛이 보였다.

“요기가 있다!”

그는 즉시 마차행렬을 멈춰 세웠다.

곧 심화원이 심전을 데리고 행렬 끝에서 달려와 무슨 일인지 물었다.

“앞에 요물이 있는 듯합니다. 허나 부적 상태로 보아 그리 강하지는 않은 듯하니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심협은 막 꺼지려고 하는 부적 위의 희미한 빛무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우린……?”

심화원은 심협을 보고 물었다.

“여기를 지키고 계십시오, 제가 가서 보고 오지요.”

심협의 말에 심옥이 불쑥 나섰다.

“선배님,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심협은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마차 행렬을 떠나 복숭아나무 숲 앞쪽으로 탐색해나갔다.

대략 400여 장쯤 걷자, 피비린내가 갈수록 진해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심협이 손에 든 과산부의 빛은 뚜렷한 변화가 없었다.

“저건……?”

심옥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멀지 않은 곳의 복숭아나무 아래를 가리키며 놀란 얼굴로 말했다.

심협도 이미 알아챘다. 그곳 바닥에는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시신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널려 있었고, 장기가 전부 사라져 있었다. 일전에 본 시체들과 조금 다른 것은, 이 시신들 위에는 빽빽하게 털이 자라 있고 비늘과 발톱 또는 날카로운 뿔이 자라 있다는 것이었다.

“이건 요괴들이군요. 그 마물의 소행일까요?”

“그렇소. 마물은 대부분 미쳐버려 이성과 지혜가 전혀 없으니, 사람이든 요괴든 모두 죽였을 거요.”

심협이 고개를 끄덕이며 침음했다.

“그 마물은 청암진에 있지 않았나요? 어찌 또 이곳에 나타난 걸까요?”

“분명 이 요물들을 쫓아 온 것일 테지.”

심협은 앞쪽의 짙은 어둠 속을 노려보며 답했다.

“그렇다면, 이 복숭아 숲으로 계속 가서는 안 되겠군요. 더 멀리 돌아서 가야겠어요.”

심옥이 탄식했으나, 심협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은 것 같소.”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앞의 허공에서 갑자기 방울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아주 기묘하고 변화무쌍해서 온 복숭아 숲에 메아리쳤고, 듣는 것만으로도 불안해졌다.

심옥이 방울소리를 따라 앞을 바라보니, 짙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등불 하나가 켜졌다. 빛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그들 쪽으로 천천히 날아왔다.

심협은 소매 안으로 가만히 칠성필을 그러쥐고는 재빨리 법기인 반월환을 꺼냈다. 다른 손에는 낙뢰부(落雷符) 한 장을 갈아 끼운 채였다.

방울이 울리는 빈도는 높지 않아 10여 번 호흡할 때마다 한 번씩 울렸다. 그리고 소리가 세 번째 울리는 순간, 등불은 두 사람과 10여 장 떨어진 곳까지 날아와 있었다.

심협은 앞에 나타난 것이 푸른 옷을 입고 머리에 유관(*儒冠: 유생들이 쓰던 관)을 쓴 채, 등에 나무로 만든 책궤를 멘 선비임을 그제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등불을, 다른 손에는 고서를 쥐고 독서에 몰두하고 있었다.

서생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아 마치 유학하는 서생 하나가 책궤를 멘 채 손에 촛불을 밝히고 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가서 봤더라면 그의 푸른 옷이 다량의 피가 엉겨붙어 시커멓게 변색됐음을 알 수 있을 터였다. 또한, 손에 든 고서에도 피 묻은 손자국이 가득했다.

심협이 귀 기울여 들어보니 서생이 나지막이 읊조리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해와 달은 세상을 비추건만, 그 사람은, 그 사람은…….(日居月諸, 照臨下土, 乃如之人兮, 乃如之人兮……: 시경의 한 구절)”

너무도 기이한 광경에 심협과 심옥은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더욱이 심옥은 등 뒤에서 냉기가 솟는 것을 느끼고는 그 서생에게서 감히 눈을 돌리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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