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96화 (196/1,214)
  • 196화. 코뿔소 장군

    “선배님.”

    심화원은 심협이 오는 걸 보고 급히 예를 갖추었다.

    “제가 상대하지요.”

    심협은 손을 설레설레 내젓고는 웃으며 말했다.

    말을 마친 그는 몇 걸음 나아가 코뿔소 장군과 몇 장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코뿔소 장군은 이 모습을 보고는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추를 들어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네가 우두머리냐?”

    “그렇다고 해두지.”

    심협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돈과 먹을 것을 전부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본 장군의 이 묵직한 추가 얼마나 잔혹한지 보여주겠다.”

    코뿔소 장군이 눈을 치켜뜨며 사납게 말했다.

    “오, 그래? 그 추가 그리 무섭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니 궁금해지는구나. 자, 이리 와서 나를 한 대 때려 보거라.”

    심협이 웃으며 그리 말하자 코뿔소 장군은 멍하니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끔뻑거렸다.

    그는 요괴가 된지도 거의 백 년이 다 되어갔다. 일찍이 인간족 하나가 군대를 거느리고 전투를 치르는 위용을 보고는 동경하는 마음이 생겨 스스로 장군이라는 별명까지 붙이고 이곳에 몇 년이나 둥지를 틀고 있었지만, 저런 놈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네놈이 실성한 것 아니냐? 본 장군이 이 추로 내리치면 네놈은 묵사발이 될 것이다! 오냐, 내 확실히 가르쳐주마.”

    코뿔소 장군은 심협을 가리키며 으름장을 놓았다.

    “알았으니까 빨리 해봐.”

    심협은 일부러 상대의 심기를 긁었지만, 속으로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만났던 요물들은 스스로 통령(通靈)한 경우가 아니면 인간을 보는 순간 공격해왔는데, 저 코뿔소요괴는 도대체 어떻게 된것인가?

    한편, 코뿔소 장군은 심협의 도발에 약간 노했는지, 귀두대추를 들어 올리며 돌진해왔다.

    쿵! 쿵! 쿵!

    코뿔소 장군의 거대한 몸집이 땅을 디딜 때마다 지진이 일어난 듯 진동했다. 그는 단 세 걸음 만에 심협 앞까지 다가와 커다란 추를 내리쳤다.

    부웅!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강한 압력이 내리 꽂혔다.

    심협은 속으로 움찔했다. 이 코뿔소요괴의 말대로 추에 담긴 힘은 대단했다. 다만 그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추가 자신의 머리를 겨냥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심협은 피할 생각이 없는 듯 가만히 황정경 공법을 체내에서 운공하며 두 손을 머리 위로 교차시켰다. 그러자 두 팔에서는 한 겹 금빛이 빛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심협은 두 팔이 살짝 서늘해지며 세찬 바람이 스쳐 지나는 것만을 느끼게 됐다. 뜻밖에도 코뿔소 장군의 커다란 추가 심협의 두 팔과 한 척도 안 되는 거리에서 그대로 멈춘 것이다.

    “이 인간족 놈아, 난 정말 내려칠 거란 말이다! 여기서 물러서지 않는다면 후회하게 될 거라고!”

    코뿔소 장군은 귀두대추를 들어 올린 채 심협에게 눈을 부라렸다.

    “뭐야, 내려칠 배짱도 없으면서 이런 일을 벌인 게냐?”

    심협은 실로 어이가 없어 피식 웃으며 외쳤다.

    “너, 너……. 좋다, 그럼 날 매정하다고 탓하지 마라!”

    코뿔소 장군은 작게 한숨을 내쉬는 듯하더니 귀두대추를 들어 올려 이번에는 모질게 내리쳤다.

    심협은 두 팔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가 곧장 맞받아쳤다.

    쾅!

    커다란 굉음이 울렸고, 코뿔소 장군은 손에 든 귀두대추가 단단한 바위를 내리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고는 반동에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타타탓!

    코뿔소 장군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뒷발을 맹렬히 구르며 간신히 몸을 가누었다. 그리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승복하겠느냐?”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나, 난……. 인정 못 한다!”

    코뿔소 장군이 이를 악물며 외쳤다.

    “그럼 다시 해볼래?”

    심협이 슬쩍 웃으며 말하자 코뿔소 장군은 대노하여 다시 한번 귀두대추를 들고 돌진해왔다. 이번에는 정말 전력을 다했는지 몸에 푸른빛이 돌았고, 귀두대추에서는 검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심협의 정수리에서는 거센 바람소리가 울렸고, 상당한 진동이 전해졌다. 마치 공기까지도 이 거대한 추에 눌려 요동치는 것만 같았다.

    사실 그는 이 코뿔소요괴의 실력을 어느 정도 짐작했는데, 기껏해야 벽곡 초기의 경지에 불과해 자신에게는 별 위협이 되지 않을 터였다.

    곧이어 심협이 가만히 황정경 공법을 운공하자, 체내 다섯 법맥의 법력도 동시에 움직였고, 꽉 쥔 오른쪽 주먹으로 빛이 모여들면서 손바닥 전체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헙!”

    그는 낮게 기합을 지르며 오른 주먹을 비스듬히 위로 쳐올려 코뿔소 장군의 귀두대추와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쾅!

    엄청난 기운이 주위를 휩쓸었고, 땅에서는 먼지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 둘을 둘러싼 채 구경하던 심가 사람들 역시 너도나도 뒤로 물러났다.

    심협은 조금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훌쩍 몸을 날려 단숨에 코뿔소 요괴 앞까지 다가와서는 팔꿈치로 그의 불룩한 배를 찔렀다.

    퍽!

    “으억!”

    둔중한 소리에 이어 코뿔소 요괴는 신음하며 뒤집힌 돌덩이처럼 바닥을 몇 번이나 구르고서야 멈췄다.

    먼지 구름이 흩어지자, 사람들은 심협이 코뿔소 요괴 옆에 쪼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그의 미간을 가리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손가락 끄트머리로 낙뢰부(落雷符) 한 장을 코뿔소 요괴의 머리에 대고 누르고 있었다.

    “어때, 승복하겠느냐?”

    심협이 웃으며 물었다.

    코뿔소 요괴는 허옇게 눈을 까뒤집은 채 자기 이마에 드리운 부적을 겨우 볼 수 있었다. 그가 목을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

    “강호에 나와 굴러먹던 놈이니 이런 날이 올 줄 진즉 알았지. 죽여라. 이 몸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네놈이 어디서 이상한 책 같은 걸 본 모양이로구나?”

    심협은 그 대사가 어딘지 모르게 귀에 익어 답답한 듯 이마를 짚었다. 많은 민간 소설의 녹림호걸들이 죽기 전에 늘 저런 대사를 했던 것이다.

    “네 이놈! 분명 인간족이면서 몸이 어찌 그리 단단하고 힘은 나보다 더 센 것이냐? 나는 진심으로 승복했으니 죽이려거든 빨리 시원시원하게 죽여라.”

    코뿔소요괴는 사기가 꺾인 와중에도 그렇게 투덜거렸다.

    심협도 더는 그를 놀리지 않고 손과 함께 낙뢰부를 거둬들였다.

    “됐다. 내 언제 널 죽이겠다고 했더냐? 가거라.”

    심협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것은 오히려 심가 사람들이었다.

    “심 선사님, 저놈은 요물입니다. 살려둬서는 안 됩니다!”

    심가의 청년 하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심 도우, 범을 풀어 산으로 돌려보내면 후환이 끝이 없을 겁니다.”

    또 다른 심가의 수사(修士)도 외쳤다.

    여기저기서 죽여야 한다는 말이 빗발쳤다.

    심화원은 눈빛이 약간 어두워졌지만, 아무런 말도 없었다. 심협을 부추기지도, 집안사람들을 말리지도 않았다.

    사실 코뿔소 요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으로 몸을 일으켜 앉아서는 멍하니 심협을 바라보았다.

    심협은 심가 사람들의 외침을 못 들은 척 코뿔소요괴에게 물었다.

    “왜 아직도 안 가는 것이냐? 정말로 죽고 싶은 게냐?”

    “날 안 죽인다고? 왜?”

    코뿔소 요괴는 어찌나 당황했는지 이전까지의 장황한 말투도 집어치우고 물었다.

    “요물이 둥지를 튼 곳 중에 여기처럼 깨끗한 곳이 얼마나 될 것 같으냐? 백골이 켜켜이 쌓여 있고, 살기가 제멋대로 날뛰지 않는 곳이 있더냐?”

    심협은 사방을 둘러보고는 되물었다.

    “내가 깨끗하게 먹었을지도 모르잖아?”

    코뿔소 요괴는 의심의 빛이 역력한 채로 따지듯 물었다.

    “너는 나와 맞붙는 동안에도 움직임 하나하나에 살기가 없었다. 그러니 네가 살인을 즐기는 놈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지. 그만해라. 살려주겠다는데도 떠나려 하지 않다니, 정말 죽고 싶은 건 아니겠지?”

    심협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렇게 말하자, 코뿔소 장군은 마침내 상대가 정말로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말을 믿게 되었다.

    “네놈은…… 아주 이상하구나. 지금껏 만났던 놈들은 능력이 부족하면 살려달라고 빌거나, 능력이 있으면 제멋대로 요괴들을 죽였는데 말이야. 너는 뭔가 이상하다. 어쨌든 오늘 나는 진심으로 패배에 승복했지만, 훗날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난 또 길을 막고 네 것을 빼앗을 테다!”

    코뿔소 장군은 심협을 한참이나 빤히 들여다보고는 그렇게 답했다.

    “좋다. 그럴 능력이 있는지 그때 가서 보자꾸나.”

    심협은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코뿔소 요괴는 두말하지 않고 귀두대추를 들쳐 메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떴다.

    심가 사람들은 심협이 요물을 놓아주는 것을 보고는 수군거렸는데, 의견이 분분했다.

    심협은 해명할 마음이 들지 않아 그냥 심화원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바로 마차로 돌아갔고, 일행은 다시 출발했다.

    * * *

    또다시 보름여가 지났다.

    밤이 되자 인적이 끊긴 산골 마을에 모닥불이 군데군데 피어났고, 심가 일행은 그 속에서 밤을 보냈다.

    지난 보름 동안 그들은 모처럼 안온한 시간을 보냈다. 강력한 요물이나 귀살(鬼煞) 따위를 만난 적도 없었고, 오늘은 하급 요수 두 마리를 잡기까지 하여 지금 그 고기를 구워먹는 중이었다.

    마을 안의 가장 큰 모닥불 옆에는 심화원과 심전 등이 둘러 앉아 있었지만, 심협과 심옥은 보이지 않았다.

    “가주님, 심 선배님과 심옥 누님은 왜 보이질 않습니까?”

    심씨 집안사람 하나가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요괴 고기를 한 덩이 떼면서 물었다.

    “그들은 수행 중이니 방해하지 말거라.”

    심화원이 흐뭇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사실 심옥 뿐만 아니라 심가의 다른 수선자들도 그 동안 심협에게 많든 적든 가르침을 받아 적잖은 득을 보았다. 다만 심옥은 벽곡 중기를 돌파하는 중요한 시기가 임박해 있어 이렇게 고된 수행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한편, 심협은 이미 단전의 금제를 풀어 수련 경지가 응혼 초기의 모습을 회복했고, 지금은 황정경 공법에 언급된 삼성멸마의 신통력을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장수촌에 있을 때는 온갖 잡다한 일에 시달리느라 그 신통력에 대해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수련에는 더더욱 성공하지 못했었다.

    ‘수련 경지를 원래대로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좀 필요하니, 당장 삼성멸마를 수련하는 데 성공한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

    이날 밤, 모처럼 머리 위에 짙은 구름 없이 칠흑 같은 밤하늘을 뚫고 온 하늘에 가득한 무수한 별들을 볼 수 있었다.

    심협은 홀로 마을 어귀의 빈 터에 단정히 앉아 두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평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행할 때와는 달리, 그는 두 눈을 감지 않고 동그랗게 뜬 채 깊은 밤하늘을 응시했다. 그의 두 눈에는 수정 같이 맑은 빛이 반짝여 마치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비추는 듯했다.

    그가 속으로 황정경 공법을 묵상하자, 시야에 보이는 밤하늘도 차츰 변화했다.

    자기 몸이 점점 가벼워져 높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인지, 아니면 온 하늘의 별들이 점점 무거워져 인간 세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인지 심협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단지 자신의 몸이 하늘에 가득한 별들과 합쳐지고 있음을 느낄 뿐이었다.

    그는 문득 사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 온갖 빛들이 점점이 반짝이는 것만 보였다. 푸르거나 붉거나, 밝거나 어둡거나, 멀거나 가까운 온갖 별들이 모두 숨을 쉬는 것처럼 깜박깜박 빛을 발하고 있었다.

    심협은 그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며 갑자기 한없이 작아지는 듯한 느낌이 떠올랐다. 마치 자신도 이 억만 개의 별 중 하나가, 그저 한 알의 먼지가 된 것만 같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호흡을 조절하다가 명멸하는 별과 우연히 숨쉬는 주기가 일치하게 되었다.

    어두워지고 밝아지고, 들이쉬고 내쉬고…….

    순식간에 그는 문득 정신이 들었고, 여전히 땅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머리 위의 은하수에서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무수한 별들의 힘이 변해 만들어진 아주 작은 입자들이 빛다발 아래 먼지처럼 떨어져 내려와 심협의 두 눈 안으로 들어갔다.

    심협은 무의식적으로 두 눈을 감고 싶었지만, 애써 참아냈다.

    그의 두 눈은 마치 두 개의 호수처럼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이슬을 담았고, 그 안에는 놀랍게도 이채로운 별빛이 가득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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