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93화 (193/1,214)
  • 193화. 반선노조(半仙老祖)

    길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심화원은 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옥아, 내 생각에는 저자의 말과 행동 모두 수상한데, 너는 정말 그를 데리고 가려는 게냐?”

    “무얼 걱정하시는지 알아요. 허나 이미 그의 몸을 살펴보셨잖아요. 요사스러운 기운은 조금도 없었지요. 틀림없이 인간이에요. 그의 말과 논리에는 빈틈이 많고, 자신의 내력에 대해 얼버무리긴 했으나, 그가 말한 춘화성 함락 사건에는 거짓이 없었어요. 게다가 제가 반선인 수사가 건업성을 지키고 있다는 말에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함께 가기로 했잖아요. 그러니 요마(妖魔)들의 첩자일 리는 없겠지요.”

    심옥은 진지하게 말했으나, 사실 다른 이유들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일단 그녀 자신도 어째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심협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심화원은 딸이 그렇게 답하자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고개를 돌려 심협이 탄 마차를 멀리 바라볼 뿐이었다.

    “아버지, 걱정 마세요. 가는 길에 제가 잘 지켜볼게요.”

    “그래, 아비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구나. 너는 근 200년 동안 우리 심가에서 난 이들 중에 가장 뛰어난 수사고, 젊은 나이에 노조께서 남기신 공법으로 벽곡기까지 이르렀지. 저자가 첩자라 해도 네 앞에서는 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심화원은 모처럼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가 첩자가 아니라면, 우리로서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어쨌거나 요즘 같은 상황이라면 집안에 수사가 하나라도 더 많은 게 좋으니까요.”

    심옥이 다소 엄숙한 표정으로 말하자 심화원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마차 행렬이 다시 출발하여 건업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한편, 심협은 마차에 홀로 가부좌를 튼 채, 방금 전 나눈 대화를 곰곰이 곱씹으며 힘겨운 세태에 개탄했다.

    그는 잠시 잠자코 있다가 다시 두 손으로 원을 감싸 안는 듯한 자세를 하고는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곧바로 체내의 법력을 움직이려 하지 않고, 시험 삼아 신식의 힘을 운행해보았다. 다행히도 그 금색 빛줄기는 법력만 봉인했을 분, 신식의 힘은 봉인하지 않은 상태였다.

    심협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신식의 힘으로 자기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가 가장 먼저 살펴본 것은 단전이었다. 그러나 보자마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의 단전 안은 금빛 광막(光膜)으로 한 겹 감싸여 있었고, 그 위에는 엷은 금빛 물결무늬가 흐르고 있었다. 그 광막은 아주 얇아 보였지만, 신식의 힘조차 차단되어 안쪽을 들여다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이어서 심협은 다시 단전을 기점으로 법맥 상태를 살펴보려 했다.

    그의 법맥은 단전의 상황과 다를 것 없이 금빛 광막에 한 겹 싸여 있었고, 안에 축적된 법력은 그 안에 갇혀 움직일 수도, 살펴볼 수도 없었다.

    심협은 두 눈을 다시 뜨고 자리에 앉아 숨을 약간 몰아쉬었다.

    의지하던 법력이 사라지니 신식의 힘을 동원하는 것도 힘든 일이라,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몸을 살핀 것만으로도 머리가 부풀어 오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이 금빛 막이 문제인 것 같은데…… 이게 대체 뭔지, 또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군.”

    심협은 미간을 문지르며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됐다. 어차피 갈피를 잡지 못할 바에는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는 수밖에……. 수련을 통해 다시 천지의 영기를 체내로 흡수해서 법력으로 바꿀 수 있는지 시험해보자.”

    그는 무명공법으로 시험해보기로 하고 두 눈을 감은 채 두 손으로 결인했다. 지금은 마차가 달리는 중이라 시냇물을 찾아 수련할 수가 없었고, 부상도 작지 않아 제약이 크다는 점이 아쉬웠다.

    심협이 무명공법을 한 번 운공하자 마차 앞 휘장이 곧 미미하게 떨리며 한 줄기 맑은 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심협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고, 기쁨이 솟아났다. 무명공법의 운공이 영향을 받지 않아 과연 천지의 영기를 끌어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기쁨보다 훨씬 큰 실망이 뒤따랐다. 체내로 들어온 영기는 단전과 법맥에 닿자마자 그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색 빛줄기로 인해 흩어졌다. 아예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으니 온몸을 돌아 법력으로 변할 리가 없었다.

    심협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포기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무명공법을 운공했다.

    그러나 그가 어찌 노력해도 천지의 영기는 끝내 바깥에서만 맴돌았고, 금빛 광막을 뚫고 단전과 법맥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한참 뒤, 심협은 땀에 흠뻑 젖은 상태로 눈을 떴다.

    “무명공법은 먹히지 않는 것 같군. 그렇다면 순양검결은 어떨까?”

    물 속성인 무명공법에 비해 순양검결은 공격력이 강하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심협은 기대를 품은 채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순양보전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심협은 양손의 손가락을 각각 모은 채, 한 손으로는 하늘을, 다른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손목을 합쳐 기이한 검결을 결인했다. 머릿속으로는 쉴 새 없이 순양보전의 구결을 되뇌었다.

    “순수한 양기를 덮는 법은 기(氣)를 정수(精髓)로 만들고, 양기(陽氣)를 강(罡: 북두성)으로 만들어, 영기를 밖에서 받아들이며 정신을 안으로 숨긴다(盖純陽之法, 化氣爲精, 化陽爲罡, 納靈于外, 藏神于內)…….”

    공법을 운공하기 시작하자, 심협은 답답하고 더워지기 시작했다. 순수한 양의 기운이 이동하여 양강정기(陽罡正氣)로 변하려는 징조였다.

    곧이어 마차 안 곳곳의 틈새로 예리한 기운을 띤 맑은 바람이 나와 심협을 둘러쌌다.

    심협의 미간이 곧 실룩이면서 경련하더니, 순식간에 수많은 바늘이 전신의 모공을 찌르는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끊임없이 전해져 왔다.

    하지만 심협은 이런 상황에 오히려 크게 기뻐했다. 금빛 광막의 봉쇄를 돌파하려면 이런 예리한 기운이 필요하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온몸의 조열감(*燥熱感: 덥고 건조한 느낌)이 심해질수록 날카로운 통증도 더욱 커졌으나, 심협은 이를 악물고 견디며 천지의 영기를 체내로 들어오게 했다.

    이번에 심협은 영기를 곧장 단전으로 이끌지 않고, 수소음심경으로 내달리게 했다. 그곳의 금빛 광막 봉인이 단전 쪽보다는 훨씬 얇기 때문이다. 만약 법맥의 봉인조차도 풀 수 없다면 단전은 시도해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

    체내로 들어온 천지영기는 가는 바늘처럼, 또 아주 섬세하고 작은 검처럼 연이어 팔뚝의 경맥으로 몰려들어 두 팔의 피부 아래에서 뚜렷한 두 줄기 광맥(光脈)을 나타나게 했다. 그러자 영기가 체내에 들어올 때보다 더 극심한 통증이 갑자기 덮쳐왔고,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었던 심협은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심 선사님, 왜 그러십니까?”

    휘장 밖에서 젊은 마부가 물었다.

    “나는…… 괜찮소.”

    심협은 가까스로 답했으나, 그 순간 극심한 고통이 더욱 강렬해졌다. 수소음심경 법맥에 있는 금빛 광막은 공격을 받자 세찬 빛을 발하며 연신 힘을 밀어냈고, 순간 반짝하더니 모든 천지의 영기를 없애버렸다.

    ‘아아…… 이번 시도 역시 실패로 끝났구나!’

    심협은 눈을 떴다. 안색은 창백했고, 온몸은 식은땀으로 젖었다. 나무 상자에 기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는 천천히 옷소매로 얼굴의 땀을 닦아내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순양검결은 처음에는 공격력을 지닌 것 같아 보였지만, 천지의 영기만을 사용했을 뿐, 결국 위력이 부족하여 금빛 광막의 봉인을 뚫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다시 황정경을 시도해볼 수밖에……. 만약 이마저도 통하지 않는다면…… 방법이 없다.’

    심협은 속으로 가볍게 탄식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무언가가 퍼뜩 떠올랐다.

    ‘만약 황정경도 소용없다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면 된다! 어쨌거나 여기는 꿈속 세계니까. 이곳에서는 항상 죽으면 다시 태어났지!’

    그렇게 다시 태어나 천염노조의 금광 금제에 당하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법력이 봉인되는 것을 피할 수 있을 터였다. 다만 한 가지 불확실한 것이 있으니, 이미 하루 밤낮이 지난 지금 죽을 경우 과연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만약 다시 태어났음에도 여전히 금광 금제가 걸린 후라면 헛되이 죽은 셈이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죽을 때의 그 무력감과 고통은 결코 좋은 경험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우선은 눈을 감고 쉬면서 회복되기를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 *

    저녁 무렵이 되자 심가의 마차 행렬은 어느 고택의 폐허 안에 멈췄다.

    심협도 마차에서 내려 폐허 속에서 바람을 피할 벽 모퉁이를 찾아 쉬었다. 다만 그는 심가의 다른 사람들과 약간 거리를 두고 앉았다.

    땅거미가 내리자 심화원은 더는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고, 심옥만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을 것을 들고 찾아왔다. 잡곡으로 만든 건병(*乾餠: 수분기 없는 마른 과자 혹은 떡)과 무슨 동물의 고기로 만들었는지 모를 육포였는데, 육질이 거칠면서도 쫄깃했다.

    심협은 진작 벽곡기가 지났지만, 법력이 봉인된 상태라 천지의 영기를 운행하고 변화시킬 수가 없었기에 오랜만에 배고픔을 느꼈다. 덕분에 한 끼를 아주 맛나게 먹었고, 그것만으로도 몸이 상당히 회복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심옥 도우, 이 고기를 먹으니 기혈의 힘이 왕성해지는 걸 보면 요수의 고기겠지요?”

    “그렇습니다. 혈돈수(血豚獸)의 고기입니다. 우리 인간족이 길들이는 데 성공한 몇 안 되는 요수이자 보편적인 식량이지요.”

    심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요수를 길들였다고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요마들이 세상을 멸한 뒤, 하늘과 땅이 크게 바뀌어 인간족만이 아니라 여러 동식물들도 마기에 감염되어 죽었습니다. 그중에는 수많은 작물과 가금류, 가축들도 있었지요. 그래서 인간족 수사들이 각종 하등 요수들을 사냥하여 먹을 것을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허나 사냥이 너무 위험했던지라 결국 건업성의 백가 노조께서 먼저 요수를 길들이자 제안하셨고, 직접 요수들을 조사하고 선별하셔서 길들이기 적당한 것들을 골라내셨지요. 그중 하나가 이 혈돈수입니다.”

    심옥이 한 번 웃더니 말했다.

    “백가의 노조께서 그리 장수하셨다니, 그분은 어떤 경지이시오?”

    심협은 ‘백가 노조’라는 말을 듣자마자 백소천의 응혼기 노조가 떠올랐다.

    “경지요? 앞서 말씀드린 건업성을 지키신다는 반선노조께서 바로 백가의 노조이신 백소천 어르신입니다.”

    “오, 그가 바로 그 반선노……. 그…… 뭐라고 했소? 백소…….”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 급히 물었다.

    “백가 반선노조의 존함은 백소천이십니다. 듣기로는 그분께서 예전에 우리 집안의 심협이라는 조상님과 동문수학하셨다더군요.”

    심옥은 의아해하면서도 웃으며 말했으나, 심협은 완전히 넋이 나가 그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그…… 백소천이 반선노조가 됐다, 이거지? 좋아, 이번에 건업성에 들어가면 내 반드시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 아마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겠지?’

    백소천의 소식에 심협은 한편으로는 부러우면서도 진심으로 기뻤다.

    “심 도우, 왜 그러십니까? 괜찮으신가요?”

    심옥은 심협의 표정이 이상해 보이자 물었다.

    “아, 괜찮소. 그저 좀 감탄했을 뿐이오. 난 언제나 그런 경지에 오를까 싶어서 말이오.”

    “아까는 계속 민망하여 여쭙지 못했습니다만, 심 도우께서는 부상당하시기 전 어떤 수련 경지이셨는지요?”

    심옥은 살짝 머뭇거리더니 물었다.

    심협은 언젠가 그녀가 이 질문을 해올 거라 예상했기에, 망설이지 않고 준비해둔 답을 말했다.

    “난 원래 응혼기 수사였소. 한데 앞서 성에서 큰 전투를 치를 때 천염노조에게 단전의 법맥을 봉인당해 도무지 회복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소. 그러니 지금이야 그저 보통 사람과 다를 게 없지요.”

    “역시나 선배님이셨군요. 전에는 후배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심옥은 예를 한 번 갖추며 말했다.

    “그 무슨 말씀이시오! 목숨을 구해준 은혜가 하늘같은데, 무엇이 무례이며 내 어찌 감히 선배라 자처하겠소?”

    심협은 심옥의 말을 그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따지지 않고 포권하며 예의를 갖춰 화답했다.

    “그럼 후배는 이만 물러갈 테니 푹 쉬십시오. 내일 아침 일찍 계속 길을 서둘러야 합니다.”

    “수고가 많소.”

    심옥의 인사에 심협도 감사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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