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92화 (192/1,214)

192화. 심가의 후손

“일어나셨소?”

중년 남자가 약간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

“구명지은(救命之恩)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심협은 웃으며 포권을 했다.

“세상살이가 얼마나 어렵소. 인간끼리 서로 도와야지. 그리 예의 차리실 필요 없소이다.”

손사래를 치는 중년남자의 눈빛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그때, 젊은 여자가 갑자기 물었다.

“감히 도우의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심협은 그녀의 말을 듣고 눈이 반짝 빛났다. 도우라고 부른 것으로 미루어 이 여인도 분명 수선자일 터였다.

하지만 심협은 금세 의문이 들었다.

“제 몸에는 법력의 파동이 전혀 없는데, 제가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어찌 아셨습니까?”

“도우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어제 도우를 구했을 때는 부상이 지금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 만약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미 열 번도 더 죽었겠지요. 허나 단약도 먹지 않은 상태에서 하루 만에 부상이 크게 회복됐으니 특별한 공법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지요.”

심협은 문득 황정경 수련이 가져다준 이점일 거라는 생각에 속으로 다행이라고 외쳤다.

“제가 어찌 불러드려야 할지 도우께서 아직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심옥은 심협이 약간 넋을 놓고 있자 다시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느라……. 저는 심협이라 합니다.”

심협은 재빨리 덧붙였다.

한데, 젊은 여인은 그 말을 듣고는 의아한 기색이었다. 그건 옆에 선 중년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당황한 쪽은 오히려 심협이었다.

“왜들 그러십니까? 뭐가 잘못됐습니까?”

“아, 별거 아닙니다. 그저 조금 공교롭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 심가에도 심협이라는 선조님 계셨거든요.”

심옥이 웃으며 말했다.

심협은 그 말에 다소 난처해져서는 말머리를 돌렸다.

이후, 심옥은 심협에게 자신과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다.

심협은 그녀의 소개를 다 들은 뒤에야 중년 남자의 이름은 심화원(沈華元)이고, 심옥의 아버지이자 심가의 가주이며,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심씨 집안의 후손들과 객경들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심협을 놀라게 한 것은, 지금 마차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이 젊은 마부를 제외하고 모두 수선자(修仙者)이며, 거의 모두가 연기 초, 중기라는 것이었다. 그들 중 오직 심옥만이 벽곡기 수사였다.

“심 도우, 그대의 말씨를 들어보니 이곳 사람인 듯한데, 고향은 어디요? 왜 그런 부상을 입고 만수하 강가에 누워 있었던 것이오?”

심화원은 약간 굳어진 눈빛과 목소리로 물었고, 심협은 순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모호하게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어제 등평성에서 요수 거충들이 성을 에워싸고 공격하는 바람에 순간 참지 못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구름 속에 숨어 있던 강력한 거충의 공격에 중상을 입고 강으로 떨어져, 어쩌다 보니 이곳까지 떠내려 왔습니다.”

그 대답에 심화원은 안색이 살짝 변했고, 눈빛도 가라앉았다.

심옥도 인상을 찌푸렸는데, 눈에는 의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스쳤다.

다른 사람들도 심협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고, 낮은 소리로 수군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심옥 도우, 어찌 이러십니까? 이 심모의 말이 거짓이라 여기시는 겁니까?”

다소 긴장한 심협의 물음에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한 것은 심화원이었다.

“심 도우가 말한 등평성은 10여 년 전에 이미 요마들에게 함락당해 성이 무너지고 사람들은 사라진 지 오래요. 그 거짓말은 정말이지 좀 허술하구려.”

심화원이 콧방귀를 한 번 뀌더니 말했다.

“뭐라? 그게 등평성이 아니었단 말이오?”

심협이 당황해 되물었다.

“가주, 제 생각에 저자는 요마의 첩자인 듯합니다. 일부러 우리 집안에 섞여 들어 다음 성으로 따라 들어가려는 게지요. 우선 포박하고 봅시다.”

객경인 듯한 사람 하나가 경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일이 대당 경내의 살아남은 성들에서 한두 번 벌어진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심옥이 물었다.

“어제 거충이 성을 공격하는 것을 보았고, 구름 위에는 강대한 요마도 숨어 있었다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구름 속에 있던 이는 이름이…… 이름이 천염노조라는 것 같았습니다.”

심협은 찬찬히 기억을 한 차례 되짚어 그 이름을 떠올리고는 재빨리 말했다.

그 순간, 모든 사람의 눈빛이 그에게로 향했다. 표정도 어딘가 이상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어제 도우가 봤다는 그 성은 등평성이 아니라 춘화성입니다!”

그가 채 묻기도 전에 이미 심옥이 답했다.

“뭐라고요? 거기가 춘화현성이란 말입니까?”

경악한 심협이 외쳤다.

그의 기억 속에 춘화성은 인구가 겨우 10만도 안 되는 작디작은 현성에 불과했다. 어찌 어제 같은 성벽이 높이 솟은 거대한 성일 수 있단 말인가?

“현성? 보아하니 도우께서는 등주에 아주 오랜만에 오신 모양이군요?”

심옥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재변(災變)이 시작된 이후로 와본 적이 없습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답했다.

“그렇다면 이상할 게 없지요. 그해에 등평성이 함락된 뒤, 성에서 피난을 나온 백성들이 춘화성으로 몰려들었고, 사람들이 성에 남게 되어 성 전체를 현재 규모로 확장했습니다. 아마도 다급한 상황에서 잘못 보신 듯하군요.”

심옥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무렵, 심협은 거의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어제 그 성이 정말로 춘화성…… 나의 고향이란 말인가!’

심옥이 결론을 내리듯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서로를 힐끗 쳐다본 후에야 차츰 의심과 염려를 거두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 춘화성은 어찌 되었습니까?”

심협은 머릿속에 피가 강같이 흐르던 성안의 처참한 광경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가 도망 나왔을 때 성문은 이미 뚫려 있었습니다. 성문이 일단 뚫리고 나면 지킬 가능성이 거의 없지요. 요마들은 백성들을 마구 도륙하고 성과 가옥들을 때려 부쉈을 테니, 아마도 초토화되었을 겁니다.”

심옥이 어두운 표정으로 씁쓸하게 말하자 심협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슬픔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잠시 후에야 마음을 추스른 그는 고개를 들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앞쪽에 서 있는 마차 두 대 위에 커다란 검붉은 편액이 하나 묶여 있는 게 얼핏 보였다. 편액 위에는 큼지막하게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심제당(沈濟堂).

심협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심제당? 우리 심가 약방의 이름 아닌가? 어찌 이 무리의 마차 위에 저 편액이……? 설마……?’

돌연 어떤 가능성이 떠올라 심협은 숨이 가빠질 지경이었다.

“심 가주께 감히 여쭙니다. 심씨 일가는 어떤 사업을 하십니까?”

심협이 슬쩍 떠보듯 묻자, 심화원은 왜 갑자기 그걸 묻는지 의아해하면서도 답해주었다.

“우리는 선조이신 원각공(公) 때부터 대대로 약초장사를 하며 줄곧 심제당을 운영해 의술로 세상을 구제해왔소.”

심협은 그 말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으나, 마침내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이 심씨 일가는 아마도 자신의 동생인 심사의 후손이리라. 물론 천 년이나 지난 시점일 것이고,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심협이 다시 생각에 잠기자 심화원과 심옥은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지 서로 눈빛을 한 번 교환하고는 물었다.

“심 도우,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리 넋을 놓고 있소?”

“별거 아닙니다. 그저 인연이란 게 실로 신기하단 생각이 들어서요. 우리 집안 조상님 중에도 의술을 행하셨던 분이계십니다. 허나 그저 떠돌이 의원이셨을 뿐, 가업 같은 건 남기지 않으셨지요.”

“그리 말씀하시니 정말 신기하긴 합니다. 그대와 나의 선조께서 같은 일을 하셨던 데다, 그대는 우리 집 선조와 이름이 같으니 말이오. 아마 이리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운명이었을 게요.”

심화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 말하자, 심협은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 말씀하시니, 심가의 조상이시라는 그 심협 선배님에 대해 관심이 좀 생기는군요. 그분의 생애와 업적을 조금이나마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는 태연하게 물었지만, 마음속은 꽤나 요동치고 있었다. 만약 이 후손들에게서 자신의 생애와 업적을 알 수만 있다면 후에 현실로 돌아갔을 때는 앞날을 아는 것과 같은 의미 아니겠는가?

심화원은 어쩐지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즉답을 피했다. 시원스레 답을 해준 것은 심옥이었다.

“그분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그분은 일찍이 홀로 수행길에 오르셨고, 그 뒤로는 거의 돌아오시질 않았지요. 가족들을 위해 대대로 전해진 공법만 남기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와 같은 후손들은 그분을 더 존경하고 더욱 동경하지만, 도대체 그분께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잘 모릅니다.”

“안타까운 일이로군요. 도우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걸 보면, 그 선조께서 대단한 분이셨나 봅니다. 제가 그런 분과 같은 이름을 가졌다니, 영광입니다.”

심협은 그렇게 웃어 넘겼다.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더 캐물었다가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었으니 자제해야 했다.

“심 도우, 다음 계획은 어떻게 되시죠?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심옥도 웃으면서 물었다.

“휴,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저는 요 몇 년간 산속에 은거하며 속세를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산골짜기에도 요물의 흔적이 나타나 어쩔 수 없이 며칠 전에 등평성으로 향했었지요. 아, 춘화성이군요. 한데 성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요마들의 공격을 만나게 됐으니, 딱히 갈 곳도 없습니다.”

심협은 길게 탄식했다.

“재변 이래로 온 대당 경내에서 인간족이 모여 사는 도시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얼마 전에는 수많은 요마 부족이 각 성들을 침범하여 춘화성이 등주의 마지막 성이 되었지요. 한데 지금은 그마저도 함락되었으니, 우리는 곧장 건업성으로 갈 생각입니다. 그곳이 근처에 남아 있는 가장 큰 인간족 도시거든요. 도우께서도 갈 곳이 없다면 함께 가시지요. 상처도 아물지 않았으니…….”

심옥이 잠깐 망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심옥의 그 말에 심화원의 눈썹이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움찔했다. 그러나 그는 딱히 만류하지는 않았다.

“건업성…….”

심협은 망설이는 듯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속으로는 감개무량한 상태였다. 자신은 천 년 전의 건업성을 얼마 전에 막 떠났었는데, 이제 곧 천 년 뒤의 건업성으로 가게 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건업성은 예로부터 춘화성과 비길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웅장한 성입니다. 그곳의 성벽은 모두 진법사의 법진 가지(*加持: 부처의 힘을 빌려서 병, 재난, 부정 따위를 면하기 위하여 기도를 올리는 일)를 거쳤습니다. 더구나 성에는 인간족 수사들이 운집해 있을 뿐만 아니라, 반선(半仙)노조께서 지키고 계시지요.”

심옥은 말을 마치고는 심협의 표정변화를 자세히 관찰했다.

“허락해주신다면 저도 함께 건업성으로 가겠습니다.”

심협도 더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과거에 그런 엄청난 능력의 수사가 존재한다는 말을 들어보기는 했지만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생겼으니 그냥 지나칠 이유가 없었다.

“좋습니다.”

심옥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리 되었으니, 심 도우는 회복에 집중해주시오. 길을 재촉해야 하니.”

심화원도 분위기가 기울자 결심한 듯 말했다.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심협은 살짝 허리를 숙이며 포권했다.

이후 그들은 떠났고, 마차 지붕 위에 걸려 있던 휘장도 다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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