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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88화 (188/1,214)
  • 188화. 벌레들의 공습

    허탈하게 땅으로 내려온 심협은 낙담한 심정이 되어 어두운 얼굴로 텅 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밤 겪은 일들은 실로 믿기 힘들었다. 조개요괴의 습격이든 푸른 연꽃의 여인이든, 모든 변고가 너무 갑자기 일어나 도무지 받아들일 틈도 없었다.

    섭채주가 잡혀가는 걸 두 눈 뻔히 뜨고 지켜봐야 했던 심협의 마음은 복잡했다. 의문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무력감과 분노가 훨씬 컸다.

    “보타산……. 보타산이라…….”

    그는 그 이름을 몇 번이고 중얼거려보았다. 익숙한 이름이었지만, 도대체 어디서 들어봤는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눈앞의 대웅전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관음전, 보타산……. 거긴 남해 관세음보살의 도량(*道場:부처나 보살이 도를 얻는 곳, 또는 도를 얻으려 수행하는 곳)인 영산(靈山)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의문의 더욱 커졌다. 섭채주에게 도대체 무슨 특별한 점이 있기에 조개요괴는 그녀를 몽유현상으로 유인까지 해가면서 해치려 들었으며, 푸른 연꽃의 여인은 또 그녀를 데려갔단 말인가?

    “남해……. 당장 누이를 되찾아오는 건 불가능해. 훗날을 기약하자. 더 힘을 키워 찾아가마. 기다려 줘, 채주야.”

    심협은 그렇게 탄식하며 현성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머릿속으로는 이 일을 가족들과 섭가에 어떻게 알려야 할지 궁리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 * *

    집으로 돌아간 심협은 부친 심원각과 먼저 이야기를 나눈 뒤, 이 일을 가족들에게는 알리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일의 자초지종이 담긴 친필 편지를 한 통 써서 소춘에게 건넸고, 사람을 시켜 그녀를 운주까지 호송했다. 섭가에서 이를 믿을지 안 믿을지, 어떻게 나올지는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심협은 깊은 피로를 느끼며 침상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워낙 고단했던 터러 금세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 * *

    왁자하고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커지고 가까워졌다.

    심협은 몽롱한 상태로 눈을 떠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낡고 커다란 방에 누워 있었다. 분명 자신의 방은 아니었다.

    천장에는 큼직한 구멍이 몇 개 뚫려 있었고, 벽은 절반이나 무너져 마치 허물어진 절간 같았다. 방에는 진흙으로 만든 신상이 하나 앉아 있었고, 앞에는 감실(龕室: 사당 안에 신주를 모셔두는 장) 하나가 넘어져 있었다. 심협은 지금 감실 바로 옆에 누워 있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사방을 살펴보고는 다시 자신의 몸을 살폈다. 단전 안에서는 세차기 이를 데 없는 액체 상태의 법력이 소용돌이치고 있었고, 식해(識海) 안에는 혼의 힘도 충만하여 사람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꿈속…… 지난번 이후로 2년 만이군. 그전에도 꿈속에 들어온 간격은 들쭉날쭉했지. 규칙 따위는 없는 건가?”

    이미 몇 번의 경험이 있었기에 심협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시끄러운 소리는 바깥에서 들려왔는데, 개중에는 사람들의 고함소리도 꽤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심협은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상황을 살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허물어진 절은 어느 고지 위에 있었는데, 눈길이 닿는 곳마다 평범한 사람들의 도시인 듯 상점이 숲을 이루었고, 길거리는 드넓었다. 동래 현성보다 훨씬 더 번화한 곳인 듯했다.

    동래 현성과 같은 점도 있었다. 이곳 역시 도탄에 빠진 상태로, 사람만 한 시커먼 요충(妖蟲)들이 성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요충들의 몸에는 검은 비늘이 가득했는데, 겉모습은 거대한 개미와 흡사했다. 단지 몸통 가장 앞 끄트머리에는 낫과 같은 거대한 두 다리가 자라나 있다는 점이 달랐다. 몸놀림은 바람과 같았고, 위력은 연기기 요수(妖獸)와 견줄 만했다. 그런 요충들이 도처에서 성안의 백성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동래 현성에서는 적어도 늑대요괴 무리가 성안까지 들어오지는 못했는데, 이곳은 번화했던 성안 곳곳에서 학살이 일어나고 있으니 동래 현성보다 더욱 처참했다.

    하지만 성안에 보통 백성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갑옷을 입은 병사 무리가 손에 긴 미늘창과 철창 등을 들고 피를 뒤집어쓴 채 싸우고 있었다. 또한, 수선자(修仙者)도 적지 않았다. 대부분이 연기기와 벽곡기 경지인 이들은 병사들과 함께 요충들을 막아, 백성들이 성 밖으로 달아나도록 엄호하고 있었다.

    한편, 성 위의 하늘에서는 검은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거대한 먹구름을 이루어 하늘을 절반쯤 뒤덮었다.

    구름 안에서는 기둥 같은 거무스름하고 거대한 무언가가 갑자기 뻗어 나왔는데, 벌레 다리 같았다. 구름 속에 어마어마한 거충(巨蟲)이 숨어 있는 듯했다.

    검은 구름이 미미하게 소용돌이치자 검은 요충들도 구름 속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아래쪽 성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로써 성안의 요충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분명해졌다.

    먹구름 아래 허공에는 백여 명의 수선자들이 떠 있었다. 그들은 온갖 공격을 퍼부으며, 떨어져 내리는 요충들을 죽였다. 동시에 구름 아래로 뻗어 내려온 거충의 발에도 공격을 퍼부었다.

    심협의 신식은 거기까지 뻗치지 않아 허공에 뜬 수선자들의 수련 경지나 겨우 판단할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모두가 응혼기였다. 그러나 구름 속에서 뻗어 나온 거대한 다리는 너무도 억세고 견고해 그들의 공격에도 조그만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거충은 검고 거대한 발을 계속해서 휘두르며 늑대 이빨 같은 시커먼 칼날들을 발사해 허공의 수사들을 공격했다.

    이 칼날은 매우 무거워 보였는데, 산을 깎고 바다를 가를 듯한 위력을 지닌 탓에 수선자들은 연합해야만 겨우 막아낼 수 있었다.

    검은 구름 아래로 커다란 요충들이 30여 마리 더 있었다. 이 검은 요충들은 땅 위의 요충들보다 몇 곱절은 컸고, 요기 역시 훨씬 강해 응혼기 수준이었으며, 등에는 날개도 돋아 있었다.

    이 날개 달린 요충들의 필사적인 공격 때문에 수선자 쪽은 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열세에 처해 있었다.

    허공에서는 콰르릉 하는 굉음이 불시에 들려왔고, 수시로 돌개바람이 성안을 헤집고 다녀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설마…… 또다시 천년 뒤의 세상으로 온 것인가?’

    심협은 말세(末世)와도 같은 광경을 보며 낮게 침음했다.

    그때, 가까이 있던 검은 요충 두 마리가 심협을 발견하고는 피에 굶주린 듯한 눈빛으로 즉시 날아들었다.

    “이제 벌레들도 내가 우스워 보이는 건가?”

    심협은 서늘한 눈으로 손을 들어 손가락을 가볍게 두 번 튕겼다. 그러자 금색 빛 두 줄기가 튀어나가 번쩍이며 두 요충의 몸으로 파고들 듯 흡수됐다.

    펑! 펑!

    두 번의 폭발음과 함께 두 요충의 몸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심협은 하늘의 먹구름을 올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으나, 이내 손바닥을 뒤집어 칠성필에서 비행부를 꺼냈다. 수사들을 도우러 갈 참이었다. 아직 이곳의 상황을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두 눈 뻔히 뜨고 같은 인간의 수난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발밑이 갑자기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가까운 건물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꽈릉!

    곧이어 굵기가 족히 몇 장은 될 법한 붉은 불기둥이 솟구쳐 올라, 가뿐하게 건물을 부수고 집어 삼켰다. 그 뜨거운 열기가 퍼져나가면서 거센 후폭풍을 일으켜 근처의 건물 대부분도 순식간에 파괴됐다.

    심협도 비틀대며 몇 걸음 물러났지만, 곧 다시 몸을 가누었다. 그의 몸에서는 금빛이 번쩍이더니 순식간에 금빛 고리가 생겨나 온몸을 감쌌다.

    한편, 굵직한 불기둥은 쏜살같이 하늘로 치솟아 눈 깜짝할 새에 검은 구름을 찔러 들어갔다.

    치지직!

    검은 구름은 타들어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심하게 떨리더니, 실제로 꽤 많이 불타올랐다.

    그때, 불기둥 옆에 붉은 그림자가 휙 스치더니, 각진 얼굴에 짙은 눈썹, 큰 눈을 지닌 붉은 옷의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그의 주위에는 불처럼 시뻘건 진기(陣旗) 수십 개가 둥둥 뜬 채 법진을 이루며 끊임없이 빙글빙글 회전했다.

    불기둥 안에도 붉은 법진 하나가 어렴풋이 나타나 남자 주변의 진기들과 서로 공명했다.

    적의(赤衣)의 남자는 돌연 심협을 힐끗 보더니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협도 그를 보았다. 상대의 기운은 중후하고 거침이 없었다. 놀랍게도 이미 출규기에 이른 것이 분명했다.

    그때, 성안의 서로 다른 두 곳에서 커다란 소리가 두 차례 들려왔고, 또다시 굵직한 불기둥 두 개가 하늘로 치솟았다.

    세 개의 불기둥은 품(品)자를 이룬 채 검은 구름을 파고들었다. 그러자 검은 구름이 즉시 끓는 물처럼 소용돌이치더니,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구름 속에서 낮은 으르렁거림이 들려왔고, 그러자 흩어지던 검은 구름이 문득 멈췄다. 슬금슬금 다시 모여들 듯한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적의의 남자는 곧장 두 손으로 빠르게 결인해 몸 주위의 법진을 발동시켰다.

    다른 두 불기둥 옆에서도 수사의 그림자가 하나씩 나타났다. 그중 한 사람은 얼굴에 고뇌가 가득한 잿빛 머리칼의 노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풍만한 몸매에 녹색 웃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었다.

    두 사람이 내뿜는 기운 역시 출규기에 이르러 있었고, 법진 하나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세 명의 출규기 수사가 동시에 무어라 주문을 외자, 옆에 붉은 불기둥의 불꽃이 세차게 치솟으며 갑자기 밝아졌다. 그러더니 검기(劍氣) 같은 붉은 빛이 세 불기둥에서 쏘아져 나와 검은 구름으로 파고들며 순식간에 뒤엉켰다.

    쿠르릉!

    검은 구름은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겨 무수한 검은 기운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길이가 족히 수백 장은 되어 보이는 검은색 거충이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몸뚱이는 땅 위의 요충들과 비슷해 개미 같은 모습이었고, 반들반들한 검은 비늘 갑옷이 가득했다. 그러나 몸뚱이 가장 앞부분에는 낫 같은 거대한 발이 네 개나 달려 있었고, 그 위에는 갈고리 같은 거스러미가 돋아 있어 더없이 흉측했다.

    한편, 거충의 몸 뒷부분은 번데기 모양이었는데, 아랫배 쪽에는 꿈틀거리는 구멍 수십 개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벌집 같았다. 그 구멍들에서는 검은 요충들이 끊임없이 기어 나와 지면으로 향했다.

    또한, 몹시도 흉악한 기운이 검은 거충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보는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저 벌레들이 저기서 나오는 거였군. 한데 저 거대한 벌레는 또 무슨 괴물이란 말인가?”

    심협은 섣불리 나서지 않고, 놀란 눈으로 검은 거충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공격!”

    세 출규기 수사들은 다시 한번 결인하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붉은 불기둥 세 개가 다시 한번 빛나더니, 검기 같은 붉은 빛을 줄줄이 쏘아댔다. 이번 붉은 빛은 아까보다 훨씬 적었지만, 대신 더 굵고 날카로웠다.

    깡! 깡!

    붉은 빛이 거충의 몸을 매섭게 베어갔지만, 금속 맞부딪히는 굉음만 울렸을 뿐, 거충의 검은 갑옷은 멀쩡했다. 심지어 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한편, 검은 거충의 번데기 같은 하반신에서 검은 빛이 떠올라 그 위를 베던 붉은 빛을 가볍게 막아냈다.

    “이럴 수가!”

    세 사람은 이 광경에 표정이 급변했고, 심협 역시 눈썹을 치켜 올렸다.

    “흥! 그깟 하찮은 법진 따위로 나를 해치려 하다니!”

    검은 거충이 분노에 차서 콧방귀를 한번 뀌고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네 개의 앞다리 중 세 개를 휘둘렀다. 그러자 검은 초승달 모양의 칼날 세 개가 각각 붉은 불기둥을 하나씩 베었고, 불기둥들은 단숨에 두 동강이 났다.

    뿐만 아니라, 초승달 같은 검은 칼날은 정확히 불기둥 안의 법진까지 단번에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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