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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85화 (185/1,214)

185화. 백발의 노파

심협이 부적을 앞으로 내밀자, 별안간 빛이 번쩍이더니 타는 듯한 열기가 전해져왔다.

‘어찌 이럴 수가! 요기의 근원이 채주였다니!’

심현은 순간 벼락을 맞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섭채주와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맞대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매일 한 번씩은 만났다. 때로는 겨우 몇 마디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온종일 기운이 나기도 했다. 섭채주는 수행도 하지 않아 몸에 전혀 법력의 파동이 없었으니, 요기는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부적이 잘못된 건 아닐까?’

그는 차라리 그게 사실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막 섭채주를 불러 세우려 하는데, 그녀가 별안간 땅을 박차고 솟구쳐 올라 처소 담벼락을 넘어 달빛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결코 평범한 사람의 몸놀림은 아니었다.

심협은 넋을 놓고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도 없었다. 섭채주에게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는 재빨리 섭채주가 멀어져간 방향으로 쫓아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과산부는 계속해서 빛을 내뿜었고, 가까워질수록 그 빛은 더 밝아졌다.

심협은 부적을 소매 안에 챙겨 넣고는 정신을 집중하여 섭채주를 뒤쫓았다.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심부를 나와 현성 문 앞에 차례로 도착했다.

깊은 밤, 현성의 대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문어귀에는 지키는 군졸들이 있어 드나들 수가 없었다.

섭채주는 성문 근처에 다다르자 갑자기 몸을 돌려 성벽을 따라 10여 장을 걸어 군졸들의 눈을 피하더니, 두 손을 성벽 위에 올렸다. 그러더니 두 발로 돌벽 틈새를 밟아 마치 거미와 같은 괴이한 자세로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아주 날랬지만,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이에 이 모습을 먼발치에서 본 심협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몹시도 씁쓸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섭채주는 그 괴이한 자세로도 재빨리 벽을 타넘어 성을 빠져나갔다.

심협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몰래 성벽을 넘었다. 그의 눈에는 땅에 내려선 섭채주가 다시 두 발로, 아까처럼 살짝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이 들어왔다.

심협은 체내의 법력을 빠르게 운공했다. 그러자 발걸음이 바람처럼 빨라져, 성 밖 마차길 옆 수풀에 잔영을 남기며 빠르게 섭채주를 우회해 앞질러갔다.

이어서 그는 민첩한 동작으로 오래된 나무 한 그루를 뛰어넘어 나뭇가지 사이로 숨은 뒤, 저 멀리 걸어오고 있는 섭채주를 지켜보았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섭채주의 뺨이 달빛에 더욱 선명하게 비쳤다. 그런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던 심협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두 눈을 꼭 감은, 평온한 섭채주의 얼굴은 분명 잠든 모습이었다.

‘몽유……. 아니, 누군가 몰래 조종하고 있는 게야.’

심협은 그런 결론을 내리고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섭채주가 요물만 아니라면, 아직 희망은 있는 거니까.

어느덧 섭채주는 심협이 숨은 나무를 지나 마차길을 따라서 성 밖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심협은 섭채주가 향하는 방향을 바라보고는 다시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쪽은 다름 아닌, 바로 원주사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섭채주를 불러 깨우지 않고, 몰래 바짝 뒤를 따라갔다.

원주사에 가까워졌을 무렵, 어디선가 커다란 구름이 흘러와 때마침 달빛을 가렸다. 이에 온 대지가 모두 어둠에 잠겨들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니, 그늘 아래의 원주사는 온통 캄캄하여 장엄했던 불상의 모습은 사라졌고, 절의 지붕 위 비첨(*飛檐: 전통 건축에서 높게 들린 추녀)의 굽은 마루와 그 위에 늘어선 잡상(*雜像: 궁궐이나 절 등의 전각과 추녀마루 위에 놓은 신상)이 밤빛을 더하여 오히려 흉악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섭채주는 절 앞에 이르러, 앞서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괴이한 자세로 담벼락을 타넘어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심협이 몰래 따라가 보니, 섭채주는 이미 앞뜰을 지나 관음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째서 또 여기란 말인가?’

심협은 처음 자신이 섭채주를 찾으러 왔을 때 바로 이 근처에서 그녀를 만났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섭채주는 관음전 앞에 이르러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대전 옆의 회랑으로 돌아가 곧장 후원으로 향했다.

심협이 따라가 보니, 그녀는 어째서인지 멈춰 서서 그를 등진 채 예전 그 우물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역시 뭔가 이상해!’

그 모습을 본 심협은 자신의 추측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됐다.

한데 그때, 섭채주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여전히 눈을 꼭 감은 채로 심협 쪽을 ‘바라보았다’!

심협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즉시 회랑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 순간, 후원 쪽에서 첨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뭔가가 물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심협이 기겁하여 확인했을 때, 섭채주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곧장 달려가 몸을 기울여 보니, 우물 안에 물보라가 일고 있었고, 그 너머로 사람 형체가 물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심협은 깜짝 놀라 두 손으로 기이한 결인을 맺으며 뭔가를 읊조렸다. 그러자 온몸에 반투명한 푸른 빛이 번득였다. 그 위에는 미세한 물결무늬가 희미하게 보여 마치 물로 만든 옷을 한 겹 입은 듯했다.

이는 피수결이지만, 꿈속에서와 차이가 상당해 방어 능력이 어느 정도일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기에, 심협은 우물의 보호 울타리를 넘어 곧장 물속으로 몸을 날렸다.

물에 들어간 순간, 그는 안도했다. 이 피수결의 방어 능력이야 어떻건, 물에 들어갈 때 아무런 기척이 없었고, 심지어는 잔물결조차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최소한 그 효능만큼은 꿈속 세상에서의 피수결과 같았다. 또한 물속에서도 자유자재로 호흡할 수 있었고, 물 만난 물고기 같은 상쾌함마저 느껴졌다.

심협은 몸을 가라앉혀, 물 밑바닥으로 섭채주를 따라갔다. 이 우물은 예상보다 훨씬 깊어, 수십 장이나 들어간 뒤에야 바닥에 이르렀다.

그러나 도착한 우물 밑바닥에는 해묵은 진흙들밖에 없었다.

‘섭채주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의아해하던 그는 갑자기 뒤편에서 물결이 밀려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급히 몸을 돌렸다. 그제야 저 뒤편, 어두운 우물 벽에 사람 허리 높이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심협은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나아가다 보니 갑자기 가로로 난 통로가 차츰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몇 갈래 굽이가 나타났다.

지세(地勢)가 점점 높아지면서 수위(水位)는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고, 종래에는 수면이 완전히 드러났다.

심협은 몸을 감싼 빛을 빌려 바닥에 남은 축축한 발자국이 통로 깊은 곳까지 뻗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발자국을 따라 향 반 개가 탈 정도의 시간을 걷던 그는 갑자기 콧날을 찡그렸다. 공기 중에 심상치 않은, 낯익은 냄새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일전에 그 불광이 나타날 무렵 맡아본 적이 있는 냄새다.’

그때는 그 근원을 찾기도 전에 냄새가 사라졌고, 그도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 냄새가 이 우물 속의 무언가와 연관이 있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냄새는 더욱 짙어졌고, 한순간 식해(識海) 안에 약간의 환각이 일어나기도 했다.

심협은 재빨리 무명공법을 운공했다. 청량한 기운이 곧장 머리로 솟구치자, 환각이 조금 흐릿해졌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소매 안에 소뢰부를 몇 장 쥔 채 다시 나아갔다. 그러나 잠시 생각한 끝에 소뢰부 대신 낙뢰부 한 장을 움켜쥐었고, 그제야 추적을 이어갔다.

어느 순간, 통로가 갑자기 넓어지기 시작하더니 그 너머에서 한 줄기 밝은 빛이 새어나왔다.

피수결을 거둬들이고 조심스레 가까이 가보니, 석실이 하나 있었다.

석실은 문이 활짝 열려 있어 그 안에 돌 탁자가 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아름다운 여인이 그 옆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바로 섭채주였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구부정한 백발 노파가 앉아 있었다. 분홍빛 장포를 입은 데다 귓가에는 진홍색 구슬비녀를 꽂았으며, 얼굴은 온통 쭈글쭈글한 깊은 주름으로 뒤덮인 노파였다. 나이가 족히 아흔은 되어보였다.

한데 노파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섭채주를 빤히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더없이 아름다운 도자기를 감상하는 것 같았다. 노파는 정신을 극도로 집중하고 있어 심협이 엿보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심협은 조심스레 노파를 살펴보았지만, 그녀에게서는 조금의 음살(陰煞)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그는 소매에 숨겨두었던 과산부를 조용히 꺼냈다. 좀 더 확실히 결과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매 밖으로 나온 순간, 놀랍게도 과산부는 화르륵 소리와 함께 그대로 타올랐다.

‘강력한 요기다!’

심협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얼른 몸을 숨겼다.

과산부는 등급에 한계가 있어, 찾아낼 수 있는 요기에도 한계가 있다. 요물이 벽곡 후기보다 강하면 그 요기를 견뎌낼 수가 없어 저절로 타버렸다. 이에 돌 벽에 몸을 바짝 붙인 심협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노파는 적어도 벽곡 후기의 요물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다행히도 노파는 여전히 섭채주만을 보느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고, 심협은 잠시 후에야 다시 방을 조용히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노파가 핏빛 구엽초(九葉草)를 섭채주의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

심협은 화들짝 놀라 튀어나가려 했으나, 구엽초에 독이 아닌 영기가 자욱한 걸 발견하고는 가까스로 참았다.

섭채주의 두 눈은 여전히 꼭 감겨 있었고, 입은 기계적으로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면서 핏빛 영초를 조금씩 씹어 삼켰다. 뒤이어 목구멍이 꿀렁하더니, 영초는 온전히 그녀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녀의 몸에서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짙은 요기가 누르스름하게 솟아올랐고, 점점 더 짙어져갔다.

심협은 이 모습을 보고 막지 않은 것이 약간 후회됐다.

그런데 그때, 섭채주의 입에서 갑자기 고통에 찬 신음인 흘러나왔고, 두 눈도 일순간 번쩍 뜨였다. 곧이어 한 줄기 보이지 않는 기운이 그녀의 몸에서 씻겨 나왔고, 등 뒤로 갑자기 노란 빛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느닷없이 더 짙은 온갖 꽃향기가 퍼져 나왔다. 그 향기는 섭채주의 몸에서 풍겨 나와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던 이상한 냄새를 그대로 덮어버렸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섭채주의 몸 뒤편에서 노란 빛이 세차게 뿜어져 나오더니 나비의 날개 같은 노란색 날개 한 쌍이 펼쳐진 것이다. 날개 위에서는 이따금씩 영롱한 빛의 가루가 아롱지며 떨어져 내렸다.

“됐다! 됐어! 혈맥이 드디어 여물었구나! 캬하하하!”

노파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한편, 섭채주는 진즉 눈을 떴지만, 그 두에서는 생기를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미동도 않고 앉아 있어, 마치 지금 일어난 변화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때, 백발 노파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쳤다. 그리고 그녀의 온몸 위아래로 분홍빛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이내 모락모락 피어올라 온 석실을 가득 채웠다.

심협은 안개를 뚫고 백발 노파가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거대한 몸집의 분홍빛 조개요괴가 되어 양쪽 껍질을 벌렸다가 다물어 섭채주를 집어삼키려 했다.

“안 돼!”

심협은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불쑥 튀어나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치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낙뢰부가 갈라졌다.

꽈릉!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부적이 갈라진 곳에서 팔뚝 굵기의 하얀 번개가 나타나, 눈부신 번갯불과 함께 커다란 조개에 내리 꽂혔다.

쿠르릉!

온 석실이 크게 울렸고, 방 안에는 분홍빛 안개가 미친 듯 휘몰아쳤으며, 무수한 번개가 사방에 내리꽂혔다.

심협은 한 손으로 섭채주의 손목을 잡고 세차게 당겨 그대로 석실을 나온 뒤, 고개도 돌리지 않고 통로로 뛰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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