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이상한 일
섭채주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눈앞의 심협이 갑자기 점점 커져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그녀의 눈을 조금씩, 조금씩 채우려는 것처럼.
곽곤은 말없이 용 파파를 들쳐 업은 채 섭인북 무리와 함께 심가를 떠났다.
헤어질 무렵 섭인북은 섭채주에게 “넌 이제 섭가의 여인이 아니다”라는 한마디만을 남겼다.
* * *
여러 소란을 겪으면서 섭채주와 심협은 오히려 훨씬 가까워졌다.
심협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같이 수련을 하고 부적을 그렸으며, 한가할 때는 섭채주와 함께 근처 산천을 유람하기도 했다. 그들은 점점 하늘이 맺어준 완벽한 한 쌍처럼 보였다.
그러나 때때로 혼자 있을 때, 섭채주는 울적해지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가족들의 처지가 걱정되기도 했다.
이를 눈치챈 심협은 그녀에게 함께 운주에 다녀오자고 청했으나, 섭채주는 그가 자신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차마 두고볼 수 없어 완곡하게 거절했다.
눈 깜짝할 사이 또다시 석 달 남짓이 흘렀다.
심협의 무명공법 수련은 그리 큰 발전이 없었지만, 사월보는 일취월장하여 이제 시전할 때마다 달그림자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몸의 윤곽이 어렴풋이 아른거릴 정도였다.
한밤중, 심협이 방에서 부적을 그리고 있는데, 누군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섭채주가 첨탕(*甜湯: 녹두, 팥 등을 넣고 끓인 달달한 국물음식) 한 그릇을 받쳐 들고 문 밖에 서 있었다.
“요 며칠 줄곧 늦게 주무시는 것 같아서요. 운주의 별미인 홍두첨탕(*紅豆甜湯: 단팥을 넣고 끓인 첨탕)을 좀 끓였는데,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섭채주가 두 손으로 탕 그릇을 건네며 말했다.
“입맛에 안 맞을 리가 없지. 들어와. 들어와서 얘기하자.”
심협은 몸을 옆으로 돌려 길을 터주며 말했다.
“아직 바쁘실 테니 들어가지 않을게요. 다만…… 오라버니께 며칠이라도 시간이 있다면, 성 밖으로 답청(*踏靑:봄에 파랗게 난 풀을 밟고 거님)을 가면 어떨까요?”
섭채주는 탁자 위에 어지러이 널려 있는 황지를 힐끗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좋아. 마침 춘삼월 봄날이니 성 밖 영정곡(靈丁谷)에 눈도 다 녹았을 거야. 홍벽파담(泓碧波潭) 근처 풍경이 좋으니, 모레 같이 가자꾸나.”
심협은 잠깐 생각해보고는 말했다.
“응, 그럼 약조한 거예요. 오라버니,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일찍 쉬세요.”
섭채주가 행복한 듯 활짝 웃으며 말하자, 심협 또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떠난 뒤, 심협은 첨탕을 마셨다. 달콤하지만 물리지 않는 맛이 입맛에 꼭 맞아 단숨에 전부 들이켜 버렸다.
탕 그릇을 내려놓고,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다음 다시 탁자 앞으로 돌아갔다. 이어서 붓을 들어 주사를 찍은 다음, 아까 절반가량 그렸던 부적을 치워버리고 새로운 황지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평평하게 깔았다. 그리고는 정신을 집중해 법력을 움직여 부적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붓에서 푸른 빛이 번득이는가 싶더니, 붓에 묻은 주사가 붓끝을 따라 부드럽게 미끄러져 움직였다. 그러자 과산부 한 장이 차츰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석 달간 심협은 소뢰부보다는 과산부를 그리는 연습을 했다. 비록 등급이 높은 부적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성공률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러나 노력은 뜻있는 자를 저버리지 않는 법. 거듭된 시도는 헛수고가 아니었다. 지금 그가 그린 과산부에는 비록 신광이 다소 부족했지만, 담력과 기백은 이미 충분했다.
그가 용처럼 거침없이 붓을 움직이자, 온전한 모습의 과산부가 마침내 성공적으로 완성됐다.
심협이 붓을 떼기가 무섭게 묵적이 아직 마르지도 않은 부적에서 문양이 번쩍이더니 붉은 빛을 발했다.
“성공인가?”
심협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재빨리 부적을 집어 들고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적은 그의 손에 닿은 지 불과 두세 번 호흡할 시간밖에 되지 않아 환하게 한 번 번득이더니 다시 어두워졌다.
“여전히 깊이가 좀 모자라는군.”
심협은 혀를 차며 자조했다.
그는 이미 망쳐버린 부적을 들어, 붓을 움직인 흔적을 꼼꼼히 살피며 흠결을 찾았다. 그렇게 잠시 들여다본 뒤, 그는 다시 황지를 하나 가져다 부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 * *
이튿날 점심 무렵. 심가의 하인 하나가 총총히 대문 밖에서 달려 들어와 섭채주에게 편지를 한 통 전했다.
편지를 열어 훑어보던 섭채주의 안색이 순간 돌변했다.
“아씨, 왜 그러셔요?”
시녀 소춘이 걱정되는 듯 물었다. 그러나 섭채주는 편지를 손에 쥔 채 한동안 말이 없다가, 한참 후에야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집에서 보내온 편지야. 내가 도망친 일로 태수부에서 우리 가족에게 화풀이를 했구나. 운주 곳곳에 있는 우리 가게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는구나.”
“어엿한 태수부에서 그리 행동하는 건 너무 염치없는 것 아닙니까?”
소춘은 분노에 가득차 씩씩댔으나, 섭채주는 그 말에 그저 조용히 고개만 저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씨……. 운주로 돌아와 혼인하라고 재촉하시는 건가요?”
소춘이 걱정되는지 슬쩍 물었다.
“아니. 편지에 그 일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어. 허나…… 하아…….”
섭채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아니면 서방…… 아니, 심 공자님과 상의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안 돼. 오라버니께 알려서는 안 돼. 다시 그분을 끌어들일 수는 없어. 오늘 저녁을 먹고 밤사이에 현성을 떠나 운주로 돌아가자꾸나.”
“알겠습니다.”
소춘은 잠깐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난 귀중품들을 챙길 테니, 넌 저잣거리에 가서 마차 한 대를 구해 오거라. 길에서 먹을 건량도 준비해 마차에 실어두고. 오늘 저녁에 바로 떠날 거야.”
섭채주가 잠깐 생각해보더니 또다시 소춘에게 당부했다.
소춘이 분부를 받고 재빨리 방을 떠나자 섭채주는 탁자 앞에 돌아가 앉아서 다시 한번 편지를 읽어보았다. 그리고 편지를 다 읽은 후에는 종이와 붓을 꺼내놓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뭔가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자 섭채주는 심가 식구들과 저녁밥을 먹었다. 그리고 산책을 좀 하겠다 말하고는, 함께 가자는 심협의 제안을 완곡히 거절하고 미리 써 놓은 서신을 남겨둔 채 소춘과 함께 떠났다.
* * *
이튿날 새벽, 심협은 일찌감치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약속한 대로 섭채주를 찾아갔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가볍게 방문을 두드렸다.
“채주야, 일어났느냐?”
그는 문을 두어 번 두드리고 불러보기까지 했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자 심협은 의아함이 들기 시작했다.
‘채주는 잠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오늘은 늦잠을 자는 겐가?’
심협은 조금 더 세게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몇 번이나 섭채주를 불렀으나, 끝내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뭔가 잘못 됐다!’
심협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방문을 열고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런데 그때,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서방님, 잘 주셨어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소춘이 흐리터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게냐?”
심협이 다소 무안한 듯 물었다.
“오라버니, 오늘 제가 몸이 좋지 않아 방에서 쉬려 합니다.”
섭채주의 목소리도 방안에서 들려왔다. 조금 기운이 없는 것 같았다.
걱정이 된 심협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냐? 나도 의술을 좀 아는데, 괜찮다면 내가 좀 봐줄까?”
“번거롭게 그러실 것 없습니다. 그저 어젯밤에 잠을 좀 설쳤을 뿐이니 반나절만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마음 놓으시지요.”
섭채주의 말에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푹 쉬거라. 내 기운이 날 만한 탕을 좀 끓이라고 주방에 일러둘 테니, 일어나면 바로 마실 수 있을 게다.”
“감사합니다, 오라버니.”
심협은 섭채주의 인사를 들으며 떠나갔다.
잠시 후, 재빨리 방문을 닫아 건 소춘은 잰걸음으로 다가가 침상에 걸터앉은 섭채주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아씨!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우린 분명 어제 떠나지 않았습니까?”
섭채주도 의문이 가득했다. 어제 저녁 그녀들은 분명 마차를 타고 성을 나섰다. 한데 어찌된 일인지, 아침 일찍 눈을 떠보니, 하나는 침상에 눕고 다른 하나는 탁자 위에 엎드린 채 자고 있었다.
“서방님께서 알아채신 건 아니겠지요? 무슨 법술 같은 걸 써서 우릴 돌아오게 하셨다거나…….”
소춘은 넋이 나간 듯, 심협을 서방님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다행히도 섭채주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그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내가 남겨놓은 편지는 아예 뜯지도 않았으니, 우리가 떠나려는 걸 모르셨을 게야. 더구나 아까 그분의 반응을 보면, 절대로 그분이 한 건 아니야.”
“그럼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입니까?”
소춘은 혼란스러운 듯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은 채 말했다. 그러나 당황스럽기는 섭채주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하자. 이따 다시 한번 저잣거리에 다녀오거라. 우리 마차가 아직 있는지 보고, 만약 없다면 다시 한 대를 마련해 와. 오늘 저녁 다시 떠나자꾸나.”
“알겠어요, 아씨.”
소춘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금세 며칠이 지나갔다. 그 사이 섭채주와 소춘은 세 번이나 야밤을 틈타 춘화현성을 떠나려 했으나, 매번 다음 날 아침이면 기묘하게도 심가에 되돌아와 있었다.
이쯤 되자, 섭채주도 이제 심협이 몰래 수작을 부린 건 아닐까 의심하게 됐다. 그러나 진실은 알 수 없었고, 세 번이나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노잣돈도 적잖이 써버렸기에 잠깐 계획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심협은 전과 같이 방에서 부적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됐다! 성공이야! 하하하!”
심협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수개월 동안 고생한 끝에 드디어 과산부 한 장을 그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부적을 눈앞까지 들어 올린 채 자세히 뜯어보았다. 종이 위의 부적 문양은 하나로 연결되어 거침이 없었고, 담력과 기백이 충분했으며, 신운(神韻)이 두루 갖춰져 있어 부적의 형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부적을 위로 훑고 아래로 살필수록 기쁨이 차올랐다.
이 과산부는 그가 현실 세계에서 배우고 그리는 데 성공한 첫 부적이었다. 비록 등급이 높지는 않지만, 심협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한데 부적을 한참이나 빤히 들여다보던 심협의 안색이 급변했다. 부적을 그린 지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도 붉은 빛이 사그라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은 것이다.
“설마…… 요기가 있는 것인가!”
심협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손에는 과산부를 끼운 채 뛰쳐나갔다. 그리고는 뜰에 서서 사방을 잠깐 살폈다. 부적을 앞마당 쪽으로 향하자 표면의 붉은 빛이 더욱 다급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우리 심부 안에 요기가 나다니!”
심협은 크게 놀라 부적을 손에 끼운 채 황급히 달려 나갔다. 앞마당에 가까워질수록 부적의 빛은 더욱 밝아졌다.
한데 놀랍게도 섭채주의 처소를 지나갈 때 부적의 빛이 갑자기 잠시 멈추는 듯하더니, 이내 배는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심협은 깜짝 놀라 즉시 처소로 달려 들어갔다.
그가 뜰에 도착해보니 섭채주가 담장 앞에서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녀의 어깨는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는데, 꼭 술에 취한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