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인정을 베풀다
“뭘 믿느냐고? 당연히 나 자신을 믿지 무얼 믿겠는가!”
심협은 화가 난 와중에도 평소의 성품대로 차분하게, 그러나 힘을 실어 나직하게 외쳤다.
“호오, 그래. 참 잘도 지껄이는 후배님이시구먼. 웃어른을 몰라보고 오만방자하게 굴면 말로가 어떤지 오늘 이 늙은이가 네놈에게 제대로 가르쳐줘야겠다.”
“허! 선배면 선배답게 굴 것이지 후배를 핍박하기나 하고……. 당신은 나이만 믿고 뻔뻔하게 구는 모양이군? 그게 선배이자 웃어른이 할 일인가?”
용 파파는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신랄하게 대꾸하는 심협의 말에 마침내 분노가 극에 달하자 오히려 쿡쿡 웃었다. 그러더니 어느새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는데, 척 보기에도 공격을 하려는 게 분명했다.
“용 파파, 아니 됩니다! 연기 후기 수사이신 용 파파께서 손만 휘두르셔도 그 위력이 천둥번개와 같은데, 저 녀석이 한 수나 견딜 수 있겠습니까? 새파랗게 어린 놈 하나 때문에 손을 쓰시면 공연히 용 파파의 명성만 해치게 될 겁니다.”
곽곤이 황급히 뜯어 말렸다.
“아니 되오! 내 아들이 나이가 어리고 경솔하여 용파파를 노엽게 했으니, 용 파파께서는 너그러이 이해해주십시오.”
심원각은 연기기니 뭐니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까 보여준 힘만으로도 저 노파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기에 아들을 보호하고자 나섰다. 그 목소리의 절박함은 심금을 울릴 정도였다.
“흥! 애송이 하나 상대하는데 이 늙은이가 온 힘을 다할까보냐?”
용 파파는 사람들이 말리자 오히려 더욱 기고만장해져 콧방귀를 뀌었다.
그때, 심협이 더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툭 던졌다.
“늙은이, 내 당신을 이기면 더는 누이를 몰아세우지 않겠다 약속하겠소?”
“뭐라! 나를 이기겠다? 하하하! 오냐, 좋다. 네가 할 수만 있다면야 얼마든지 그 원을 들어주마!”
용 파파가 껄껄 웃으며 그리 말하자, 섭인북은 말없이 지켜보기로 했다.
“이놈아, 제발 천지분간 좀 하란 말이다!”
곽곤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는데, 사실 심협은 그런 곽곤의 말에 오히려 그에게 호감이 생겼다. 그가 앞서 용 파파의 경지를 이야기 한 것도, 지금의 성난 질책도, 사실은 심협을 살리기 위함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심협의 나이에는 연기기 중기만 되더라도 제법이라는 소리를 들을 터이니, 연기 후기인 용 파파에게 이길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할 테니까.
“협아…….”
둘째 부인도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심협을 말리려 했다.
한데 어째서인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절박하게 애원하던 심원각이 더는 심협을 말리지 않았다. 그는 아들의 성격을 아주 잘 알았다. 자신이 아는 아들이라면 언제나 현실적인 판단을 할 터. 감정적인 싸움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가 먼저 싸움을 건 이상, 아마 자신이 있는 게 분명하리라.
그때, 갑자기 섭채주가 심협을 막아서며 말했다.
“오라버니, 안 돼요! 제 혼인은 누구도 대신 결정할 수 없어요. 제가 시집가고자 하면 누구도 막을 수 없고, 제가 원하지 않으면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고요!”
그녀는 평소의 온화한 모습과는 달리 진중하고 단호한 모습이었다.
“흥! 아버지의 명을 따르지 않고 대세도 모르는 계집아, 우리 공자가 너를 마음에 들어 한 것은 네 복이다. 그러니 천지를 모르고 나서지 마라!”
용 파파는 그런 섭채주를 보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저의 박복함을 용서하십시오. 귀댁 태수부에는 시집가지 못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명이면 당연히 따르겠으나, 이 일은 제 뜻과 어긋나니 죽을지언정 따를 수 없습니다.”
섭채주의 말에 사람들은 일제히 안색이 변했다. 심협조차 그녀를 다시 보게 됐고, 눈은 감탄으로 빛났다.
“채주야, 때로는 말로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허나 안심하거라. 저 할멈의 못된 버릇을 내 제대로 고쳐줄 터이니.”
심협은 다른 사람들을 등진 채 섭채주에게 조용히 말했다.
“정말입니까?”
섭채주가 반신반의하며 묻자,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씩 웃어 보였다.
섭채주는 그 모습을 보고서야 입을 꾹 다물고 더는 뭐라 말하지 않았다.
“여긴 너무 좁으니 뜰로 나갑시다.”
말을 마친 심협은 답도 기다리지 않고 앞장서서 대청 밖으로 걸어 나갔다.
용 파파는 지팡이로 바닥을 한번 짚고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나머지 사람들도 이를 보고는 잇따라 대청을 나섰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춘과 복백 등도 그들을 따라 뜰 주위를 둘러쌌다.
뜰 한가운데에는 사람 허리 높이의 커다란 물항아리가 있었는데, 놋쇠를 부어 전체를 만든 것이었다. 양옆에는 사나워 보이는 사자가 고리를 물고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안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으며, 그 위에는 마른 수련 잎이 하나 떠 있었다.
심협은 항아리 가장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수면에 규칙적으로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넌 춘추관의 수사가 아니냐. 한데 어찌 수법(水法)을 수련한 것이지?”
용 파파가 그와 몇 장 거리를 떨어진 곳에서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알 것 없소.”
심협은 웃으며 짧게 대꾸했다.
“흥! 날 속이려고 허튼 술수를 부린 게로구나!”
용 파파는 콧방귀를 뀌고는 지팡이로 바닥을 세차게 찍었다. 그러자 형체 없는 기운이 그녀의 발밑에서 들썩이더니 바닥의 흙먼지를 쓸어 올리며 사방으로 돌진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흙먼지 폭풍이 달려들자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심협은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옷소매를 휙 휘저었다.
그때,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위험해!”
아직 흩어져 사라지지 않은 흙먼지 속에서 갑자기 누르스름한 빛이 한 줄기 번뜩이더니, 그 안에서 검신(劍身)만 있고 자루는 없는 이상한 비검이 나타나 심협의 얼굴을 향해 곧장 날아왔다. 검신은 돌로 된 듯 표면에 암석 무늬가 어렴풋이 보였고, 꼬리부분에는 노란 부적이 한 장 붙어 있었다.
“부기!”
이 광경에 곽곤이 가볍게 외쳤다. 비검은 놀랍게도 부기였던 것이다. 동시에 곽곤은 이제 심협에게 동정심까지 생겨났다. 용 파파가 처음부터 부기를 꺼냈으니 심협에게는 일말의 가능성도 사라진 것이다. 어쩌면 용 파파는 살심이 동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협은 침착했다. 그는 몸을 옆으로 돌려 가볍게 검날을 피하고는 손으로 검 끝부분의 허공을 휘어잡았다.
그 순간, 물항아리 안에서 물줄기가 솟구쳐 나와 푸른 빛을 띤 커다란 손으로 변하더니, 그 괴상한 부검(符劍)을 움켜잡았다.
“헛!”
이 상황이 의외인지, 용 파파는 다소 당황한 듯하더니 곧장 손바닥을 뒤로 세차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이상한 부검이 격렬하게 떨렸고, 표면에 노란 빛이 진동하며 뿜어져 나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물로 만든 커다란 손과 충돌했다.
퍼펑!
요란한 소리에 이어 검신은 곤경을 벗어나자마자 허공을 가르며 다시 심협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 왔다. 노란 빛으로 변한 비검의 각도는 더욱 빈틈없이 예리했고, 수직으로 심협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 찔렀다. 속도 역시 더욱 빨라졌다.
섭채주와 심원각을 비롯한 모든 사람의 낯빛이 긴장으로 굳어진 순간, 정작 심협은 여유롭게 한 손을 들어 정수리 위에서 슬쩍 밀어냈다. 그러자 손바닥 앞에 물이 응결되며 푸른빛의 물 방패가 만들어졌다.
쩡!
굉음과 함께 노란 빛은 물 방패에 가로막혔다.
“어수지술(御水之術)만으로 부기의 공격을 막아내다니…….”
곽곤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수행자인 곽곤은 저 유약해 보이는 비쩍 마른 청년이 보통이 아님을 단숨에 알아차렸다.
바로 그때, 심협의 정수리 위에 있던 부기의 압력이 갑자기 풀어졌다. 이에 퍼뜩 의심이 든 심협이 급히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니, 별안간 발아래에서 푸른 벽돌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덩굴 같은 자줏빛 나뭇가지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그의 가슴팍을 향해 불쑥 파고들었다.
심협이 흠칫 놀란 순간, 그이 발아래로 달그림자 같은 세 개의 빛 무늬가 홀연히 번득였다. 뒤이어 찔러 들어오는 나뭇가지의 공격을 피하는 그의 몸 위로 잔상이 빠르게 스쳤다.
펑! 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자줏빛 나뭇가지가 황동 물항아리를 꿰뚫으면서 그 안에 담긴 물이 콸콸 쏟아졌다.
이쯤 되니 용 파파가 심협에게 분명 살의를 품고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모질게 공격할 리가 없지 않은가.
“오라버니, 그만하세요!”
섭채주가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심협은 말없이 섭채주에게 웃어 보이더니, 용 파파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그의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심협과 눈이 마주친 순간, 용 파파는 어째서인지 덜컥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오히려 자줏빛 지팡이를 움켜쥐더니 세차게 들어올렸다. 그러자 지팡이 끝에서 생겨난 자줏빛 나뭇가지가 갑자기 땅속에서부터 끌려 나와 잘 정돈된 정원에 깊은 고랑을 새겼다.
콰르릉! 펑!
요란한 소리가 이어지면서 땅 위의 벽돌들도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튀면서 먼 곳에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날아갔다.
곽곤은 재빨리 몸을 날려 섭인북 앞을 막아섰다. 날아온 돌덩이가 마치 높은 담벼락처럼 그의 몸을 내리쳤다. 다른 사람들은 거리가 있어 미처 보호해줄 수가 없었다.
한데 그때였다. 또다시 희미한 빛이 번뜩이더니 어렴풋한 그림자가 심원각과 사람들 앞을 재빠르게 오가며 그들에게 날아오는 돌덩어리들을 모두 막아냈다.
당연히 심협이 막은 것이다. 몇 차례 전투와 끊임없는 수련을 거친 뒤 그의 사월보는 제법 성과를 거둔 상태였다.
“제주를 다 부린 모양이니, 이제 내 차례요!”
심협은 눈에 노기를 번뜩이며 사납게 소리쳤다. 그는 더 이상 체내 법력의 흐름을 억지로 통제하지 않았고, 이에 그의 몸에서는 강력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용 파파는 안색이 돌변해 다급히 지팡이를 몸 앞으로 거두어 들였다. 그러자 지팡이 끝에서 뻗어 나온 나무 덩굴이 즉시 허공에서 자줏빛 커다란 그물을 이루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다.
그런데 그녀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아까 커다란 물항아리가 깨지면서 흘렀던 물들이 어느새 조용히 그녀의 발아래로 모여든 것이다. 이어서 갑자기 위로 솟구치며 커다란 덩굴 그물 틈으로 파고들어 가닥가닥 물의 밧줄로 변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헛!”
용 파파는 뭔가 잘못됐음을 느끼고는 재빨리 두 손을 결인하여 몸에서 빛을 내뿜으며 물 밧줄을 풀어보려고 했다.
바로 그때, 별안간 그녀의 머리 위에서 성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가랏!”
뒤이어 황지 부적 3장이 하늘의 세 방향에 각각 떨어져 내리며 빛을 발했다.
꽈르릉!
세 번의 우렛소리와 세 줄기의 맹렬한 번개가 용 파파에게 내리 꽂혔다.
파지직!
“끄아아아!”
하얀 번갯불이 물 밧줄을 타고 순식간에 용 파파의 온몸을 휘감으면서 그녀의 입에서는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비명은 금세 뚝 그쳤다.
사람들은 모두 아연실색하여 넋이 나가버렸다.
용 파파가 펼쳐 놓았던 커다란 자줏빛 그물이 서서히 오그라들면서 그녀의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 그녀의 몸 여기저기에는 새카맣게 탄 자국이 생겨났고, 눈은 허옇게 뒤집혀서 이미 혼절한 상태였다.
섭인북은 이 광경에 화들짝 놀라 헐레벌떡 달려왔고, 곽곤도 즉시 달려가 용 파파를 부축해 일으켰다.
“안심하시오. 급소는 피했으니 그저 혼절한 것뿐이오.”
심협이 차디찬 목소리로 말했다.
“인정을 베풀어 주어 고맙네.”
곽곤은 경지가 높진 않았으나, 방금 심협의 일격이 분명 사정을 봐준 것임을 눈치챘기에 즉시 깍듯하게 포권을 했다.
“이미 승부가 났으니 계속 손님으로 계시고 싶다면 우리 심가에서 연회를 준비하겠소. 허나 그게 아니라면 알아서 떠나시오. 멀리 배웅하지 못함을 양해하시길.”
이런 결과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섭인북은 안색이 더욱 안 좋아졌다.
“차라리 자네가 졌다면 모를까, 기어이 이긴 걸로도 모자라 용 파파까지 다치게 했으니 뒤처리가 걱정이군. 이제 심가와 우리 섭가 모두 골치 아프게 됐네.”
그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노파가 저를 죽이려 들었을 때는 어찌 입도 뻥끗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제가 저 노파의 손에 죽었다면 아마 섭 숙부께서는 그저 혀나 한번 끌끌 차고 마셨겠지요?”
심협은 심사가 뒤틀려 신랄하게 비꼬았으나, 섭인북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심협은 그 말을 끝으로 가족들 곁으로 다가가 환하게 웃었다.
심원각은 지금까지와 달라 보이는 아들을 보며 몹시 흐뭇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