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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82화 (182/1,214)
  • 182화. 불청객

    심협과 섭채주가 심부에 도착해보니, 대문 밖에 호화롭게 치장한 마차 3대가 서 있었다. 그 옆에는 검은 옷에 허리에는 칼을 찬 청년 둘이 지키고 서 있는 것이 멀리서부터 보였다.

    ‘무슨 일이지?’

    심협은 내심 걱정이 되어 먼저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문어귀에는 복백이 두 손을 비비며 초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대공자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복백은 심협을 보자마자 바로 달려와 맞이했다.

    “복백, 무슨 일이 있소?”

    심협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복백은 소춘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려오는 섭채주를 힐끗 본 후에야 말했다.

    “섭가 사람들입니다. 그네들이 섭 소저를 쫓아왔습니다요.”

    “복백, 우리 아버지께서 오셨나요?”

    섭채주가 안색이 약간 변해 물었다.

    “말을 들어보니 아씨의 숙부라 하더이다. 한데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요.”

    “가자. 가서 보고 이야기 하자꾸나.”

    심협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심부의 접객실에는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미간에는 세로주름이 패인 중년 남자 하나가 왼쪽 책상 옆에 앉아 있었다. 한 손으로는 의자 팔걸이를 잡고, 다른 한 손은 책상 위에 올려놓은 그의 표정은 무척 자연스러웠다.

    그의 옆에는 자색 옷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장정 하나가 있었는데, 주변을 훑어보면서 간간이 입꼬리를 슬쩍 잡아당겨 웃는 것이, 주변 장식이 조잡하다고 비웃는 듯했다.

    그 맞은편에는 심원각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은 꽤나 엄숙했지만, 눈으로는 주인석을 힐끔거렸다.

    그는 심씨 일가의 가주였음에도 주인석에 앉지 못했다. 진홍색 비단 옷을 입은 백발의 노부인이 진즉 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들 일행이 신분을 밝히고 대청에 들어온 뒤로 그 노부인은 자연스레 주인 자리에 앉았고, 그 과정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심원각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몸이 조금 굽은 이 노부인은 어떤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모를 자색 지팡이 하나를 짚고 있었는데, 은빛 머리칼은 한 올도 남김없이 머리 뒤로 모아 둥글게 틀어 올린 상태였다. 얼굴에는 종횡으로 골짜기 같은 주름이 가득하여 마치 엄격한 늙은 궁녀 같아 보였다. 그녀는 자리에 앉은 뒤로 두 눈을 감았고, 입을 열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때, 둘째 부인이 직접 차를 받쳐 들고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섭가 사람들이 춘화현에 찾아온 것은 사돈을 맺기 위함이라 여긴 까닭에 얼굴 가득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사람들에게 차를 나눠주고 막 입을 열려던 그녀는 심원각이 자신에게 눈짓하는 것을 보았고, 그제야 대청의 분위기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고는 조용히 남편 옆에 앉았다.

    “심형. 나도 우리 요구가 예법에 좀 안 맞는다는 건 알고 있소. 허나 두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맺은 혼약은 그저 두 아녀자가 사사로이 정한 것이고, 우리 형님과 그대 모두 각 집안의 주인으로서 분명히 허가한 적이 없오. 그러니 이는 진정한 혼약이라 할 수도 없지. 그대가 고개를 끄덕여 혼약을 취소하기만 한다면, 우리 섭가에서는 황금 천 냥을 보상으로 삼아 유감의 뜻을 표하려 하오.”

    미간에 세로 주름이 잡힌 중년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둘째 부인의 안색이 확 달라지더니 놀란 표정으로 심원각을 바라보았다.

    “그대들이 온 뜻은 내 잘 알고 있소. 다만, 이 혼사는 그때 나의 아내가 정한 것이고, 지금 혼약을 이행할 사람은 내 아들과 채주요. 그러니 나는 그 아이들을 대신해 결정할 수가 없소. 이 일은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려.”

    심원각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망설이며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체격이 건장한 사내가 나섰다.

    “자고로 혼인은 늘 부모의 명이요, 매파의 말이었소. 그들 스스로 정하게 하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오? 심 가주, 어찌 책임을 회피하려 드시오?”

    그때, 대청 밖에서 갑자기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혼약은 본래부터 부모님의 명이었는데, 회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보니 심협과 섭채주가 나란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퍽 잘 어울려 그야말로 옥으로 만든 한 쌍처럼 아름다웠다.

    그제야 주인석에 앉아 줄곧 눈을 감은 채 정신을 가다듬고 있던 노부인이 마침내 눈을 뜨고 심협을 차디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심협은 전혀 두려움 없이 그녀와 눈을 마주쳤고, 두 시선이 맞닿는 곳에는 어렴풋이 불꽃이 튀는 듯했다.

    “협아, 무례를 범해서는 안 된다. 어서 와서 어른들께 인사 올리거라.”

    심원각이 벌떡 일어나며 온화하면서도 근엄하게 말하자, 심협도 눈길을 거두고는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포권을 했다.

    건장한 사내와 중년 남자는 심협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부인 역시 반듯하게 앉아 마치 못 본 것처럼 심협을 무시했다.

    “소녀 채주, 둘째 숙부님과 곽곤(霍昆) 숙부님을 뵙습니다.”

    섭채주는 잠시 입을 가볍게 다물었다가 두 사람을 향해 각각 예를 갖추었다.

    “이분은 태수부의 용(龍) 파파시다. 어서 인사 올리거라.”

    중년 남자가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섭채주는 그제야 주인석의 노부인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현질은 과연 빼어난 인재로군. 이왕 자네가 돌아왔으니, 이 일은 자네가 직접 얘기하게.”

    중년 남자, 섭인북(聶仁北)이 말했다.

    “섭 숙부님, 이 일에 관해 저는 이미 사촌누이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파혼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채주 그녀가 태수 댁 차남의 됨됨이를 좋아하지 않아 인연을 맺으려 하지 않는 것이었지요. 한데 어르신들께서는 어찌하여 굳이 강요하시는 겁니까?”

    심협은 그리 답했다. 그는 앞서 들어오는 길에 섭채주에게서 이 둘째 숙부의 이름이 섭인북이며, 집안에서 지위가 낮지 않아 그의 의견이 기본적으로 섭가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채주와 마(馬) 공자는 겨우 얼굴 몇 번 본 사이인데, 어찌 그 됨됨이를 알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혼인이란 두 집안 형편이 잘 맞는지 따져야 하지. 채주가 태수부에 시집간다면 이 아이에게도 좋은 일인데, 자네가 구태여 방해할 필요 있겠는가?”

    섭인북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되물었다.

    심협은 그 말을 피식 비웃었다. 심가는 섭가와 수준이 안 맞는 허접한 집안이라고 비꼬는 걸 그가 어찌 못 알아듣겠는가?

    한데 심협이 대꾸하기도 전에 주인석에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섭가의 대소저는 어찌된 안목인지 모르겠구려? 이 벽촌의 시골뜨기 때문에 우리 공자를 업신여기다니 말이오.”

    백발의 노부인인 용 파파가 갑자기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녀의 지팡이가 땅바닥에 닿자 대청 전체가 한 차례 진동했다.

    “아이고!”

    둘째 부인은 화들짝 놀라 찻잔을 부딪쳐 쓰러뜨리고야 말았다.

    ‘역시 수사(修士)였군!’

    심협은 곁에 선 섭채주의 손목을 잡고 두 다리에 가만히 힘을 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진동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고 태연히 서 있을 수 있었다.

    옥같이 희고 고운 손이 심협의 손에 잡혔을 때, 섭채주는 마음이 따스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심협을 쳐다보았는데, 그 눈빛 또한 따스했다.

    용 파파의 눈이 살짝 가늘게 변했다. 그녀의 눈빛에서는 약간의 살기까지 느껴졌다.

    옆에 서 있던 곽곤이 살짝 안색이 변해 낮은 소리로 섭인북에게 말했다.

    “보아하니 앞서 얻은 정보가 맞는 것 같습니다. 저놈이 과연 수행을 하는 놈이었어요. 수련 경지가 제 아래는 아닌 듯하니, 적어도 연기 중기쯤은 될 겁니다. 그의 나이에 비해 제법 괜찮은 경지지요.”

    그들은 이미 심협에 대한 조사를 한 상태였다. 하지만 춘추관이 멸문당한 이후의 종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현질, 자네가 몸 담았던 문파는 이미 전멸했다 들었는데, 앞으로는 어떤 계획이 있는지 모르겠구먼?”

    섭인북은 잠깐 망설이더니 물었다.

    “저 스스로 계획한 바가 있으니,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내 수행이란 건 잘 모르네만, 사문의 도움과 지도 없이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 자네가 원한다면 내 섭가의 인맥과 태수부의 영향력으로 자네를 운주 경내의 선가와 문파에 들어가게 해줄 수도 있네. 어떤가?”

    섭인북은 수련자라면 거부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 제안을 했다.

    “그 말씀에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는다면야, 물론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지요. 허나 사촌누이의 혼사를 전제로 삼으신다면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심협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섭인북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자기가 이미 최대한의 선의를 베풀었다 여겼으나, 저 애송이 같은 놈이 만족을 모르니 순간 노여움이 치솟았다.

    “채주야. 남들이야 우리 섭가의 처지를 모르니 그렇다 쳐도, 네가 이럴 수 있느냐? 이번에 네가 제멋대로 도망을 치는 바람에 이미 집안에 불똥이 튀었다. 그래도 다행히 공자께서 사정하여 태수어른께서 섭가에 죄를 묻지는 않으셨지. 정말 네 사리사욕만 생각하느라 가족은 돌보지 않는 것이냐? 그리 해서 네 아버지께 떳떳하고, 섭가에 떳떳할 수 있겠느냐?”

    섭인북은 심협이 아닌 섭채주로 목표를 바꿨다.

    섭채주는 그 말을 듣고 살짝 안색이 바뀌었다. 약간의 망설임도 느껴졌다.

    그때, 심협이 대신 나서서 성난 목소리로 꾸짖었다.

    “그 잘난 사리사욕, 가족생각……. 가문의 대의로 약한 여인을 압박하여 싫어하는 사람에게 시집가도록 몰아세우다니, 그대들 섭가의 체면은 다 어디 있단 말이오? 지금껏 섭가가 이룬 모든 것이 설마 가문의 여인들로 맞바꿔온 것은 아니겠지요?”

    “네, 네놈이!”

    섭인북은 예상치 못한 심협의 말에 일순 말문이 막혔다.

    섭채주 역시 깜짝 놀란 표정으로 심협을 바라보았다.

    “채주야, 네가 말해보아라. 저들과 돌아가 그 망나니라는 자와 혼인하고 싶으냐? 네가 싫다고만 하면, 오늘 누구도 너를 몰아세우지 못할 거라고 약속하마.”

    심협은 섭채주의 눈을 들여다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와 눈을 맞추고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섭채주는 결심했다.

    “아니요, 싫습니다.”

    마침내 그 말을 외친 순간, 섭채주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들으셨지요? 싫다는군요.”

    심협 역시 섭채주의 말에 마음이 풀어져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건방지기가 이를 데가 없구나! 삼류 문파 축에도 들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문파 출신 제자가 감히 이리도 오만방자하단 말이냐? 정말 하늘 높고 땅 두터운 줄 모른단 말이더냐?”

    용 파파가 갑자기 성난 호통을 내지르며 한 손으로 옆의 탁자 위를 내리쳤다.

    퍽!

    놀랍게도 탁자가 부서진 것이 아니라, 탁자의 네 다리가 대청에 깔린 돌판을 뚫고 땅속 깊이 박혀버렸다.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고, 둘째 부인은 하마터면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심원각도 안색이 크게 변했으나, 애써 참아냈다.

    한편, 심협만은 놀라기보다는 생각에 잠겼다.

    ‘이 노부인이 힘을 저토록 교묘하게 통제할 수 있는 걸 보면, 분명 수련 경지가 상당할 것이다.’

    섭인북도 이 광경은 조금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는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용 파파, 노여움을 푸십시오.”

    “흥! 저놈이 이 늙은이를 노엽게 할 자격이나 있단 말인가? 춘추관도 사라졌으니 상갓집 개에 불과한 놈이 감히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뭘 믿고 감히 그리 큰소리를 치는 것이냐?”

    용 파파는 신랄하게 비웃었다.

    그리고 그 말이 심협을 자극했다. 그는 이제껏 자신이 춘추관에 큰 충심 같은 것을 가졌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저 노파가 춘추관을 깔보는 발언을 연이어 내뱉자 벌컥 화가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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