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81화 (181/1,214)
  • 181화. 불광(佛光)의 기적

    그렇게 며칠을 한가롭게 보낸 심협은 다시 수행을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무명천서를 수련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부적 제작을 공부했다.

    건업성에서 돌아오기 전, 그는 녹보당에 들러 영재와 부적에 쓸 종이를 구입하기도 했다. 다만 삼원진수와 지령단을 사느라 모아둔 선옥을 대부분 써버린 상태라, 구할 수 있었던 청상지와 황지는 적었다.

    수련을 마친 심협은 석합에서 실로 묶여진 얇은 서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후 주인장에게서 받은, 부적에 관한 고서였다. 지금까지는 대강 훑어보았을 뿐,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는데, 오늘은 차분히 볼 요량이었다.

    책의 맨 앞장에는 인물 약전(略傳) 같은 간단한 소개가 있었다.

    뒷부분에는 부적에 대한 내용이 초서체로 쓰여 있는 것과 달리, 이 약전은 행서(行書: 한자 글자체의 하나로, 초서와 해서의 중간 형태)로 쓰여 있었다. 서로 다른 사람이 쓴 게 분명했다.

    읽어보니 후가의 후세들이 덧붙여 넣은 것은 것으로, 후씨 집안 선조의 생애와 업적이 기재되어 있었다.

    이 후씨 집안 선조는 어느 운유도인(*雲遊道人: 이곳저곳 떠돌며 수행하는 도인)으로, 구체적으로 어느 문파를 계승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수련한 도법에 대해 그다지 많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부적 위주인 것으로 미루어 소모산(小茅山) 계파에 속하지는 않을 듯했다.

    운유도인은 불가의 행각승과 역할이 비슷했다. 다만 그는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는 것으로 수행을 삼고, 가는 길을 따라 도를 전하고 의술을 행했으며, 요괴와 귀물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정통한 부적들 역시 대부분은 유랑과 관련이 있었다.

    책에 첫 번째로 기록되어 있는 부적은 바로 과산부(*過山符: 산을 지나는 부적이라는 뜻)였다.

    심협은 무슨 험한 산이나 고개 따위를 넘는 이동용 부적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소개를 자세히 보니, 이 부적의 효능은 요기를 탐지하는 것이었다.

    운유도인은 길에서 수행을 했으니 늘 인적이 드문 산천을 다녀야 했고, 그런 곳에는 흔히 산의 정령이나 요괴 따위가 빠질 수 없었다. 그래서 요기가 다가오는 것을 미리 감지하도록 빛으로 경고해주는 과산부를 만든 것이다.

    그 효력은 탐요령(探妖鈴) 같은 법기와 비슷했다. 다만 탐요령은 요기가 강하거나 더 가까워질수록 방울소리가 크게 났고, 과산부는 더 밝은 빛을 낸다는 차이가 있었다.

    또한 이 부적은 목적성이 비교적 강해서 음살(陰煞)이나 귀기(鬼氣)는 감지할 수 없고, 오직 요기에만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리 높은 등급의 부적은 아닌지라 보통의 황지와 주사, 부적용 먹으로도 그릴 수 있었다. 고급 종이를 써봐야 효력의 강도만 약간 달라질 뿐이었다.

    서책에는 과산부 외에도 운유도사가 자주 사용했던 부적이 몇 가지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중 심협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한 것은 바로 청풍파장부(淸風破障符)와 신행갑마부(神行甲馬符)였다.

    청풍파장부는 부적의 힘으로 천지의 호연지기를 담은 맑은 바람을 일으켜 혼탁하고 사악한 기운을 날려버리는 것으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나쁜 기운과 사람이 만들어낸 안개 장막 따위를 모두 깨트리는 효력이 있었다.

    신행갑마부는 다른 부적과는 문양이 전혀 다른 양식이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글자라기보다는 진한 먹으로 그린 말 그림 같아 보였다. 다만 이 진한 먹 안에서는 선이 흐르고 고대문자의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이 부분은 글씨 같기도, 그림 같기도 했고, 사나운 말이 발굽을 들고 갈기를 흩날리며 네 발굽으로 내달리는 자세 같기도 했다.

    이 부적을 사용하려면 법력으로 부적에 불을 붙이고 주문을 외워야 하는데, 불탄 종이의 재는 그 두 발에 감겨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빠르게 질주해 하루에 천 리를 갈 수 있게 해준다. 마치 명마(名馬)를 탄 것처럼.

    “한 걸음에 백 보를 가고, 땅이 저절로 줄어들며, 산을 만나면 평지가 되고, 물을 만나면 마른 땅이 되리라. 삼산구후 선생의 이름으로 명하노라(一履百步,其地自縮,逢山山平,遇水水涸, 吾奉三山九侯先生令摄)!”

    기록된 주문을 따라서 읊조리던 심협의 눈빛이 빛났다.

    삼산구후(三山九侯)선생의 명성은 그도 들어보았다. 다만 그 진짜 신분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세상 모든 운유도인들은 여전히 그를 시조로 여기며 예를 갖추었다.

    운유도인들이 사용하는 수많은 부적들 또한 삼산구후 선생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중 사람들에게 친숙한 것이 신행갑마부와 오귀반운부(五鬼搬運符)였다.

    고서에는 이 세 종류의 부적 외에도 네 종류가 더 기록되어 있었는데, 앞의 셋과 비교해 그리 믿음직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중에는 후 주인장이 찢어버린 초재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화인도부(*桃花引渡符: 도화살을 이끌어오는 부적), 축양양신부(*蓄陽養身: 양기를 모아 몸을 보신하는 부적), 오령안태부(*五靈安胎符: 태아를 보호하는 부적) 거기다 초재부까지…….

    “어째…… 운유도인이 입에 풀칠하려고 사기를 칠 용도로 만든 건 아닌지 모르겠군.”

    심협은 그 부적들에 대해서는 흥미가 뚝 떨어져 마음에 두지 않았다.

    대신, 앞의 세 가지 부적은 시험 삼아 그려볼 계획이었다. 다만 청풍파장부는 보통의 파장부보다 등급이 약간 높아, 청상지로 그려야만 충분한 법력을 모으고 더 거대한 청풍을 불러 일으켜 짙은 안개와 나쁜 기운을 돌파할 수 있었다.

    심협에게는 청상지가 적잖이 있었지만 낙뢰부를 그리는 데 써야 하니 당연히 종이를 덜어 청풍파장부를 그리는 것은 뒤로 미뤄야 했다.

    반면 신행갑마부를 그리는 데는 종이에 별다른 조건이 없었다. 그러나 이를 그리는 데 필요한 부묵(符墨)이 조금 특수했다. 특히 지성초(地星草)라는 영재가 빠져서는 안 됐다.

    심협은 지성초를 녹보당에서 본 적이 있었다. 매우 진귀하다고 할 만한 영초는 아니었지만, 그때는 딱히 필요치 않아 구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 이곳 춘화현성에서는 살 수 없을 터였다.

    이리저리 따져본 결과, 심협은 자기가 지금 시험 삼아 그려볼 수 있는 부적이 과산부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모든 준비를 마친 후, 과산부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 부적은 그가 지금껏 그려온 부적들에 비해 등급과 난이도가 더 낮았다. 그래서 연습한 지 겨우 10일 만에 처음으로 신기(神氣)를 지닌 과산부를 그리는 데 성공했다.

    그날 오전, 심협은 수련을 마친 뒤, 원래는 계속 부적 그리는 연습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채 시작도 하기 전에 문 두드리는 소리에 흐름이 끊기고 말았다.

    방문을 열어보니, 섭채주가 시녀 소춘을 데리고 처마 밑에 서 있었다.

    “섭 낭자, 어쩐 일이오?”

    심협이 엷은 미소를 내비치며 물었다.

    섭채주는 다소 망설이는 것이, 입을 떼기가 좀 어려운 것 같았다.

    “서방…… 공자님, 저희 아씨께서 원주사에 향을 올리러 가시려는데, 공자님께서 호위해주실 수 있는지 여쭙고자 하십니다.”

    소춘은 하마터면 ‘서방님’이라 부를 뻔했다가, 재빨리 호칭을 바꾸었다. 그리고는 미안하다는 듯 섭채주를 향해 혀를 쏙 내밀어 보였다.

    “오라버니께서 바쁘시면 그리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섭채주가 말했다.

    “아니, 괜찮다. 내 함께 가지.”

    섭채주가 자신의 약혼녀이기 이전에 먼 사촌동생이기에 심협은 그녀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러나 며칠간 수련에만 매달려 있느라 자신을 찾아 천 리 길을 달려온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는, 저도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섭채주는 몸을 살짝 굽혀 예를 갖추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곧 대문을 나서 마차를 몰고 성을 빠져나와 원주사로 향했다. 지난 번 소란 뒤로 춘화현성 주위에는 수비병이 눈에 띄게 늘었고, 치안도 강화됐다. 이에 따라 원주사의 참배객 역시 다시 늘었다.

    심협 일행은 비교적 늦게 출발하여 원주사에 도착했을 때는 참배객들이 붐비는 시간대가 지나, 절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있었다.

    섭채주는 소춘과 함께 불전에 들어가 향을 살랐지만, 심협은 춘추관 출신인 만큼 도통(道統)에 속하여 불전에서 참배하기는 불편했다. 대신 그는 홀로 절 안을 거닐면서 경치를 감상했다.

    원주사는 세워진 지 오래되어 보수를 몇 차례 겪었고, 심협이 기억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얼마 전에도 이곳에 오기는 했지만, 그때는 섭채주를 구하는 것이 목적이라 사원의 변화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주위의 건축물과 이를 둘러싼 담장들은 모두 밝은 노란 색이었고, 담장 윗부분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남아 있었다. 담벼락 위에는 불가의 육자진언(*六字眞言: 진언 가운데 하나. ‘옴마니밧메훔(唵麽抳鉢訥銘吽)’의 여섯 자로 된 주문)이 많이 쓰여 있었고, 귓가에는 승려들이 불경을 외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으며, 공기 중에도 향불 냄새가 가득했다.

    심협은 그 사이를 거닐면서 고요함과 편안함을 더욱 느꼈다.

    그때, 갑자기 시끌시끌한 소리가 절 곳곳에서 들려왔다.

    “나타났다. 또 나타났어!”

    “불광(佛光)이다! 어서 저길 좀 봐, 부처님의 광명이야!”

    심협은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한 상태로 대웅전 앞 광장으로 급히 돌아갔다. 수많은 승려들이 속속 대전 곳곳에서 걸어 나와 두 손을 합장하고 입으로는 불호(佛號)를 읊으며 높이 하늘을 향해 예배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배하는 방향을 보니 사원 뒤편 하늘에 옅은 자색 빛살이 빛나고 있었는데, 그 위쪽의 구름까지 자색으로 물들어 정말로 신묘한 광채 같았다.

    그때, 섭채주와 소춘도 불전에서 나와 이 신기한 현상을 보고는 합장을 하며 참배했다.

    한데 그 빛을 바라보던 심협이 갑자기 콧날을 찡그렸다. 공기 중에서 예사롭지 않은 냄새가 났던 것이다. 사원의 향불 냄새에 섞여 그다지 두드러지지는 않았으나, 심협은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식해(識海)에 경미한 환각이 나타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괴롭기는커녕 더없이 편안한 느낌이었다.

    심협은 곧 시선을 돌렸는데, 다른 사람들도 환희에 찬 표정이었다. 그 순간, 심협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그 냄새를 따라 사원 뒤뜰로 향하여 몇 개의 회랑을 지나 관음전 근처에 이르자, 그 기이한 냄새는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이상하게 여기고 고개를 들어 보니, 사원 위쪽의 자색 광채도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심협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또다시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별다른 이상은 찾지 못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광장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광장의 승려들은 이미 각자 대전으로 돌아갔지만, 남은 참배객들은 여운이 가시질 않는지 잔뜩 상기된 모습으로 방금 나타났던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어딜 가셨던 겁니까? 불광의 기적은 보셨는지요?”

    심협이 돌아오자 섭채주가 보고는 다가와 맞이했다. 그녀의 고운 얼굴도 흥분으로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불광의 기적? 방금 하늘의 그 자색 빛을 말하는 건가?”

    “물론이죠! 그건 원주사에만 있는 기적인데, 들어보니 십여 년에 한 번 나타난답니다. 제가 춘화현에 온 지 이리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오라버니와 동행하니 뜻밖에 행운이 따라줬네요.”

    섭채주의 눈가에는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방금 전의 그 ‘기적’에 대해 꽤나 신경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공자님, 공자님께서도 불가와 연이 있는 분이셨나 봅니다.”

    소춘도 옆에서 즐거워하며 말했다.

    심협은 이 불광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지만, 섭채주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웃었다.

    “누이는 불교를 왜 그리 깊이 믿나?”

    함께 절 밖으로 나오며 심협이 물었다.

    “어머니께서 부처님을 믿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부터 불교는 사람을 선한 방향으로 이끈다고 배웠고, 인과응보란 것도 배웠습니다. 저도 마음에 뭔가를 깊이 믿는다는 게 나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고요.”

    “그건 또 그렇지.”

    심협은 섭채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마차를 타고 현성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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