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80화 (180/1,214)

180화. 약혼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이래봬도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힌 몸이다! 너희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

심협이 호기롭게 외쳤으나 여전히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데다가 외모부터가 비리비리하니, 어찌 도적들이 그 말을 믿겠는가? 그들은 당장 칼을 뽑아 들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싸움이 시작되면 낭자는 먼저 달아나시오.”

심협은 얼굴을 살짝 돌리고 작은 소리로 섭채주에게 당부했다.

“공자께서는 빈손이시니 저들과 싸우지 마십시오. 우리가 함께 달아나면 둘 중 하나는 도망칠 수 있을 겁니다.”

섭채주가 심협의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협은 그녀의 말을 듣고 속으로 저도 모르게 약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대로 한 명은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도적들의 목표는 섭채주이니 도주에 성공할 사람은 분명 그녀가 아닐 터였다.

그는 가만히 섭채주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겁에 질려 있었지만, 눈빛만은 굳건했다. 손으로는 이미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린 걸 보면, 분명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리라.

“괜찮소. 저런 좀도둑들 때문에 두려워할 것 없소.”

섭채주에게 감탄한 심협은 차마 계속 시치미를 떼지 못하고 지금까지와 달리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안심시키며 웃어 보였다.

섭채주는 그의 따스한 미소를 보자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어, 치맛자락을 들어 올린 손도 조금 느슨해졌다.

“이제 후회해도 늦었다. 죽어랏!”

칼자국 사내가 노기를 띤 채, 심협의 등 뒤로 돌진하면서 무쇠 칼을 휘둘렀다.

“조심……!”

섭채주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으나, 심협은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저 몸을 살짝 기울여 공격을 피해냈다.

칼자국 도적의 칼날이 옷자락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왔을 때, 심협은 검지를 살짝 튕겨 칼을 쥔 상대의 손바닥을 때렸다.

퍽!

“끄아악!”

경쾌한 소리에 이어 칼자국 사내가 처참한 비명을 내질렀고, 칼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손뼈가 이미 산산조각 난 것이다.

심협의 동작이 워낙 빠르고 간결했던 탓에 외눈박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깨닫지 못했고, 갑자기 동료가 바닥에 거꾸러져 울부짖자 즉시 칼을 빼들고 달려들었다.

심협은 발을 한 번 놀려 곧장 외눈박이 앞에 나타나더니 목덜미를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외눈박이는 몸에 힘이 탁 풀리더니,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졸도하고 말았다.

이 광경을 본 섭채주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게 내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다니까, 좀 믿지…….”

심협은 끌 하고 혀를 차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발끝으로 칼자국 사내의 관자놀이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나뒹굴던 사내는 곧바로 까무룩 기절했다.

“섭 낭자, 가시지요.”

심협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저들은…….”

섭채주는 땅에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을 보며 두려운 듯 머뭇거렸다.

“기절했소. 적어도 반나절은 깨어나지 못할 테니, 관부에서 사람들이 올 때까지 도망치지도 못할 거요.”

그 말을 듣고서야 섭채주는 마음을 놓고 심협을 따라 원주사를 나섰다.

방금 전의 일로 둘은 조금 더 가까워져, 처음과 달리 이제 둘이 나란히 걷게 됐다.

“섭 낭자, 운주에서 여기까지 천 리가 넘는데, 어쩐 일로 이리 먼 춘화현까지 온 것이오?”

심협이 거리낌 없이 물었다.

“그건…… 단지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그렇단 말이오? 그렇다면 분명 낭자께 아주 중요한 사람이겠구려.”

심협은 눈썹을 위로 으쓱이며 말했다.

“중요하다라……. 잘 모르겠어요. 제 약혼자인데, 아직 한 번도 그를 만나본 적이 없거든요.”

섭채주가 살짝 망설이더니 말했다.

“어째서요?”

심협은 모르는 척 그렇게 물었다.

섭채주는 잠시 생각해본 뒤,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개중에는 심협이 이미 알고 있는 것도, 모르는 것도 있었다.

알고 보니, 섭채주의 어머니가 세상을 뜬 뒤부터 섭가는 심가와 연락을 끊었다. 재산이든 지위든 자신들에게 한참 못 미치는 심가를 전혀 중요시하지 않아, 그 혼약도 없는 것으로 여겼다. 마침 심가에서도 혼약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니 섭가 입장에서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후, 섭채주가 혼인할 나이가 되자 섭가에서는 운주 태수의 차남에게 그녀를 시집보내 태수부(太守府)와 사돈 맺기를 원했다. 한데 이 대갓집 도련님은 이미 운주에서 악명이 높았기에, 섭채주는 그를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게다가 자신은 이미 정혼한 몸이라 선언했으니, 섭가에서는 속이 타들어갔다. 가문의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그녀에게 대세를 보라는 둥, 가족을 위해 생각해야 한다는 둥 입이 마르고 닳도록 충고했다.

한데 그 누가 알았으랴! 평소 유약하기 그지없어 보였던 이 여인이 이 일에 있어서만큼은 놀랍도록 강경하여 꿈쩍도 하지 않을 줄을…….

섭채주가 요지부동으로 나오자, 섭가에서는 그녀를 방에 가둬 놓았다가 태수부에 억지로 시집을 보내버리려 했다.

그러나 섭채주는 이내 패물과 옷가지 따위를 챙겨 시녀 하나만을 대동한 채 몰래 집에서 도망쳐 나와, 남장을 한 채 춘화현에 이른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그야말로 소설 속 이야기처럼 들려, 벽곡기 수사(修士)인 심협조차도 매우 놀랐다. 지금 온 대당이 결코 안전하지 않고, 사방에는 요사스런 귀물들이 판을 치는 마당인데, 일개 아녀자인 섭채주가 그 먼 길을 무사히 온 것은 기적이라 봐도 무방하리라.

“혼인은 자고로 늘 부모님의 명이요, 중매인의 말이라 했소. 섭 낭자 같은 여인은 아주 보기 드물 테지요.”

심협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약하고 순진하지만, 필요할 때면 용감히 맞서 싸우는 이 여인에게 적잖은 호감이 생긴 것이다.

“다른 일들은 타협할 수 있을지 모르나, 혼인대사는 다른 이들이 마음대로 결정해서는 안 되지요.”

섭채주의 눈이 굳건하게 빛났다.

“허나 섭 낭자, 낭자의 정혼자 역시 똑같은 부잣집 한량일 수도 있단 생각은 안 해보셨소? 심지어 외모도 기괴하고, 품행도 단정치 못하다면요?”

“정말 그렇다면, 저는 마찬가지로 그에게 시집가지 않을 겁니다. 이번에 이행하러 온 혼약 또한 파혼이 될 테지요.”

섭채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허나 굳건한 말에 이어진 미소는 마치 하얀 구름이 펼쳐진 듯 보는 이의 마음을 황홀하게 하여, 심협 역시 저도 모르게 살짝 넋을 잃고 바라보고야 말았다.

“허나 정혼자의 가족들을 만나본 뒤로, 그가 분명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은 아닐 거라 믿게 되었습니다.”

섭채주가 또 한 마디 덧붙였다.

“그건 어찌 확신하시오?”

심협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집안에는 자연히 가풍이란 것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백부님께 정혼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포부가 있고 진취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었지요.”

섭채주의 답을 들은 심협은 내심 우쭐해졌고, 웃음이 번지는 걸 금할 수가 없었다.

“제 정혼자 이야기에 어찌 공자께서도 이리 기뻐하십니까?”

마침 심협의 표정을 본 섭채주는 의아한 듯 물어보았다.

“아, 같은 고을 사람이로서 영광이라 할 수 있지 않겠소? 한데 뉘 댁 청년인지 모르겠구려.”

심협은 재빨리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심가 약방의 대공자입니다. 보아하니 공자님과 동년배일 듯한데, 혹시 아시는지요?”

섭채주의 물음에 심협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심가 약방이라면…… 알지 못해 아주 유감이오.”

“인연이란 실로 허무하지요. 제가 오늘 이곳 원주사에 왔던 것도 부처님의 가호를 빌기 위해서였답니다. 오직 정혼자인 그가 마음이 선한 사람이고, 제가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는 이 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섭채주는 한참 생각하더니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그 순간, 그녀의 두 눈은 마치 별처럼 반짝였다.

심협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 한구석에 큰 요동을 느꼈고,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 뒤로 두 사람은 현성까지 가는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때마침 몇몇 집안사람과 함께 마차를 몰고 나온 심원각은 심협과 섭채주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돌아오는 것을 멀리서 보게 됐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마부는 고삐를 당겨 마차를 세웠고, 마차에서는 푸른 옷을 입은 시녀 하나가 뛰어 내리더니 울먹이며 섭채주에게 달려갔다.

“아씨! 이 소춘(小春)이가 놀라 죽을 뻔했습니다요. 엉엉!”

그녀는 섭채주의 품으로 뛰어들며 대성통곡했다. 불과 열서너 살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몸집이 아주 왜소한 시녀였다. 이목구비는 아직 앳되었으나, 울음을 터뜨리자 빗방울을 머금은 배꽃마냥 아름다웠다.

섭채주는 조금 민망한 듯 심협을 힐끔 쳐다보고는 소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춘아, 울지 마라. 내 이리 멀쩡하지 않느냐?”

하지만 소춘이라는 시녀는 도저히 울음을 멈추지 않고 한참을 울었다. 그러고서야 마침내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아씨, 저 사람은 누굽니까?”

그녀는 자기네 아가씨 곁에 서 있는 심협을 보고는 경계하듯 물었다.

“이분은……. 나를 구해주신 분이다.”

섭채주는 심협을 소개하려 했으나, 그제야 눈앞의 저 공자가 아직 이름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제 보니 은인이셨군요. 우리 아씨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공자님.”

소춘은 즉시 표정을 바꾸며 재빨리 심협에게 허리를 숙였다.

줄곧 마차 옆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던 심원각이 그제야 다가왔다.

“채주야, 협아. 여긴 이야기 나눌 만한 곳이 아니니 우선 돌아가서 이야기하자꾸나.”

“심 백부님, 심려를 끼쳐드렸…….”

예를 차리던 섭채주는 말을 뚝 끊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녀의 눈빛은 심협과 심원각 사이를 몇 번이나 오가더니, 문득 두 사람의 눈매가 닮았음을 깨닫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그러느냐? 채주야, 뭐가 잘못되었느냐?”

심원각이 그런 그녀를 보고 의아해 하며 말했다.

“섭 낭자, 아까 이름을 미처 알려드리지 못했소. 나는 심협이라 하오. 그대의 정혼자이지요.”

심협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정식으로 인사했다.

“공자님이…… 심협?”

섭채주는 그 말을 듣고는 곧 돌아오던 길에 했던 말들이 떠올라 두 뺨이 금세 붉어지더니 귀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와, 알고 보니 서방님이셨군요?”

소춘이 눈치 없이 끼어들어 기름을 끼얹었다.

섭채주는 소맷부리를 꽉 쥐고 혼란스러운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아이참, 아씨도……. 아씨!”

소춘이 다급하게 부르며 섭채주를 쫓아갔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심원각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심협을 쳐다보며 물었다.

“어쩌다 보니 그리 됐습니다.”

심협은 짐짓 모르는 척 얼버무렸다.

심원각은 잠시 입맛을 다시다가 가볍게 웃고는 사람들을 데리고 심가로 돌아갔다.

그후로 며칠 동안, 섭채주는 밥 먹을 때 빼고는 거의 온종일 방안에만 머물렀다. 또한, 심협을 피하는 것인지 밥상머리 앞에서조차 거의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몸종인 소춘은 매번 심협과 마주칠 때마다 늘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는데, 눈빛에는 그를 꾸짖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에 심협은 좀 무안해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