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79화 (179/1,214)
  • 179화. 절 안의 소녀

    “말은 필요 없네.”

    이미 마당에 나와 있던 심협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사람들이 의아해 할 틈도 없이 소매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갑자기 빛이 번쩍였고, 뒤이어 심협의 옷자락에서 푸른 빛이 한가득 솟아나 그의 몸을 감쌌다. 다음 순간, 그는 하늘로 솟구쳐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심가 사람들은 이 광경에 모두 넋을 놓고 말았다.

    “협이…… 지금 협이가…… 날아간 것이 맞느냐?”

    둘째어머니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못 믿겠다는 듯 말했다.

    “응! 오라버니가 정말 날아갔어요! 와, 오라버니는 진짜 신선인가봐!”

    심목목은 심각한 상황에서도 해맑게 외쳤다.

    심원각은 놀라긴 했지만, 아들이 지난 몇 년간 겪은 일들을 편지를 통해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었기에 흐뭇함이 앞섰다. 이제 아들은 목숨이 위험하던 예전과 달리 앞길이 창창해진 것이다.

    * * *

    심협은 쏜살같이 날아올라 한 줄기 무지개처럼 춘화현성 상공을 가로질렀다.

    성안에서 우연히 이 모습을 본 이들 사이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기도 했는데, 신선이 강림했다 여겨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가 하면 두 눈을 감고 기도하는 이도 있었다.

    심협은 곧 성을 빠져나가 원주사로 향했다. 길을 따라 뿔뿔이 흩어진 수많은 백성이 성을 향해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심협은 이제 땅으로 내려와 백성들에게 섭채주의 소식을 물었다. 하지만 다들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상태라 횡설수설했다. 심지어 심협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쓸 만한 정보를 줄 리가 없었다. 이에 심협은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 하늘을 맴도는 매처럼 땅 위를 수색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녹색 옷의 여인이 산발을 한 채 길가 고목 옆에 숨어 있는 것을 보고는 급히 그쪽으로 향했다.

    그가 땅에 내려서자마자 겁에 질려 있던 여인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낭자, 혹시 섭…….”

    심협은 말을 절반쯤 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눈앞의 여자는 머리가 산발이었고, 두 눈은 한쪽은 크고 한쪽은 작았으며, 코는 들창코에 턱은 주걱턱인 것이, 보기 흉했다. 너무 급하게 도망치느라 그랬는지, 신발도 한 짝은 찢어져 발가락 몇 개가 삐져나와 있었다.

    심협은 그녀에게 섭채주의 인상착의를 설명하고는 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본 적 없소! 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신경이나 쓸 수 있었겠소?”

    여인은 거칠고 억센 목소리로 불쾌해하며 말했다.

    “감사하오.”

    심협은 그녀에게 감사를 표한 뒤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여인은 불쑥 입을 열었다.

    “공자님, 소녀도 여인이온데 이런 황야에 내버려두고 가시는 겁니까?”

    “관아에서 이미 사람을 보내 도적들을 추포했으니, 성으로 돌아가는 길은 전혀 위험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미안하지만 혼자 돌아가도록 하시오. 나는 찾아야 할 사람이 있소.”

    심협은 그렇게 답하고는 다시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심협의 눈이 번쩍 빛났다. 저 아래 길가에 참배객들의 바구니와 절에 바칠 과일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고, 사방에 마차 몇 대가 나뒹굴고 있었다. 아마도 도적떼가 가장 먼저 습격한 곳이리라.

    그때, 심협의 시선이 그중 한 마차에 꽂혔다. 어딘가 낯이 익은 마차였다.

    “설마……?”

    그는 다급히 그 마차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아침에 성문 앞에서 마주친 그 마차가 맞았다.

    그는 서둘러 마차 휘장을 조심스레 걷어 올리고 안을 살펴보았다. 마차는 텅 비어 있었으나, 다행히 핏자국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약간 달콤하면서도 질리지 않을 듯이 맑고 산뜻한 향기만이 아른거렸다.

    ‘이곳은 원주사에서 멀지 않으니, 잡혀가지 않았다면 대부분은 그곳으로 도망갔을 테지?’

    심협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다시 날아올라 곧장 원주사로 내달렸다.

    원주사는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장식품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으며, 적지 않은 경당(*經幢: 경문을 새긴 돌기둥)이 쓰려져 있었다. 또한, 경번(*經幡: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불교 교리가 그려진 다섯 가지 색깔의 깃발)들도 갈기갈기 찢겨져 있어, 도적떼가 난입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심협은 속으로 부처님께 용서를 빌며 절의 산문을 곧장 날아 지나쳐 대웅전으로 향했다.

    곧 그는 사원 내부가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긴 해도 싸움을 벌인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음을 알게 됐다. 사원의 승려들 역시 도망갔는지 아니면 어딘가에 숨었는지, 어디에도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문득 심협의 눈빛이 반짝였다. 대웅전 뒤편 우물가에 담황색 치마를 입은 묘령의 여인이 기대어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재빨리 뜰에 내려서서 여인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심협은 그녀를 더욱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눈보다 하얀 피부, 먹과 같은 눈동자, 적당히 옅은 눈썹과 역시 적당히 높은 콧날. 아직 좀 앳되긴 했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마차에서 본 그 여인이 분명했다.

    “그녀다.”

    심협의 마음이 일렁였다.

    한데 그가 막 말을 걸려 는 순간, 그녀가 작게 소리를 지르더니 몸을 돌려 옆의 우물에 몸을 던지려 했다. 화들짝 놀란 심협은 즉시 사월보를 시전하여 다가가 여인의 어깨를 붙들고 끌어당겼다.

    “낭자, 이게 무슨 짓이오!”

    심협이 꾸짖듯 외쳤다.

    여인은 적잖이 놀란 게 분명했다. 눈을 떠 심협을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두 팔을 마구 휘저으며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쳤으며, 쉴 새 없이 외쳐댔다.

    “놔요! 놓으란 말이에요!”

    “낭자, 나는 도적이 아니오. 눈을 떠보면 알 것 아니오!”

    심협은 어쩔 수 없이 여인의 어깨를 흔들면서도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여인은 몸부림을 멈추더니 조심스레 두 눈을 뜨고 심협을 힐끗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잠깐 본 것만으로도 심협이 도적은 아님을 깨달았는지, 이내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비로소 마음을 조금 놓은 듯했다.

    “낭자,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심협은 그녀가 입고 있는 최고급 운금(*雲錦: 색채가 아름답고 구름무늬를 수놓은 고급 비단) 주단 솜옷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을 보고 의문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공자님, 우선은 좀 놓아주시지요.”

    여인은 얼굴을 발그레한 노을빛으로 물들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심협은 그제야 아직도 자신이 그녀의 어깨를 꽉 붙들고 있었음을 깨닫고는 황급히 사과하며 어색하게 두 손을 놓았다.

    “오늘 오전, 원주사에 향을 사르러 오는 길에 도적떼의 습격을 받아 일행들과 떨어졌습니다. 저 홀로 도적 둘에게 쫓겨 도망치다 보니 여기에 이르렀지요. 급한 마음에 저 우물 안에 들어가 숨어 있다가 더 이상 기척이 없어서 방금 다시 기어 올라왔답니다.”

    여인은 그와 조금 거리를 두고 나서야 이야기했다. 한겨울에 흠뻑 젖은 여인은 입술이 살짝 파랗게 질려 있었고, 목소리 역시 가늘게 떨렸다.

    심협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여인에게 걸쳐주었다.

    “추위가 매섭소. 몸에 한기라도 들면 크게 병이 날 거요.”

    여인은 반사적으로 피하려 했으나, 심협은 아랑곳하지 않고 겉옷 끈을 묶어주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여인은 그제야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작고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심협은 사촌누이이자 정혼자인 섭채주도 찾아야 했기에, 더 머물 수는 없었다.

    “내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가봐야 하오. 오는 길에 보니 도적떼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소. 이미 관아에서 몰아낸 듯하오. 낭자께서 다친 곳이 없다면 홀로 현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요.”

    “공자님의 조언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인은 살짝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심협도 그녀를 향해 포권을 한 후 몸을 돌이켜 떠나려 했다. 한데 그때,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돌연 몸을 돌리더니, 예의가 아님을 알면서도 여인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낭자의 말씨가 다른 걸 보면 이 고장 사람이 아니신 듯하오?”

    소녀는 그 말에 의아해 하면서도 망설이다가 답했다.

    “소녀는 운주 사람입니다. 보름 전에야 춘화현에 왔지요.”

    “무례함을 용서하시오. 방명(芳名)이 어찌되시는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소?”

    심협은 ‘운주’ 두 글자를 듣자마자 무심코 눈썹을 움찔 들어올렸다.

    “공자께서 주신 도움에 소녀 매우 감사드립니다. 허나 우연히 뵌 분인지라……. 저의 무례를 용서해주시지요.”

    여인은 경계하는 목소리로 말하며 겉옷을 벗어 심협에게 돌려주려 했다.

    “내가 무례했소.”

    심협은 급히 손을 내저으며 사과했다. 그러자 여인의 표정도 살짝 누그러졌다.

    “공자께서는 급하고 중한 일이 있어 성에서 예까지 달려오신 듯한데, 더는 지체하지 마십시오. 성함과 사시는 곳을 알려주시면 옷은 내일 사람을 시켜 돌려드리겠습니다.”

    “난 본디 도적을 쫓으러 왔소. 한데 그들은 이미 모두 물러갔으니 내 일도 마무리된 셈이오. 그러니 낭자를 현성까지 호위해드려도 될 듯한데, 어떻겠소? 옷을 돌려주는 번거로움도 덜 수 있고 말이오. 게다가 도적떼가 물러났다 해도 난리를 틈타 흑심을 품은 악인들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잖소.”

    여인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심협을 보았는데, 눈빛에는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공자가 그런 악인이 아니라는 걸 내 어찌 압니까?” 하고 묻는 것만 같았다.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알고 있소. 허나 낭자, 내가 악의를 품었다면 지금이 나쁜 짓을 저지르기 딱 좋은 기회 아니겠소? 굳이 쩔쩔매며 낭자를 속일 필요도 없이 말이오.”

    심협의 말에 여인은 잠깐 생각해보더니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소인배의 마음을 품었군요.”

    심협은 여인이 짧은 말 몇 마디에 의심과 염려를 거둘 정도로 순진한 것을 보고는 내심 감탄했다. 이토록 연약한 여인이 어찌 산 넘고 물 건너 먼 길을 마다 않고 춘화현까지 왔단 말인가?

    “괜찮소. 그럼 바로 돌아가지요.”

    심협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치고는 먼저 몸을 돌려 사찰 문으로 향했다. 여인은 두어 걸음 떨어진 채 뒤를 따라왔다.

    “제 이름은 섭채주라고 합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여인이 말했다. 이미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지만, 이로서 여인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게 된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섭 낭자셨군요. 실례했소.”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그런데 천왕전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건물 안에서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체구가 건장하고 험상궂은 두 사내가 천왕전 문짝을 걷어차고 안에서 튀어나왔다.

    섭채주는 화들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심협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발걸음을 멈춘 심협이 천왕전 문어귀를 살펴보니, 허리춤에 무쇠 칼을 찬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참배객이 아님은 그 칼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더욱이 둘 중 한 사람은 얼굴에 칼자국이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눈이 하나만 남은 것이 더없이 험악한 모습이었다.

    “두 분 장사께서는 무슨 일이시오?”

    심협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기품 있게 한 마디 물었다.

    “쯧쯧,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게 재수도 좋구나. 이리 반반한 계집애를 가졌다니 말이야. 클클클.”

    얼굴에 칼자국이 난 사내가 심협의 물음은 완전히 무시한 채, 두 눈으로 섭채주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기생오라비야, 우리를 만난 게 다행인 줄 알아라. 살길이 열렸으니 말이다. 이 계집과 가진 건 모두 남겨두고 가거라. 마침 두목님 부인 자리가 비었으니까. 흐흐흐.”

    외눈박이가 말라서 터진 입술을 핥으며 하나 남은 눈을 가늘게 떴다.

    “허! 정말 대담한 놈들이로구나! 관아에서 이미 사람을 풀었는데도 도망칠 생각도 않는단 말이냐?”

    심협은 짐짓 놀라는 척 두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이 여지없이 겁을 집어먹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이놈아,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도 모르느냐? 관아 놈들은 모두 다른 이들을 쫓으러 갔으니, 우리가 여기 숨어 있다는 걸 누가 알겠느냐! 허튼소리는 그만하고, 썩 꺼지거라! 그렇지 않으면 단칼에 저승으로 보내주마!”

    두 사람은 심협의 말에도 두려워하기는커녕 도리어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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