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78화 (178/1,214)

178화. 혼사

“무엇이 그리 대단합니까? 말씀 좀 해주십시오, 노형.”

“두어 해 전까지만 해도 원주사에는 분명 참배객들이 별로 없었지. 한데 요 이삼 년 사이 그 절에 무슨 고승 대덕이 주지를 맡았는지 아니면 정말 천지신명의 비호가 있었는지, 정말 빌기만 하면 모두 이뤄지는 게, 아주 신통하다네.”

농부는 거의 찬양하듯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나 심협은 그 말을 듣자마자 넋 빠진 뜬소문이라는 생각에 흥미가 사라졌다.

그는 성문 입구로 시선을 돌려 성문의 붐비던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기를, 그래서 성으로 들어가 집에 돌아갈 수 있기만을 기다렸다.

농부는 그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하자 답답한 듯 가슴팍 두들겼다.

“젊은이, 자네 아직 모르지? 그 원주사 관음전(觀音殿) 뒤에 물맛이 좋은 우물이 하나 있는데, 절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소원을 빈 아낙네가 그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집에 돌아가면 반드시 임신을 한다네.”

“정말 그런 신통력이 있단 말입니까?”

심협은 그 말을 그다지 믿지 않았기에, 조금 시큰둥하게 말을 받았다.

“그렇고 말고! 그 우물에는 송자낭랑(*送子娘娘: 도교에서 아이를 점지해준다고 믿는 신)이 든 보병(寶甁) 속 맑고 깨끗한 이슬이 떨어졌다고 다들 그러더군. 들어보니 쉰이 넘은 노부인도 그 물을 마시고 늘그막에 아이를 가졌다던데…….”

심협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웃어넘겼다.

그때, 사람들 사이로 천천히 지나가는 마차가 얼핏 보였다. 그리고 곧 마차 휘장 한 귀퉁이가 올라가더니 약간 앳되지만 오목조목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소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허나 여인이 손에서 힘을 풀자, 휘장은 곧 다시 내려졌고, 마차도 점점 멀어져 갔다.

‘어느 집 여인이기에 저리도 맑고 아름답단 말인가?’

심협은 잠시 넋을 놓고, 멀어져 가는 마차를 보며 약간 허탈해하기까지 했다. 농부가 그에게 길을 비키라고 재촉한 후에야 정신이 들어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끌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는 춘추관으로 떠난 뒤로 지금까지 3년이 넘도록 집에 돌아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막상 문밖에 서서 저택과 현관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묘했고, 집에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때, 대문에서 소박한 옷차림의 노인 하나가 마당으로 나오다가 심협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돌렸으나, 이내 우뚝 멈춰 서더니 다시 눈을 돌렸다. 그리고는 노인의 표정이 미미하게 바뀌더니 비틀비틀 걸어와 눈을 크게 뜨고는 심협을 올려다보았다.

“대, 대공자님이십니까?”

“그렇네, 복백(福伯). 나요. 별고 없으셨소? 하하하!”

심협은 머리의 삿갓을 벗고 웃으면서 말했다.

노인은 그제야 “아이고”를 연발하며 심협이 쥔 말고삐를 끌어당겼다.

“대공자님이 오시길 목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어서 이리 오시지요. 나리께서 아시면 분명 몹시 기뻐하실 겁니다!”

복백이 쉴 새 없이 떠드는 모습에도 심협은 귀찮기는커녕 간만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고향을 떠나 떠돌 때는 결코 받을 수 없는 느낌이었다.

대문에 들어서자 복백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배에 힘을 딱 주고, 앞니가 빠진 입을 열어 큰 소리로 외쳤다.

“대공자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아-!”

그러자 금세 집안 곳곳을 쓸고 닦던 하인들과 하녀들이 후다닥 달려와 심협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뒤이어 검은 담비가죽으로 만든 대창을 두른 마흔 중반의 중년 남자가 후당에서 황급히 달려왔다. 머리에는 회백색 머리칼이 가득했고, 눈가에는 주름이 잡혔지만, 눈에는 감격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자 심협, 아버지를 뵙습니다!”

심협은 다가오는 중년 남자를 보며, 자신이 기억하는 모습보다 조금 더 늙은 것만 같아 눈가가 절로 촉촉해졌다.

“협아…….”

심원각은 그저 이름을 한 번 부르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었다. 그리고는 너무나도 수척해진 아들의 얼굴에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협아! 협이가 돌아왔구나!”

뒤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심협은 몸을 돌려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미모의 부인이 한 쌍의 소년소녀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둘째어머니와 두 이복동생이었다.

“큰 오라버니.”

소녀가 잡고 있던 부인의 손을 놓고 종종걸음으로 심협에게로 달려왔다.

“못 본 사이에 목목이가 꽤 많이 컸구나.”

심협은 손을 내밀어 손짓으로 소녀의 키를 재 보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오라버니, 어찌 이리 야위었어요? 바깥에서 고생을 많이 했나요?”

심목목은 깨끗하고 작은 얼굴에 울 것만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라비는 괜찮으니 걱정 말거라.”

심협은 웃으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큰형님.”

그때, 아우 심사가 다가와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래, 너도 많이 컸구나. 조금 오라비다운 티가 나는걸!”

심협은 손을 뻗어 아우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하지만 소년은 여전히 큰형인 그를 두려워하는 듯, 무의식적으로 눈길을 피했다.

“다들 서서 이럴 게 아니라 대청으로 돌아가 앉아서 이야기 하자꾸나. 복백은 주방에 잔치 준비를 풍성히 하라고 이르게.”

부인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둘째어머니,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저 평소 집에서 먹던 음식이면 됩니다. 집을 몇 년 동안 떠나 있었더니 정말 그리웠거든요. 물론 아버지와는 몇 잔 마셔야지요. 하하하!”

잠시 후, 그들은 대청의 원탁에 둘러앉았다.

심원각이 상석에 앉았고, 심협은 그 옆에 앉았으며, 심목목은 굳이 그의 옆에 딱 붙어 앉았다. 그녀는 심협이 수행을 하러 떠났음을 알고 있었기에 물어보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았지만, 지금은 부모님이 모두 옆에 있어 겨우 참았다.

둘째 부인은 심사를 데리고 그들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는데, 줄곧 온화하고 기쁜 얼굴로 심협을 보았다.

심협은 둘째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진실해 보여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심원각이 물었다.

“협아, 내 보름 전에 건업성으로 편지를 보냈으니 아무리 빨라도 이제 막 편지를 받을 줄 알았는데, 어찌 이리 빨리 온 것이냐?”

“편지요? 소자는 한 달 전에 이미 건업성을 떠난 터라 편지는 받지 못했습니다.”

심협이 의아한 듯 말했다.

“네가 편지를 받지 못했던 게로구나. 그래 어쩐지.”

“갑자기 편지를 보내시다니, 집안에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심원각은 온화하게 웃었으나, 심협은 다소 긴장해 되물었다.

“아니다, 협아. 무슨 급한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 혼사 때문이란다.”

심원각이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둘째어머니가 선수를 쳤다. 그 말을 할 때 그녀는 눈가에 생기가 넘치는 것이 아주 즐거워 보였다.

그러나 심협은 오히려 더욱 얼떨떨해졌다.

“혼사라니요? 심사와 목목 모두 혼인을 하기에는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이 아이들이 아니라 네 혼사란다. 호호호!”

둘째어머니는 손을 들어 심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요? 둘째어머니, 농담하지 마십시오. 저는 산에 들어가 수행을 하고 있는데, 혼사는 무슨 혼사란 말입니까?”

심협은 손을 내저었다.

“협아, 농담이 아니다. 정말 네 혼사 이야기야. 게다가 어려서부터 정해진 혼사란다. 단지 전에는 네가 음기에 해를 입는 바람에 네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이다.”

심원각이 거들자, 심협은 당황해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지.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네 정혼자의 이름은 섭채주(聶彩珠)다. 네 먼 친척 이모의 딸이니 따지자면 네 이종사촌 누이로구나. 너보다 두 살 어리지. 너의 먼 친척 이모라는 이는 비록 네 어머니와 친자매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좋았다. 너희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이 이미 혼사를 정했단다.”

“아버지, 그런 친척이 있다면 왜 저는 왕래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겁니까?”

심협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혼사 이야기에 어째서인지 거부감이 생겼다.

“말하자면 긴 이야기다. 네 사촌누이 일가가 아주 오래 전에 운주(雲州)로 옮겨 가서 주루와 전당포를 운영했다. 듣기로는 완전히 자리를 잡아 집안 형편이 꽤 넉넉하다지? 한데 나중에 네 어미가 병으로 세상을 뜬 뒤, 그 친척 이모 역시 세상을 뜨면서 우리 두 집안이 거의 연락이 끊겼던 게다.”

심원각이 차근차근 말했다.

“이미 연락을 끊은 마당에 갑자기 혼사 이야기가 나온 겁니까?”

“그래, 본래는 연락이 끊긴 뒤로 혼사에 대해서는 두 집안 모두 거론한 적이 없다. 하여, 나도 없던 일로 여기고 있었지. 한데 보름 전에 너의 그 사촌누이가 천 리 길도 마다치 않고 갑자기 찾아왔지 뭐냐.”

심원각도 다소 당황스러웠던 듯 설명하자, 심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섭가에서 혼약을 지키러 찾아왔단 말입니까?”

“섭가의 일을 책임지는 어른이 아니라, 네 사촌누이 혼자서 몸종 하나만 데리고 우리를 찾아왔단다. 나도 그 점이 좀 이상하긴 하더구나.”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아버지께서는 섭 소저에게 왜 홀로 찾아왔는지 물어보셨는지요?”

심협은 이제 단순한 의문이 아니라 의심이 깊어져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협아, 다른 것은 신경 쓸 필요 없단다. 어쨌거나 혼약이 있었으니까. 사실 손해 보는 일도 아니지. 게다가 섭 소저는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 자태가 정말이지 선녀가 강림한 것 같더구나.”

둘째어머니가 불쑥 끼어들었는데, 말끝마다 섭 소저에 대한 칭찬이었다.

“오라버니, 채주 언니는 정말 예뻐요. 사람도 온화하고, 목목에게도 잘해줬고요. 채주 언니가 목목의 새언니가 된다면 정말 좋을 거예요. 헤헤헤.”

심목목마저 방끗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들어보니, 섭가에는 자식이 채주 하나뿐이더구나. 그러니 금이야 옥이야 키우지 않았겠니? 우리 협아가 그 아이를 아내로 맞는다면 틀림없이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게야.”

둘째어머니는 또다시 싱글싱글 웃으며 덧붙였다.

“큼큼.”

심원각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둘째어머니는 그제야 말을 멈추고 조심스레 심협의 기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심협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물었다.

“그 섭 소저라는 분이 어째 안 보이는군요?”

“채주 언니는 아침 일찍 원주사에 향을 올리러 갔어요. 아마 점심때나 돌아올 거예요.”

심목목이 바로 대답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혼약에 대해서는 끝내 어떤 답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났다는 약혼녀에게 선입견을 가진 건 아니지만, 그녀에게 빌붙어 섭가의 덕을 보고자 하는 둘째어머니의 말은 듣기가 좀 불편했다. 그래서인지 이 혼사에 대해 약간의 반감도 들었다.

‘더욱이 나는 이미 수선에 발을 들이지 않았는가? 속세의 사랑 따위에는 아무런 흥미가 없는데, 곤란하게 됐구나.’

그가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대청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심원각이 호통을 치기도 전에 심가의 하인 하나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오다가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도 다급히 외쳤다.

“나리, 크…… 큰일났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요!”

그제야 대청 안의 사람들도 안색이 급변했다.

“왜 그러는가? 무슨 일이야?”

심협이 다가가 하인르 부축해 일으키며 물었다. 하인은 심협의 얼굴을 잠깐 빤히 쳐다보더니, 그제야 알아보고는 재빨리 답했다.

“대공자님, 성 바깥에 난리가 났습니다. 아까 원주사에 향을 올리러 갔다가 도적 떼를 만났는데, 난리 통에 그만 섭 소저가 사라졌습니다.”

“뭐라?”

심원각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아이고, 그럼 왜 이러고 있는 겐가? 어서 관아에 알리지 않고!”

둘째어머니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미 누군가 관아에 알려 관아 쪽에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또 근처의 수비군에게도 지원을 요청했고요. 한데 섭 소저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요. 흑흑!”

하인이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집안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아 당장 성 밖으로 나가 찾아 보거라!”

심원각이 어두운 낯빛으로 크게 호통을 쳤다.

“괜찮습니다. 제가 가보지요. 섭 소저를 마지막을 본 곳이 어디인가? 섭 소저의 옷차림은 어떻고? 내게 자세히 말해보게.”

심협은 진중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자 하인은 가까스로 진정했고, 자신이 아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자세히 이야기했다.

“아버지, 기다리십시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심협이 대청 밖으로 향하자, 심원각은 하인에게 눈을 부라리며 한 차례 꾸짖었다.

“어서 말을 준비하지 않고 뭐하느냐!”

하인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는 부랴부랴 달려 나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