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77화 (177/1,214)
  • 177화. 초재부의 위력?

    함박눈이 내린 깊은 밤.

    송번현성은 이미 성문을 닫아 건 뒤였지만, 성박 문동(*門洞: 건축 구조에서 안으로 통하는 지붕이 있는 통로) 아래로 사람 하나와 말 한 필이 눈 속에 서 있었다. 삿갓을 쓰고 몸에는 새하얀 대창(*大氅: 겉옷)을 두른 채 잔뜩 우울한 표정으로 말 등 위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은 바로 심협이었다.

    “진작 알았으면 길을 돌아서 오지는 않았을 텐데……. 송번현은 정말 나와 안 맞는 건가……?”

    그는 짧게 탄식하고는 말 머리를 돌려 성의 동쪽으로 향했다.

    심협은 건업성을 떠나 보름이 넘도록 분주히 달린 터였다. 그런 그가 송번현으로 에둘러 가려고 하는 것은 우대담 부부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지금쯤 린아(麟兒)를 낳았을 텐데, 어찌 지내는지 모르겠군.’

    그러나 뜻밖에도 예전 그 나루터의 초가집은 텅 비어 있었다. 한 차례 수소문 끝에, 심협은 두 부부가 예전에 갑자기 떼돈을 벌어 다른 장사를 하러 이곳을 떠났음을 알게 됐다. 사람들이 말하는 떼돈이 자기가 그들에게 준 은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형편이 좋아졌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성 동편의 번화한 마을에 이르렀다. 아주 멀리서도 마을의 환한 등불 덕에 눈이 내리는 한밤중에도 온기가 느껴졌다.

    마을에 이르러 심협은 말을 끌고 거리를 거닐었다. 말발굽이 청석판에 부딪히며 간간이 맑고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마을의 술집과 객잔들을 둘러보니, 대부분은 이미 문을 닫은 후였다. 그나마 열린 가게들도 한기를 막느라 문마다 두꺼운 문발을 걸어두어, 바깥에서 호객을 하는 점소이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심협은 마을 안쪽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후 주인장의 객잔에 머물 생각이었다.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후미진 마을 한구석을 찾았을 때, 그는 소박하게 꾸며진 예전의 객잔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곳에는 대신 높이 솟은 문루(門樓)에 화려하게 치장한 새 객잔이 서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문머리에 신선거(神仙居)라는 세 글자가 큼지막하게 쓰인 금색 편액이 걸려 있었다. 편액은 무척 깨끗한 게, 새것 같았다.

    “후 주인장의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이미 가문을 바꾸어 신분상승을 한 걸까?”

    심협은 그렇게 생각했다.

    상황이 이리 되고 보니 이제 어디에 묵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심협은 말을 잘 매어두고 객잔의 문발을 걷어 올렸다. 그 순간, 코를 자극하는 음식 냄새에 그는 식욕이 돌아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객잔 내부도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완전히 새로 뜯어고친 것 같았다.

    이미 한밤중이었지만 객잔의 대청 안에는 손님들이 적지 않았다. 다소 떠들썩하긴 했지만, 분위기는 훈훈했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겨났다.

    가게 점원은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게 뛰어 다니다가 심협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자리로 안내했다. 이어서 따뜻한 차를 한 잔 내주며 물었다.

    “손님, 먼저 따뜻한 차로 몸을 좀 녹이시지요. 요기를 좀 하시렵니까, 아니면 여기에 묵으시렵니까?”

    “묵어가려 하오.”

    심협은 삿갓을 벗어 탁자 위에 올려두며 답했다.

    “알겠습니다요. 남은 객실이 몇 개 있으니 일단 손님께서 배를 좀 든든히 채우시고 나면, 소인이 안내해드리지요.”

    점원은 영리한 사람인지 재빨리 시중을 들며 말했다.

    “이 가게의 간판요리는 무엇이오?”

    심협의 물음에 점원이 막 대답을 하려는데, 옆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 공자? 심 공자님이십니까?”

    심협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낯익은 얼굴 하나가 보였다.

    “소삼자?”

    심협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불렀다.

    “정말 공자님이시군요. 심 공자님!”

    푸른 장삼을 입은 젊은 점원이 황급히 다가와 반갑게 외쳤다.

    “여기는……?”

    심협은 사방을 둘러보며 슬쩍 물었다.

    “좀 많이 변했지요? 모두 심 공자님 덕분입니다.”

    소삼자의 희희낙락한 목소리에도 심협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공자님,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바로 가서 주인어른을 불러 오겠습니다. 주인어른도 공자님께서 오셨다는 걸 알면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하하하!”

    소삼자는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총총히 후당(後堂)으로 향했다.

    가게 안의 다른 손님들은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영문을 몰라 했고, 앞서 심협을 맞이했던 점원도 다소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그는 가게에서 새로 뽑은 점원이었는데, 지금껏 소삼자가 저리 감격해 하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원외모를 쓴 중년 남자가 부랴부랴 후당에서 뛰어 나왔다. 바로 후 주인장이었다. 다만 그의 몸매가 기억하는 것과 달리 제법 뚱뚱해져 바로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아이고, 정말 심 공자님이시군요. 가시지요. 위층의 별실로 가십시다. 소삼자, 주방에 좋은 술과 음식을 준비하라 일러 방으로 들이거라.”

    심협을 본 주인장의 표정은 소삼자보다 더욱 감격에 차 있었다.

    “어찌 이러는 것이오?”

    심협은 더욱 아리송해져 물었으나, 일단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라도 후 주인장을 따라 2층 별실로 올라갔다.

    “선사께서 누추한 가게에 다시 왕림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심협이 앉자마자 후 주인장은 공손히 절을 했다.

    “주인장, 왜 이러시는 거요?”

    심협은 재빨리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물었다.

    “설마 심 선사께서는 잊으신 겝니까?”

    후 주인장이 웃으며 말했다.

    “잊다니, 주인장께서는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거요?”

    “귀인은 일을 잘 잊는다더니, 정말 그렇군요. 하하! 심 선사님, 선사께서는 우리 신선거의 귀인이십니다. 전에 제게 초재부를 한 장 써주셨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후 주인장이 두 손을 맞비비며 말했다.

    “아, 그런 일이 있긴 했었지.”

    후 주인장이 이렇게 일깨워주자, 심협은 바로 기억이 나긴했다.

    “심 선사님, 제가 그 말에 따라 가게에 그 초재부를 붙인 뒤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갑자기 장사가 잘되기 시작했지 뭡니까. 매상이 배는 올랐지요. 이게 다 심 선사님 덕입니다요.”

    후 주인장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부적은 단지 재물과 운을 끌어들일 뿐, 붙잡아둘 수 있을지는 재운이 모이는 곳이 덕을 많이 쌓은 집인가에 달려 있소. 덕을 많이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후에 복이 있으니, 후 주인장은 복이 많은 사람이라 그런 이득을 보는 게 마땅하오.”

    심협도 그제야 웃으며 말했다. 애초에 그가 초재부를 그릴 때, 미미한 감응이 있긴 했어도 정말 효과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확신이 없었다. 어쨌거나 재물운이란 다른 운과 마찬가지로 너무 허무맹랑해서 종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후 주인장은 초재부의 위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두 사람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소삼자가 두 점원과 함께 진수성찬을 줄줄이 받쳐 들고 들어와 상에 한 가득 차려놓았다.

    심협은 벽곡기에 접어든 후로 음식을 먹지 않아도 천지의 영기를 흡수하여 배를 채울 수 있었기에 쉬이 배고픔을 느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맛있는 음식에 이끌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는 후 주인장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배부르게 먹고 마셨다.

    음식을 다 먹어갈 즈음, 후 주인장은 주흥이 일어 방에 한 번 다녀왔는데, 손에는 푸른 표지에 실로 묶은 낡은 서책이 하나 들려 있었다. 표지에는 벌레가 먹은 자국이 있고, 종잇장도 이미 누렇게 변색되어 꽤나 오래된 서책인 듯했다.

    “심 선사님. 이건 우리 후가의 조상님께서 남기신, 부적에 관한 서책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어봐야 필요 없으니 선사님께 드리고자 합니다. 좋은 인연을 맺은 것으로 여기고 이 책도 묻히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 부디 사양치 마시지요.”

    후 주인장은 이미 술기운이 얼큰하여 얼굴이 발그레해져서는 말했다.

    “조상께서 전해주신 물건을 어찌 함부로 남에게 줄 수 있겠소? 심모는 절대 받을 수 없소.”

    반면 심협은 취기가 전혀 없었기에 재빨리 손을 저으며 거절했다.

    “심 선사께서는 전에 제게 큰돈을 벌면 그때 보답하라고 말씀하셨지요. 기억하십니까? 생각해보니 금은보화 따위는 선사님의 눈에 들지 않을 터. 제가 선사님께 보답할 수 있는 건 이 물건뿐인 듯합니다.”

    후 주인장이 간곡한 목소리로 청하자 심협도 망설이기 시작했다.

    “심 선사께서는 사양치 마십시오. 저로서는 이 책이 진짜인지조차 판단할 길이 없습니다. 집에 둬봐야 벌레들 배만 불릴 뿐이나, 선사님 손에 넘긴다면 귀한 보배를 빛나게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사양치 말아주십시오.”

    “그리 말씀하신다면 이 심모가 더 사양하는 것도 예가 아니겠군요.”

    심협은 그제야 고마운 마음으로 서책을 받아 슬쩍 펼쳐보았다. 필적은 끝이 송곳처럼 뾰족한 붓으로 쓴 초서체로, 얼핏 봤을 때는 조잡해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무척 짜임새가 있었다. 그러나 심협은 필법에 대해서는 조예가 깊지 않았기에 필법만으로는 그다지 깊은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책에 기록된 부적은 일고여덟 개뿐이었지만, 각 부적을 그리는 방법과 효과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고, 찢겨져 나갔던 초재부도 원래 자리에 끼워져 있었다.

    술과 음식을 넉넉하게 먹은 뒤, 주인장은 거나하게 취해 흥에 겨워 돌아갔고, 심협도 객실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작별을 고하고 객잔을 떠났다.

    그는 송번현을 떠난 뒤에도 곧장 춘화현성으로 가지 않고 청화산으로 향했다.

    산 아래의 토집진은 그다지 변한 것 없이 원래 모습 그대로였고, 거리를 거닐다가 가끔 낯익은 얼굴도 한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심협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라 다른 이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토집진의 홍운루(鴻運樓)에서 점심을 먹고 서둘러 산으로 올라갔다.

    산은 눈으로 뒤덮여 본래 춘추관으로 통하던 길을 거의 찾을 수 없었고, 대부분 길이 말을 타고는 갈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심협은 말을 숲속에 묶어놓고 걸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심협은 어렵사리 춘추관을 찾았으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너무도 낯설게 변해 있었다. 산문은 완전 무너져 내렸고, 곳곳의 대전과 가옥들도 불에 타버렸다. 큰 눈이 내리면서 가려졌음에도, 여전히 곳곳에서 불에 탄 참혹한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심협은 자신이 기거했던 청석평도 한차례 둘러보았다. 그곳 역시 불에 타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산문과 천왕전 그리고 옥황전 등 춘추관의 중요한 옛터를 찾아가 청향 세 개씩을 피우고 제를 올린 뒤에야 심협은 산을 내려갔다.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원래 자리에 춘추관을 재건하리라!’

    춘화현성에 돌아갔을 때는 이튿날 새벽이었다.

    현성의 성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지만, 심협은 문동 밖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아득한 새벽 종소리가 울리자, 현성 성문이 마침내 안을 향해 천천히 열렸다. 그런데, 심협이 미처 문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성문 안에 모여 있던 수많은 백성이 성 밖으로 몰려나오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던 심협은 우선 성으로 들어가 농부들 틈에 섞여 함께 한쪽으로 피했다. 그런데 주변 농사꾼들의 표정이 느긋한 것을 보니, 이런 일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았다.

    “노형,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백성들이 왜 아침 댓바람부터 모두 성 밖으로 몰려나가는 겁니까?”

    심협은 까무잡잡한 농부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젊은이는 외지에서 왔나 보구먼?”

    농부가 심협을 한번 훑어보더니 말했다.

    “집은 성 안에 있습니다만, 오랫동안 여행을 좀 했지요.”

    “어쩐지……. 저 사람들 모두 성 밖의 원주사(圓珠寺)에 향을 올리려고 서둘러 가는 거라네.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 원주사에서 늘 절 문을 여는데, 잿밥을 보시할 뿐만 아니라 신도들에게 절에 들어가 향을 사르고 기원하게 해주거든.”

    농부의 설명을 듣고도 심협은 여전히 의아했다.

    “원주사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지어진 지 꽤 되지 않았습니까? 한데 참배객이 이리 많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건 옛날이지. 지금 원주사는 얼마나 신통하다고!”

    농부는 한 손을 허리춤에 얹고는 다른 손을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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