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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76화 (176/1,214)
  • 176화. 배반

    때는 한창 엄동설한이라 온 천지가 꽁꽁 얼어붙은 가운데, 건업성에는 얼마 전 내린 큰 눈으로 온통 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그 은빛 풍경 사이로, 백학성과 백강풍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뒤따르던 백소운은 두 사람을 따라잡기 위해 기를 썼다.

    잠시 후, 그들은 호숫가에 서서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호수의 수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백소운은 가까이 다가가 뭔가를 물으려 했으나, 그때 수면의 얼음층 아래에서 갑자기 물결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유유히 회전하는 것이 얼핏 보였다.

    “저, 저게 뭡니까?”

    백소운이 놀라서 물었다.

    “이곳 호수의 영기가 방해를 받아 생겨난 소용돌이로구나.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면, 심협이 있는 밀실은 바로 이 소용돌이 아래에 있을 게야. 그는 분명 벽곡기 돌파에 성공했을 테고 말이다. 하하하!”

    백학성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정말입니까? 심 대형이 성공했다고요?”

    백소운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지금 그는 아마 천지의 영기를 받아들여 법맥 응련을 시도하고 있을 게다. 다만 몇 줄기나 응련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소용돌이가 꽤 큰 걸 보니 적어도 세 줄기는 될 겁니다. 허나, 12정경(*十二正經: 모든 경맥의 기본이 되는 12개의 경맥, 12경맥이라고도 함) 중 어느 세 가지인지 모르겠군요.”

    백강풍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잠시 생각하던 백학성이 대답했다.

    “내 생각에는, 심협이 수련하는 공법은 물 속성으로 음에 속하니, 응련된 법맥은 대부분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 수궐음심포경(手厥陰心包經), 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과 족태음비경(足太陰脾經),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 족소음신경(足少陰腎經)이 여섯 가지 맥 중 하나일 게다.”

    백강풍이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 * *

    호수 밑 깊은 곳 밀실. 눈구멍이 살짝 꺼진, 다소 앙상한 청년이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옷은 너덜너덜해 거지와 다름없어 보였다. 그러나 두 눈동자만은 등불처럼 환하게 빛났다. 바로 심협이었다.

    지난 수개월 동안 그는 지령단을 연달아 복용하고 연기기의 난관을 돌파하려 시도했으나, 앞의 두 번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두 달 전, 마지막 지령단을 복용하고 나서야 마침내 가까스로 난관을 돌파하고 단전 안의 법력을 기체에서 액체로 응결하여 본격적으로 벽곡기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금껏 출관할 수 없었던 이유는, 법맥을 응집하는 단계가 아직까지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꿈에서와는 다르게, 심협이 법맥을 응련하는 과정은 몹시 힘들었다. 처음으로 오행 중 물에 속하는 족소음신경을 스스로 파괴했다가 다시 뭉치게 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스스로 경맥을 망가뜨릴 때의 극심한 고통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족소음신경은 끊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자연히 법맥을 응련할 수도 없었다.

    뒤이어 심협은 수소음신경과 수궐음심포경을 연달아 시도해봤지만,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대로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던 그는 12정경 모두를 시험해보았다. 그러나 끝내 어느 경맥도 뜻대로 파괴하지 못했고, 응련법맥의 고통을 감수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심협이 시험 삼아 기경팔맥(*奇經八脈: 12경맥의 부족을 보충하여 기혈의 운행을 조절하는 특수한 8개의 경맥) 중 독맥(*督脈: 주로 양기와 진기를 통솔하는 맥)을 응집했을 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전에 없던 극심한 고통이 그를 완전히 집어 삼켰고, 독맥이 마디마디 터지고 갈라져 스스로 파괴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그 순간, 심협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거의 의식을 잃어가면서도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그런 모순된 감각 속에서 첫 번째 법맥을 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 역시 꿈속과는 전혀 달랐다. 법맥을 다시 만들어내는 속도는 터무니없이 느려졌고, 뼈가 녹아내리는 아픔도 수십 배는 더 길어져 매순간 지옥을 겪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전에 법맥을 응련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심협은 그 고통에 익숙했다. 또한 응련 과정에서도 별다른 시행착오를 겪지 않아, 마침내 가까스로 첫 번째 법맥을 응련해내는 데 성공했다.

    밀실 사방의 벽에 새겨진 법진 문양은 여전히 빛났고, 천지의 영기가 사방에서 대량으로 모여들어 새로 응결된 그의 대맥에 주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의 아랫배 부분을 한 바퀴 돌며 마치 푸른 허리띠처럼 둘러쌌다.

    심협이 몸 앞에 원을 감싸듯 두 손을 결인하자, 몸 앞뒤의 임맥(任脈)과 독맥에서도 동시에 빛이 났다. 또한 영력이 그 안으로 모여들어 아랫배의 대맥과 종횡으로 교차하면서 여러 빛이 어우러졌다.

    그 순간, 심협은 몸 안에 법력이 충만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신식은 극도로 피곤한 상태였다. 지난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잠을 자거나 쉬지도 않고 수련에 매진하느라 그야말로 극한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상태로는 다른 법맥의 응련을 시도해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단전과 법맥 안에 더는 일말의 법력도 수용할 수 없게 됐을 때, 심협은 마침내 법결을 거둬들이고 수련을 멈췄다.

    “이 몸뚱이의 자질은 여전히 못 써먹겠군. 꿈속과는 정말이지 천지차이잖아!”

    심협은 자조하듯 투덜거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석합을 정리해 챙긴 뒤 밀실을 빠져나갔다.

    호수 바깥에는 이미 백학성과 함께 온 두 사람뿐만 아니라, 심상치 않은 영기를 느끼고 모여든 백가 객경들도 적잖게 함께 있었다. 다만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각이라, 궁금해 하는 이도, 의심스러워하는 이도 있었다.

    그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가운데, 심협은 봉두난발을 한 채 가산 입구에서 걸어 나왔다. 온통 새하얀 사방에 반사된 빛이 약간 눈부셔서, 그는 손으로 이마를 가린 후에야 주위 상황을 똑똑히 보고는 약간 당황했다.

    “심 대형…!”

    백소운이 크게 외치며 달려와 심협의 어깨를 덥석 끌어안았다.

    “어, 어찌 다들 여기 계십니까?”

    심협은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우리 백가에 벽곡기 객경이 또 하나 늘지 않았는가. 이건 절대 작은 일이 아니니 당연히 와서 축하를 해야지. 하하하!”

    백학성이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이 말에, 주위에 모여 든 사람들은 심협이 돌파에 성공했음을 확신했다. 그와 사이가 좋았건 나빴건, 모든 객경은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벽곡기 초기인 심협의 수련 경지가 그토록 놀라운 것은 아닐지도 모르나, 근 1년여의 짧은 시간 만에 벽곡기로 올라섰다는 사실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심협은 객경 무리에 사우흔이 없음을 알아챘으나,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그는 자리에 모인 사람들과 하나하나 짧게 인사치레를 나눈 뒤, 비로소 자기 숲속 작은 집으로 돌아갔다.

    백소운이 하녀 몇 명을 이끌고 부랴부랴 찾아와서는 그를 도와 사람이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던 방을 다시 한번 청소해주었고, 더운 물을 가져다주었다. 덕분에 심협은 간만에 깨끗이 몸단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다소 초췌해 보였지만, 용모는 전보다 훨씬 더 훤해져 있었다.

    하녀들은 분분히 떠나가고 백소운만이 남았다. 그는 심협에게 고등 객경 영패와 축하 선물로 선옥 20개를 건넸다.

    “아버지께서는 진작부터 영패를 심 대형에게 주고 싶어 하셨소. 다만 집안 규칙에 맞지 않았으니 심 대형에게 불필요한 말썽을 일으킬까 우려하셨지요. 이제 심 대형은 이미 벽곡기 수사이니, 인정으로 보나 이치로 보나 합당한 자격이 있소. 선옥은 아버지께서 개인적으로 주시는 축하선물이오. 백부의 고등 객경들이 함께 준비한 선옥 20개도 있는데, 집안 장부를 거치느라 조금 늦어지고 있소.”

    백소운은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심협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주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시오. 조만간 내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올릴 테니.”

    심협이 환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그건 그렇고, 얘기 좀 해주시오. 어찌 그리 짧은 시간 안에 벽곡기까지 수련한 것이오? 난 1년 동안 겨우 연기기 3층에 이르렀을 뿐인데…….”

    “오직 부지런했을 뿐이오.”

    백소운이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물었으나, 심협은 미적지근하게 답했다.

    “그게 다요?”

    “다요.”

    “그…… 겨우 그거요? 심 대형, 거 너무 얼렁뚱땅 넘기는 거 아니오?”

    백소운은 실망한 듯 가볍게 투덜거렸다. 그런데 말끝에 안색이 살짝 어두워지는 것이 뭔가 근심이 있어 보였다.

    “무슨 일 있소?”

    심협이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심 대형, 내 솔직히 말하겠소. 심 대형이 폐관하는 동안 집에 일이 좀 생기긴 했소.”

    “문제? 무슨 문제 말이오?”

    백소운이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사우흔이 배반하고 도망을 쳤소.”

    “사 도우가? 배반하고 도망갔다고? 그녀가 왜 그랬단 말이오?”

    심협의 표정이 살짝 굳어 갔다.

    “그걸 모르겠소. 그녀가 우리 백가의 강신술 비적(秘籍)을 훔칠 거라고 어찌 예상했겠소? 어쩌면 처음 우리 백가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게 목적이었을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녀는 건업성 밖으로 도망쳐 지금까지 종적을 감췄소.”

    백소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쩐지, 오늘 출관할 때 객경들 표정이 좀 이상하더라니…….”

    심협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심 대형, 이제 심 대형이 그녀의 자릴 대신해 우리 백가 객경들 중 유일한 벽곡기 수사가 되었소.”

    백소운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심협은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 * *

    또다시 한 달이 흘렀다.

    심협은 몸이 좀 회복되자 고향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을 떠나 있던 1년여의 시간 동안 춘화현성 쪽에는 요마의 종적 따위가 있다는 얘길 듣지 못했다. 게다가 이제 벽곡기에 들어섰으니 어느 정도 스스로를 보호할 자신도 생겼다. 춘화현으로 돌아갈 시기가 된 것이다.

    그는 백학성에게 고한 뒤, 석합을 메고 귀향길에 올랐다.

    백학성은 백강풍과 함께 배웅해주었다. 그들은 심협에게 마차와 시중 들 하녀까지 붙여주려 했다. 그러나 그는 빠른 말 한 필만 내어줄 것을 청했고, 나머지는 모두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번에 집에 돌아가거든, 영당(*令堂: 상대방 어머니에 대한 존칭)께 안부 전해주시게.”

    백학성이 웃으면서 말했다.

    “꼭 그리 하겠습니다.”

    심협이 포권으로 답했다.

    “심 소자(小子), 집안에 별일 없거들랑 일찍 돌아오게나. 이 늙은이가 부적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어서 자네와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으니까.”

    백강풍도 웃음을 띠고 말했다.

    “수행의 길에 들어선 이상, 집에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을 겁니다.”

    심협은 이번에도 웃으며 답했다.

    “그럼 되었네. 하하하!”

    백강풍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한데 어째 소운이 안 보이는군요? 또 폐관에 들어간 것은 아니겠지요?”

    심협은 백소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조금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

    “그놈도 고집불통이지. 집에서는 수행이 너무 더디다고 편지 한 통 남겨두고 떠났네. 기연을 찾으러 장안으로 갈 거라던가. 아마도 화생사로 간 것 같네. 그래서 내 그쪽의 오랜 벗에게 서신을 보내두었지.”

    백학성은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심협은 문득 백소운이 자신에게 수행에 대해 물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제야 그가 이미 떠날 생각이 아니었나 싶었고, 어쩐지 흐뭇해졌다.

    “보아하니 소운이 정말 수행에 뜻을 세운 것 같군요. 다시 봐야겠습니다.”

    심협이 웃으며 말하자, 백학성도 말없이 웃었다. 부모로서의 걱정과는 별개로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작별인사를 끝낸 심협은 말을 끌고 건업성을 나가 춘화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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