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75화 (175/1,214)

175화. 1년간의 폐관수련

한편, 흑문 무리들은 여전히 골짜기 출구에 있었다.

어느덧 동쪽 하늘이 점점 밝아왔고, 골짜기 안에 남은 자는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심협과 사우흔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어찌 된 일이냐? 어찌하여 그 두 인간족 수사(修士)를 찾지 못한 게냐?”

흑문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저희가 밖에서 지키고 있다는 걸 그놈들이 알아채고 아직 골짜기 안에 숨어 있는 건 아닐까요?”

시종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럴 리 없다. 귀시는 곧 닫힐 터. 인간족 수사라면 급히 인계로 돌아가려 할 터인데, 어찌 골짜기 안에 머물 수 있겠느냐? 네 관영경(觀影鏡)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

흑문이 꾸짖듯 되물었다.

“관영경은 흑산 노조께서 친히 만드신 것입니다. 벽곡 후기 수사의 환술도 꿰뚫어볼 수 있지요. 그 심가 놈은 아마 연기기 수사일 테니, 관영경의 수색을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그럼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이냐?”

적의의 시종이 고개를 젓자 흑문은 성을 냈다.

“잠시 더 기다려 보시지요. 그 두 놈은 분명 아직 골짜기 안에 있을 겁니다.”

흑문은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는 탓에 그저 그렇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각, 심협과 사우흔은 전에 남겨둔 표시를 따라 전날 전송된 장소에 이미 도착한 상태였다.

이윽고 동쪽 하늘가가 점점 밝아지더니, 마침내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쿵!

느닷없이 굉음이 울리더니 두 사람의 온몸에 회흑색 안개가 무수히 피어올랐다. 이 안개는 빠르게 사라졌고, 다시 시야가 밝아졌을 때, 그들은 다시 건업성 밖 청송림에 돌아와 있었다.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면을 벗고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이번에 심 도우께 큰 도움을 받았으니, 소녀 훗날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허나 지금 당장은 또 다른 중한 일이 있으니 먼저 가봐야겠습니다.”

사우흔은 약간 초조한 듯 심협에게 인사를 남기고는 곧장 숲 밖으로 달려가 금세 자취를 감췄다. 심협은 다음 번 귀시가 열리는 시간을 아느냐고 물으려 했으나, 그럴 틈도 없이 멀어져 간 것이다.

“됐다. 구혼마면 선배님께서 귀시면구를 찾으러 오실 때 여쭤보면 되겠지.”

심협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건업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 * *

심협은 귀시에서 돌아온 뒤, 반나절쯤 쉬었다가 저녁 무렵에야 백학성의 서재로 찾아갔다.

“몸은 좀 어떤가? 잘 회복되었는가?”

백학성은 심협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주. 보내주신 고약 덕에 이미 완쾌되었습니다.”

심협이 공수하며 답했다.

“지금은 보는 이도 없으니 그리 서먹하게 대할 것 없네. 편하게 백부라고 부르게나.”

백학성이 웃으며 청하자 심협은 다소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백부님. 실은 오늘 백부님을 뵙고자 한 이유는 한 가지 청이 있어서입니다.”

“괜찮으니 말해보게나.”

백학성은 내심 긴장한 듯했으나 여전히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후배가 최근 수행하던 중 깨달은 바가 있어, 한동안 폐관하며 수련의 경지를 한 걸음 더 발전시켜보려 합니다. 하여, 한동안은 객경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

심협의 말에 백학성은 안도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난 또 무슨 일인가 했네.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원하는 대로 해야지. 마음 놓고 가서 폐관하게.”

“감사합니다. 백부님.”

심협이 재빨리 감사를 표하자, 백학성은 인자한 목소리로 말하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내가 자네에게 감사해야지. 소운이 녀석이 요즘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고 들었네. 그게 모두 자네의 공로라지?”

“소운은 심성이 착하고 곧은 아이입니다. 저는 그저 몇 마디 충고만 해주었을 뿐, 무슨 공로가 있겠습니까?”

심협이 겸손하게 나오자 백학성은 한층 흡족해했다.

“그놈 심성은 내가 잘 아네. 온 백가에서 소천의 말만 들으려 하지. 때로는 내 말조차 들은 척도 않는다네. 한데 녀석이 어찌 자네 말을 듣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지 뭔가.”

백학성이 그렇게 운을 떼자, 심협은 멋쩍은 듯 웃었다.

“그건…… 아마 저와 마음이 잘 맞아서겠지요.”

“어쨌든 이 일에 대해서도 사례하겠네. 이 영패는 자네가 잠시 받아두게나. 앞으로 백가 호수 밑 밀실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을 걸세. 이왕 폐관하기로 했으니, 거기로 가게나.”

백학성은 백(白)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옥 영패를 꺼내 심협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백부님.”

심협은 거절하지 않고 공손히 건네받았다.

“아, 그렇지. 혹시 마량 선배님과는 요즘 연락을 하는가? 그분이 아직 건업성에 계시다면 주인 된 도리로 백부에 초대해보고 싶은데 말이야.”

백학성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유감스럽게도, 마량 선배님께서는 며칠 전 건업성을 떠나셨습니다. 헤어질 때 언제 다시 돌아오실 거라는 말씀도 없었지요. 그저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날 거라는 말씀뿐…….”

심협은 잠깐 망설이다가 답했다. 그는 백가에서 구혼마면과 연을 맺고픈 마음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혼마면은 필경 저승의 음신이니 결코 응낙할 수가 없을 터였다.

“그런가? 정말 아쉽게 됐군.”

백학성은 실제로 매우 아쉬운 듯 보였다.

잠시 이야기를 더 나눈 후, 심협은 인사를 하고 서재를 떠나갔다.

깊은 밤, 심협은 깨끗이 정리를 마치고는 석합을 챙겨 자신의 거처를 떠나 호수 밑 밀실로 향했다.

처소의 대문을 닫을 때, 갑자기 목덜미가 서늘한 느낌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뭉게구름 사이로 하얀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다. 어느새 초겨울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심협은 호숫가에 이르러 비밀통로의 장치를 열고 호수 밑바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호수 밑을 지키는 장로에게 영패를 보여준 뒤, 가장 깊은 곳의 밀실을 하나 골라 들어갔다.

밀실의 돌문을 닫은 심협은 부들방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는 성급하게 수련을 시작하기보다는 우선 눈을 감은 채 호흡을 가다듬으며 꿈에서 수련하던 기억을 가만히 떠올렸다. 그러자 과거의 깨달음들이 식해(識海)로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석합을 열고 그 안에서 하얀 옥병 하나를 두 손가락으로 가볍게 집어 들고는 살짝 흔든 후에 병마개를 뽑았다.

병 주둥이가 완전히 열리자, 강렬한 물의 영기 한 줄기가 병에서 흘러나와 순식간에 온 밀실에 넘쳐흘렀다.

심협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병을 조심스레 약간 기울였다. 그러자 곧 이슬방울처럼 투명하게 반짝이는 물방울이 병 주둥이에서 굴러 나와 손바닥 한가운데 떨어졌다.

그 순간, 심협은 싸늘한 기운이 몸 안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반면 단전 안의 법력은 그가 이끌어내지도 않았는데도 뛰쳐나오고 싶어 안달이었다.

심협은 크게 기뻐하며 무명천서의 3층 공법 구결을 조용히 속으로 읊조렸다. 동시에 두 손에서 푸른 빛을 발하며 여러 가닥 실오라기 같은 법력을 모아 삼원진수를 제련하기 시작했다.

그의 우려와 달리, 삼원진수는 무명공법과 아주 잘 맞는 듯 가뿐히 물방울을 법력에 완전히 녹아들게 했다. 그리고는 이를 체내로 돌려 온몸의 혈관을 빠른 속도로 돌도록 했다.

몇 번 호흡할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그의 법력은 체내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속도 또한 꿈속에서보다는 느려도 본래의 수련 속도보다는 몇 곱절 빨랐다.

“과연 좋은 물건이구나!”

심협은 크게 감탄하며 즉시 온힘을 다해 법력을 끌어내 3층 공법 구결에 따라 온몸에 운공을 시작했고, 잠시 후 수련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때, 밀실 네 벽에 새겨진 법진에서도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위쪽 호수의 영기를 흡수해 밀실 안으로 운반하여 바닥의 문양을 따라 심협에게 모여들었다. 이내 심협의 온몸에서는 푸른 빛이 넘실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푸른 물결 위에 앉아 유유자적하는 것만 같았다.

* * *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지난 반년 남짓한 동안 심협은 간간이 폐관을 거듭했다. 꿈속 수행 경험과 삼원진수의 도움으로 수련 경지가 꾸준히 높아졌고, 어느덧 연기기 10층까지 상승해 벽곡기 돌파까지 한 걸음만을 남겨두게 됐다.

그런 그가 얼마 전 다시 호수 밑 밀실에 들어가 폐관을 시작했다. 그리고 또 훌쩍 반년이 더 지났다. 이제 백부의 많은 사람이 그가 이번 폐관에서는 실패했을 거라 추측하기 시작했다.

사실 연기기에서 벽곡기로 돌파하는 것은 수행 길에서의 큰 난관이었다. 법력을 기체에서 액체로 응결시키기란 결코 쉽지 않기에 많은 사람이 이 관문을 끝내 넘지 못한다.

그 무렵, 백학성의 서재에는 백가 3대가 모여 있었다.

“심협의 이번 폐관은 너무 오래 이어지고 있네. 아직 벽곡기에 이르지 못했고, 벽곡단을 지니지도 않은 그가 이리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 걸 보면 뭔가 문제가 생긴 듯해.”

왜소한 체구의 백강풍이 그늘이 드리운 얼굴로 말했다.

“확실히 시간이 좀 오래되긴 했지요. 허나 보통은 돌파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밖으로 나왔을 겁니다.”

백학성이 잠시 생각하더니 약간 걱정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옆에 있던 백소운이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도 폐관수련을 하고 있다가 오늘 오전에 막 연기기 3층을 돌파하고는 심협을 찾아가 기쁨을 나누려 했으나, 심협이 폐관에 들어가 반년 넘게 나오지 않고 있어 그럴 수 없었다. 이에 그는 즉시 달려와 아버지 백학성에게 심협의 상황을 물은 것이다.

“심협은 그전의 반년 동안 수행이 놀랍도록 순조로워 순식간에 연기기 10층에 이르렀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기뻐하기만 했지, 그 안에 위험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단다. 지금 그가 반년이 넘도록 폐관을 이어오고 있는데도 출관하지 않으니, 수행에 문제가 생겼을까 걱정이구나.”

백학성이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진 것은 아니겠지요?”

백소운이 무의식 중에 내뱉었다.

“그런 일은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니지. 솔직히 나도 걱정이 되긴 하는구나.”

백강풍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뭘 더 기다립니까? 당장 가서 밀실을 열고 그를 구해내야지요!”

“소운아, 진정하거라. 어린애처럼 무슨 꼴이냐! 심협의 이번 성공여부는 우리 백가에도 의의가 크니 신중히 대처해야만 한다.”

백학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꾸중했다. 그러나 백소운은 그 말에 불만이 폭발한 듯 오히려 목을 꼿꼿이 세우고 대들었다.

“그일 때문 아닙니까! 본디 우리의 실수인데, 어찌 심 대형에게 위험을 감수하게 한단 말입니까?”

“망할 놈. 철이 좀 든 줄 알았더니만, 여전히 큰 그림을 못 보는구나!”

백학성은 결국 버럭 화를 냈다.

“소운아, 주화입마는 그저 짐작 아니더냐. 오히려 우리가 제멋대로 뛰어 들어갔다가는 그의 도행을 망쳐 진짜로 주화입마에 빠지게 만드는 꼴이 될 수도 있느니라.”

백강풍 역시 그를 뜯어말렸다.

“구하는 것도 안 되고 구하지 않는 것도 안 된다니, 그럼 도대체 어찌 해야 합니까?”

백소운이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따졌다.

“그렇다면 사흘만 더 기다려보고, 그때까지도 아무런 동정이 없으면 밀실을 열고 들어가 보자꾸나.”

“그 수밖에는 없겠군요.”

백강풍과 백학성은 눈빛을 교환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백학성은 표정이 급변하더니, 황급히 걸어가 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아득히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백강풍도 뭔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는 곁으로 다가왔다.

백소운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봐도 어둑한 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 있을 뿐이었다.

“셋째 할아버지? 아버지? 무슨 일입니까?”

백소운은 참지 못하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움직임은…… 후원의 정호(靜湖) 쪽인데…… 설마……?”

“일단 가보시지요.”

백강풍의 머뭇거림에 백학성은 낮게 외치고는 앞장서서 방문을 뛰쳐나갔다. 백강풍도 그 뒤를 따라 후원을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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