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74화 (174/1,214)
  • 174화. 옥관의 경고

    교역회가 끝난 뒤, 대청 안에 있던 이들은 모두 몸을 일으켜 옥관에게 예를 갖추고는 분분히 떠나갔다. 그러나 흑문만은 옥관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예도 갖추지 않은 채,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대청을 나가버렸다.

    “저 오만방자한 놈!”

    키 큰 가면이 콧방귀를 뀌었으나, 옥관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공평히 주관해주신 것에 대해 선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심협과 사우흔은 앞으로 나아가 옥관을 비롯한 세 사람에게 예를 갖추었다.

    “당연히 공평해야지요. 두 분은 우리 무상각의 손님이니 말입니다. 하하하!”

    키 작은 가면이 웃으면서 답했다.

    “소녀, 무상각이 공명정대하게 장사를 한다는 것은 일찍이 들었사오나, 오늘 보니 소문보다 더욱 훌륭하여 탄복했습니다.”

    사우흔도 마주 웃으며 화답했다.

    가면을 쓴 두 사람은 그 말에 빙긋 웃었지만, 딱히 사우흔의 은근한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먼저 내려가요. 난 이 사람들과 할 얘기가 있으니까.”

    옥관이 손을 흔들자 가면을 쓴 두 사람은 허리를 숙인 후 물러갔다. 이제 대청 안에는 옥관과 심협, 사우흔만이 남게 됐다.

    옥관은 동글동글한 머리를 갑자기 숙이고는 뭔가를 중얼거릴 뿐, 잠시 동안 심협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에 심협과 사우흔은 어리둥절해졌다.

    “옥관 대인?”

    한참을 기다려도 옥관이 입을 열 기미조차 없자, 심협은 사우흔과 눈빛을 한 번 교환하고 그를 불렀다.

    옥관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오래 기다리게 했네. 방금 사존(師尊)께서 전갈을 보내 교역회에 대해 물으시는 바람에…….”

    “그건 괜찮습니다만, 저희를 왜 남으라 하신 겁니까? 분부하실 일이라도……?”

    심협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물었다.

    “나야 아무 일도 없지만, 너희는 일이 생겼지.”

    옥관이 그렇게 말했을 뿐, 헤벌쭉 웃으며 더는 말하지 않고 오동통한 손을 한번 내저었다. 그러자 한 줄기 하얀 빛이 그의 손에서 날아와 세숫대야만 한 광륜(光輪)이 되어 빙글빙글 회전했다.

    잠시 후, 광륜 안에서 영상이 하나 떠올랐다. 영상에서는 두 사람이 걷고 있었는데, 바로 흑문과 적의의 시종이었다.

    “당장 유명귀위(幽冥鬼衛)를 소환하여 골짜기 출구에 흩어 놓아라. 그 인간족 수사(修士) 두 놈과 이상을 놓쳐서는 안 된다! 감히 내 체면을 구겨 놓았으니, 내 그놈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그 영단도 반드시 빼앗아올 것이다!”

    흑문이 벌게진 두 눈에 핏발을 세우며, 살기 어린 표정으로 포효했다.

    “소주, 그 인간족 수사 두 놈을 죽이는 것이야 어렵지 않을 겁니다. 허나 그 이상이란 자는 수련 경지가 이미 응혼기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유명귀위를 동원한다 해도 그를 붙잡아둘 수 없을 겁니다. 또한, 만약 그가 도망이라도 친다면 일이 번거롭게 될 터이니, 그리 되면 노조(老祖)께서도 처리하기 힘이 드실 테지요.”

    적의의 시종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럼 내 체면을 그리 구겼는데도 그냥 넘어가란 말이냐?”

    흑문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보통의 응혼기 수사라면 꺼릴 이유가 없겠지만, 이상은 저승의 음신입니다. 노조께서도 저승의 노여움을 사려 하시지는 않을 거고요.”

    시종이 은근히 흑산 노조를 들먹이자 그제야 흑문도 낯빛이 변하더니, 이내 언짢은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흥! 그렇다면 이상은 운이 좋은 셈 치지. 허나 그 인간족 수사 두 놈은 반드시 죽여서 육신을 갈기갈기 찢고, 넋을 불태워야 직성이 풀리겠다!”

    “예!”

    적의의 시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즉시 답했다.

    여기까지 비춘 하얀 광륜은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심협의 표정이 무겁게 변했다. 흑문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고 짐작하긴 했지만, 자신들을 죽이려 들 거라고까지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고에 감사드립니다, 옥관 대인.”

    심협은 일단 옥관에게 포권하며 감사를 표했다.

    사우흔도 무거운 표정으로 옥관에게 포권을 했다.

    “귀시 안에서는 어떤 싸움이든 엄하게 금하는 규칙이 있지만, 일단 이곳을 나가면 금령의 효력은 사라지니 이런 일도 종종 있긴 해. 그래도 우리는 연을 맺은 사이잖아? 그 정을 보아 주의를 준 것뿐이니 조심하도록 해.”

    옥관이 진중한 표정으로 그리 말하자, 심협과 사우흔은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걱정이 컸다.

    흑문 무리의 계획을 알았다고는 해도, 어차피 이 골짜기에는 출구가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어쨌든 마주칠 수밖에 없고, 두 사람의 힘으로는 살아 나가기가 그리 쉽지 않을 터였다.

    “내 기억으로는 여기 귀시가 처음 세워질 때 골짜기 깊숙한 청월애(靑月崖) 근처에 바깥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를 하나 만들었어. 지금도 밖으로 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옥관은 몸을 돌려 대청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서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심협은 그 말에 크게 기뻐하며 옥관에게 예를 다해 물었다.

    “옥관 대인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혹시 대인께서 무슨 분부하실 일이 더 있는지요? 미약하나마 보답하고 싶습니다.”

    “듣자하니 인계에는 맛난 게 아주 많다던데…… 아쉽게도 난 갈 수가 없어.”

    옥관은 그렇게 투덜거리고는 대청 깊은 곳으로 모습을 감췄다.

    “예, 알겠습니다.”

    심협은 허리를 읊조린 뒤, 사우흔과 함께 재빨리 그곳을 떠났다.

    옥관이 대청 깊은 곳의 통로에 들어서니, 가면을 쓴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옥관 대인, 저 인간족 녀석에게 무슨 특별한 구석이라도 있습니까? 이렇게도 챙기시다니 말입니다. 귀시의 숨겨진 길까지 알려주시고…….”

    키 작은 가면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재미있는 녀석이긴 해.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그의 운에 달렸지만.”

    옥관은 게으르게 기지개를 켜고는 다시 걸었고, 두 가면의 인영은 어쩔 수 없다는 눈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따라갔다.

    * * *

    심협과 사우흔은 무상각을 떠나 곧바로 옥관이 말한 청월애를 찾아 골짜기의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산골짜기 깊은 곳은 온통 황무지였는데, 바깥과 마찬가지로 온 땅에 자갈이 널려 있어 황량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두 사람은 금세 골짜기 가장 깊은 곳에 이르렀다. 그러나 절벽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어 나길 길이 없었고, 골짜기 위의 금제가 이곳까지 뒤덮고 있어서 날아갈 수도 없었다.

    동쪽 하늘에는 하얀 빛이 조금씩 떠올라 제법 밝아진 상태였다.

    “심 도우, 지금 몇 시죠?”

    사우흔이 다급한 표정으로 묻자, 심협은 체내 기혈의 흐름을 잠시 살펴보고 바로 시간을 판단했다.

    “인시(寅時) 6각(새벽 4시 30분)이오!”

    “곧 날이 밝을 테니 빨리 움직여야 해요! 늦으면 인계로 돌아갈 수 없어요!”

    “떠날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심협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귀시는 음과 양의 경계에 열려 있어서 날이 밝으면 닫혀서 사라져요. 만약 제때에 떠나지 못하면 음양의 경계를 떠돌며,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수도, 저승에 들어갈 수도 없게 됩니다.”

    사우흔의 엄숙한 목소리에 심협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그게 사실이오?”

    심협과 사우흔은 나갈 길을 찾아 다급히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심협은 주위의 산벽과 다른 푸른 절벽 하나를 발견했다.

    “사 도우. 어서 이리로 와보시오!”

    사우흔은 서둘러 달려와 그 산벽을 잠시 살피고는 눈을 반짝였다. 손을 뻗어 푸른 벽을 더듬어보니 얼음처럼 차가운 느낌이 밀려들었다.

    “이건 청월석(靑月石)이에요. 보아하니 바로 이곳인 것 같군요. 어서 통로를 찾아보죠.”

    그녀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은 그 근처부터 살피기 시작했지만, 산벽이 너무 거대해 짧은 시간 안에 모두 살펴보기는 힘들었다. 이에 심협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손을 품에 넣어 누르스름한 부적을 한 뭉치 꺼냈다.

    부적 뭉치 가장 밑바닥의 노란 부적을 손에 쥐고는 법력을 주입하자, 밝고 하얀 빛이 부적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 빛은 흩어지지 않았고, 지름 1장 크기의 하얀 빛 덩어리를 이뤘다. 이는 그가 스스로 터득해낸 심보부(尋寶符)였다.

    “통로를 찾아라.”

    심협은 짧게 명하고는 부적을 든 채 푸른 벽으로 다가가 산벽을 따라 걸었다. 하얀 빛 덩어리가 비추자, 꿈속 세계에서 봤던 춘추관 산벽의 바위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반투명한 상태로 변했다.

    사우흔은 이 광경에 놀란 눈으로 심협을 바라보았다.

    그때, 산벽을 따라 걷던 심협이 걸음을 멈췄다. 이어서 하얀 빛 덩이가 앞 산벽의 한쪽 구석을 비추자, 그 안에 희미한 검은 구멍이 나타났다.

    “여기인 것 같군요.”

    사우흔이 재빨리 다가와 근처 산벽을 더듬어 찾기 시작했다.

    심협도 산벽 안을 비출 수 있는 심보부의 능력으로 통로의 입구를 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덕분에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특이한 모양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돌을 찾아냈는데, 그 안에는 어떤 기계 장치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사우흔이 돌을 힘주어 누르자, 산벽이 덜그럭거리며 갈라지더니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 너머는 온통 어두워서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심 도우께서 그런 신기한 부적을 갖고 계셨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이 통로를 언제 찾을 수 있었을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가면서 이야기합시다.”

    심협은 심보부에 대한 이야기는 얼버무리며 통로로 들어갔다.

    “그 옥관이란 자가 믿을 만한지 모르겠네요. 통로 안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니, 제가 앞장서지요.”

    사우흔은 그렇게 말하더니 손에서 회색 빛을 번득였다. 그러자 그 빛에서 귀두대도가 나타났다.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는 하얀 빛이 한층 떠올라 몸 앞에 하얀 빛의 방패를 이루었다.

    심협은 자신이 그녀보다 수련 경지가 낮음을 알기에, 고집 부리지 않고 귀소환을 꺼내 든 채 뒤에 따라붙었다.

    두 사람이 통로 안으로 사라지자, 산벽의 장치가 달그락거리며 움직이더니 서서히 닫혔다. 이내 통로는 완전히 가려졌다.

    한편, 무상각의 어느 방안에서는 옥관이 아까와 같은 하얀 광륜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광륜에 떠오른 영상에서는 통로가 닫히는 모습이 나타났다.

    “정말 찾았네. 과연 재밌어. 아하하!”

    옥관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뒤이어 그가 결인하자, 광륜 안의 영상이 빠르게 변하더니 골짜기 입구 풍경이 나타났다.

    산골짜기 안의 상점들은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고, 노점상들도 좌판을 거두었다. 골짜기의 귀물들도 출구를 찾아 떠나갔다.

    흑문은 골짜기 밖의 으슥한 곳에 서 있었다. 곁에 선 적의(赤衣)의 시종이 들고 있는 검고 작은 거울에는 골짜기를 나서는 귀물들의 모습이 비쳤다.

    그 둘 외에도 검은 옷을 입은 20여 명의 귀물이 조금 떨어진 안개 속에서 포위망을 형성한 채, 출구를 막고 있었다.

    “감히 나한테 무례하게 굴었겠다? 어디 평생 기다려봐라. 헤헤헤.”

    옥관은 장난스레 웃고는 한 손으로 결인을 해 광륜을 흩어 없앴다.

    그 무렵, 심협과 사우흔은 정신을 가다듬고 통로를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다행히 어떤 위험도 나타나지 않았고, 두 사람은 곧 통로 끝에 이르렀다. 통로 끝에는 돌벽 하나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심협은 다시 심보부를 꺼냈고, 이내 장치가 있는 곳을 찾아냈다.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앞의 돌벽이 양쪽으로 갈라지자, 폭이 1장에 이르는 출구가 나타났다. 문 밖으로는 깊고 어두운 밤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나왔다.”

    두 사람은 통로 밖으로 나오자마자 경계하며 주변 상황을 잠깐 살핀 끝에, 그곳이 골짜기 바로 뒤라는 걸 알게 됐다.

    “여기는 오래 머물 만한 곳이 아니에요. 흑문이 골짜기 출구에서 우릴 찾지 못하면 여기까지 추적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심협도 사우흔의 말에 공감했기에, 두 사람은 기억을 더듬어 자신들이 전송되어 온 곳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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