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경매
유령은 앞장서서 통로로 들어갔고, 심협과 사우흔도 말없이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하얀 빛이 나는 통로 끝에 다다랐다. 그 빛은 굳게 닫힌 하얀 돌문으로, 희미한 하얀 빛이 그 위에 반짝이고 있었다.
유령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하얀 빛 한 줄기가 그의 손에서 날아가 문에 닿았다. 그러자 돌문의 하얀 빛이 빠르게 어두워지더니,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넓고 환한 타원형 대청이 나타났다.
대청에는 반원 형태의 길고 큰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뒤로 돌 의자가 20여 개 드문드문 놓여 있었다. 대부분의 의자에는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돌 탁자 맞은편에는 텅 빈 나무 탁자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뒤로는 검은 나무의자 3개가 따로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이 대청으로 들어오자 여러 시선이 그들에게 꽂혔다.
심협은 태연함을 가장하며 재빨리 그 자리에 있는 귀물들을 훑어보았다. 유령, 강시, 여귀(厲鬼) 등 별의별 귀물들이 다 있었고, 아까 봤던 몸집이 장대한 검은 피부의 청년도 보였다.
하지만 심협은 신식(神識)이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 모인 귀물들의 수련 경지까지는 분명히 파악할 수 없었다.
“두 분은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하얀 유령은 두 사람을 돌 탁자 뒤의 서로 이웃한 자리로 안내했다.
“백염 집사, 내 한마디 해야겠소. 당신네 무상각은 어찌 돼먹은 것이오? 인계에서 온 수사들까지 데려오다니, 우리에게 너무 실례가 아니오?”
심협과 사우흔이 막 앉자마자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에 검은 비늘이 돋은 청년이었는데, 얼굴 가득 거만함이 느껴졌다. 신분이 꽤 높은 청년인 듯, 그가 앉아 있는 돌 의자 뒤에 피처럼 붉은 옷으로 온몸을 뒤덮은 거대한 체구의 시종이 하나 서 있었다.
청년의 말에 다른 귀물들도 한 차례 술렁였다. 심협과 사우흔을 보는 시선도 더욱 차갑고 매서워졌다.
두 사람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귀시면구를 꿰뚫어보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귀시에는 인계에서 온 수사들의 출입을 제한한다는 규정이 없습니다. 또한 이 분들은 우리 무상각의 객경 영패를 지니셨고, 심지어 일등령(一等令)입니다. 규칙에 따르면, 영패를 가진 인계 수사의 입장은 전혀 문제될 게 없지요.”
백염도 두 사람의 신분을 알고 있었던 듯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말했다.
“귀각(貴閣)의 일등령 영패를 지닌 자들과는 내 기본적으로 모두 일면식이 있소. 허나 인계의 두 사람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지. 백염 도우께서는 간악한 좀도둑놈들에게 속지 마시오.”
검은 비늘의 청년이 심협과 사우흔을 아니꼬운 눈으로 꼬나보며 살짝 언성을 높였다.
“흑문(黑紋) 도우의 일깨움에 감사하오나, 이미 영패를 검사했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백염이 웃으며 답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심협은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비록 검은 비늘 청년의 반응에 심기가 좀 불편하긴 했지만, 그로서는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실력으로 저들과 맞서봐야 낭패할 게 뻔했다.
그러나 사우흔은 그와 달랐다. 콧방귀를 뀌며 비늘 청년을 비웃은 것이다.
“귀하께서는 정말이지 자신만만하시오. 보아하니 귀하에게 얼굴 한 번 보이는 게 여기 무상각 영패보다 더 잘 먹히나보오!”
“뭐라고!”
검은 비늘 청년이 벌컥 화를 냈다.
“흑문 도우께서는 노여움을 푸시지요. 무상각에 오신 분들은 모두 손님입니다. 심 도우와 사 도우, 두 분께 여기 계신 도우분들을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이분은 저승의 음신이신 이상(離霜) 선배님이십니다. 흑문 도우께서는 유명산(幽冥山)에서 오셨는데, 유명산 흑산(黑山) 선배님의 적손(嫡孫)이시지요. 이분은 망탕산(莾蕩山)의 귀기(鬼崎) 도우이시고, 이분은 풍도(*酆都: 지금의 사천 지역)의 산수 청오(靑螯) 도우이시며…….”
백염은 급히 말머리를 돌려 심협과 사우흔에게 다른 귀물들을 소개했다. 가장 먼저 소개한 이가 바로 검은 피부의 청년이었고, 다음으로는 은근한 경고의 뜻을 담아 검은 비늘 청년의 신분을 밝혔다.
심협은 평온한 표정으로 주위의 귀물들을 향해 공수하며 예를 갖췄다.
이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백염은 물론 심협과 사우흔 두 사람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귀물들은 백염의 체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일등령이라는 지위 때문이었는지 모두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흑문은 그게 더 언짢았는지 콧방귀를 뀌었지만, 더는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백 도우, 여기 온 지 벌써 한참 되었소. 교역회는 언제 시작하는 거요?”
멧돼지 얼굴을 한 귀기가 큰 소리로 물었다.
“그렇소. 언제 시작하는지 확답을 주시오!”
다른 귀물들도 맞장구를 쳤다.
“모두들 조급해 마시고 잠시 기다려주시지요. 옥관 대인께서 일이 있어 조금 늦으셨습니다. 곧 교역회를 시작할 겁니다.”
백염은 미안한 듯 웃으며 포권을 하고는 그들을 향해 예를 갖췄다.
그러는 동안 심협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옥관?’
그에게 영패를 준 그 꼬마의 이름이 바로 옥관 아니던가.
그때, 대청의 나무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검은 옷에 가면을 쓴 두 형체가 걸어 나왔다.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았는데, 큰 쪽은 키가 이상과 맞먹는 것이 꼭 대나무 줄기처럼 껑충한 반면 작은 형체는 3척에나 이를까 말까 한 것이 꼭 어린 아이 같았다.
가면을 쓴 두 사람은 들어서자마자 대청 안으로 향하지 않고, 문 앞 좌우에 나뉘어 섰다.
“옥관 대인의 왕림을 삼가 청하옵니다!”
두 사람이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
“옥관 대인을 삼가 청하옵니다!”
대청 안의 다른 이들도 이 말을 듣고 분분히 일어나며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허리를 굽혔다. 이상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심협과 사우흔은 한 박자 늦었지만, 재빨리 일어나 다른 귀물들을 따라 허리를 굽히고 예를 갖췄다.
그들의 말이 떨어지자, 문 밖에서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뭔가를 먹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은 호기심에 실눈을 들고 앞을 슬쩍 봤다. 그리고 그 순간,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회색 옷을 입은 어린 아이 하나가 걸어 들어왔는데, 입에는 당호로(糖葫芦: 탕후루) 같은 것을 빨고 있었다. 다름 아닌 그에게 객경(客卿) 영패를 선물한 옥관이라는 이름의 아이였다.
“아휴, 오는 길에 중요한 일이 좀 생겨서 늦었어요. 다들 얼른 앉으세요.”
옥관은 나무 탁자 뒤의 세 의자 중 가운데 의자에 털썩 앉으며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대청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서야 자리에 앉았다.
한편, 사우흔은 조금 의아한 듯 천천히 자리에 앉다가 옥관의 눈길을 끌었다.
“너희도 역시 왔구나! 보아하니 내 관륜술(觀輪術)이 성공한 것 같군.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에헤헤!”
옥관은 사우흔에 이어 심협을 보고는 통통한 작은 손으로 가슴팍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 무척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옥관대인께서 주신 영패 덕분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희도 이곳에 발조차 들이지 못했을 겁니다.”
심협은 옥관이 말한 관륜술이 무엇인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즉시 몸을 일으켜 공수하고 감사를 표했다.
“별거 아니야. 그나저나, 무명야점에는 가봤어?”
옥관은 손을 살래살래 흔들며 화제를 돌려 물었다.
“갔었습니다. 확실히 수확이 있었지요. 그 가르침 또한 매우 감사드립니다.”
심협이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황천죽의 정체를 안 것만으로도 무명야점을 찾은 것은 큰 수확이었고, 당연히 옥관에게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좋아! 넌 내 말대로 했으니 이 교역회에서도 분명 큰 수확을 얻을 거야.”
옥관은 연이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심협이 자리에 앉자 귀물들은 다시 심협과 사우흔을 훑어보았다. 심지어는 이상까지도 심협 쪽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들의 시선에는 아까와는 다른 기색이 가득했다. 아마도 심협의 신분을 비롯해 옥관과의 관계를 짐작해보는 듯했다. 오직 흑문만이 무시하는 듯한 얼굴로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옥관 대인, 시간이 꽤 늦었습니다. 교역회를 시작할까요?”
백염이 옥관에게 다가가 물었다.
“시작해요.”
옥관이 작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답했다.
“여러분, 교역회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번 순서도 전과 같이 전반부는 본각(本閣)에서 개최하는 경매회입니다. 많은 도우들께서 선옥으로 가격을 매겨 경매에 붙일 수도 있고, 물건을 담보로 잡을 수도 있습니다. 담보의 정확한 값은 우리 두 사람, 그리고 옥관 대인께서 결정하시고, 높은 값을 부르는 이가 물건을 얻게 됩니다.”
가면을 쓴 두 사람이 단상으로 다가와 귀물들에게 예를 갖추었고, 그중 키 큰 가면이 말했다.
“후반부는 바로 도우들께서 자유로이 교류하는 시간으로, 저 같은 이가 간섭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우리의 물품 감정이 필요하시다면 선옥 5개를 지불하시면 됩니다.”
다른 귀물들은 이 규칙을 진작 알고 있었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우들께서 규칙을 아셨으니, 교역회를 정식으로 시작하지요. 첫 번째 경매품은 상품 법기인 광염도(狂焰刀)입니다. 구도금제(九道禁制)가 걸려 있지요. 이 칼은 열양현철(烈陽玄鐵)을 주재료로 삼아 더없이 예리할 뿐만 아니라, 금과 철도 녹일 수 있는 화염을 내뿜을 수 있습니다. 선옥 90개부터 시작합니다. 호가(呼價)를 부르실 때는 최소 선옥 3개 이상을 올리셔야 합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누군가 재빨리 값을 불렀다.
“선옥 90개!”
“93!”
“100개를 내겠소!”
한바탕 경쟁이 끝난 뒤, 귀기가 선옥 160개에 광염검의 주인이 됐다.
심협은 이런 경매가 처음이라 무척 신기하게 느껴져서, 조용히 앉아 첫 번째 경매를 구경했다. 구경만 하는 게 당연했다. 광염검은 상품 법기에 속했고 위력도 대단했지만, 가격이 낮지 않았다. 자신은 선옥이 많지 않은 데다, 이곳에 온 목적은 따로 있으니 이 떠들썩한 틈에 낄 이유가 없었다.
키 작은 가면은 잠시 귀기에게 물건을 전달하고는 다시금 물건을 하나 꺼냈다. 작은 회백색 깃발이었는데, 위에는 약간의 화염부문(火焰符文)이 있었다. 또한 회백색 옥쟁반도 몇 개 있었는데, 알고 보니 법진을 만드는 한 벌의 포진 기구였다.
“두 번째 물건은 음화연환진(陰火連環陳) 포진 기구 한 벌입니다. 풍도성의 진법 대가인 묵옥자대사(墨玉子大師)의 손에서 나온 것인 만큼 최상품입니다. 이 법진은 30장 범위를 뒤덮을 수 있고, 그 안에 갇힌 이에게 최대 18번의 음화 공격을 퍼붓습니다. 선옥 60개부터 시작입니다. 호가를 부르실 때는 최소 선옥 2개 이상을 올리셔야 합니다.”
키 작은 가면의 소개에 귀물들은 꽤나 흥미를 느낀 듯했다. 심지어 눈에서는 또렷한 푸른 빛이 떠오른 귀물도 있었다.
진법은 수선계(修仙界)의 중요한 부분으로, 부적이나 단약 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으며, 각자 특색과 장기를 지니고 있다. 부적과 마찬가지로 법진 역시 문양을 통해 천지의 힘을 빌려 신통력을 발휘하는데, 자신이 힘이 작더라도 법진만 잘 설치 하면 그 10배의 위력도 능히 발휘할 수 있었다.
다만, 법진을 치는 건 아주 어려워, 진법에 정통한 대가들도 오랜 시간을 들여야만 설치할 수 있다. 게다가 상황과 장소에 따라 대처할 줄을 알아야 하고, 기민하고 융통성 있게 흐름을 탈 줄 알아야 하며, 그 과정 역시 매우 까다롭다.
그러나 진기(陳旗)와 진판(陳盤)이 있으면 규칙과 방위에 따라 땅에 묻어놓는 것만으로도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 포진 법기를 보는 심협의 표정이 동요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꿈속 세상에서 겪은 적이 있기 때문에 포진이 낯설지 않았다. 심지어 장수촌에서는 직접 작은 법진을 그려본 적도 있는 만큼, 진법술에 대해 나름의 조예가 있다고도 할 만했다.
이 음화연환진은 실로 공과 수를 겸비했고, 진기와 진반 위의 부문으로 보아 동래 현성에서 우혁 등이 시전했던 육합화진보다 위력이 훨씬 강력한 것이다. 그러니 매우 귀한 법기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이번에도 역시 나설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