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70화 (170/1,214)
  • 170화. 가게가 크면 손님을 무시하기 마련

    검은 갑옷을 입은 두 귀물은 검은 피부의 청년이 꺼낸 영패를 보고는 예를 갖추더니 길을 터주었다.

    검은 피부의 청년은 4층 계단을 올라가 금방 사라져버렸다.

    그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심협의 눈빛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보아하니, 저 하얀 영패가 안에 들어갈 출입증 같은 건가 보군요. 응? 심 도우, 왜 그래요?”

    심협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하자 사우흔이 당황하며 물었다. 그러자 심협은 대답 대신 품에 손을 넣더니 하얀 영패를 꺼내 들었다. 바위 뒤에서 코를 골며 늘어지게 자던 옥관동자가 준 영패였다.

    영패의 한쪽 면에는 검은색과 흰색의 십자 문양이, 다른 면에는 해골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좀 전에 검은 피부 청년이 영패를 꺼내서 흔들었을 때, 심협과 사우흔 모두 그 영패를 똑똑히 보았다. 심협의 영패는 분명 그것과 똑같았다.

    “이건! 어디서 난 거예요?”

    사우흔이 기뻐하면서도 경악한 목소리로 물었고, 심협은 숨기지 않고 영패의 내력을 이야기했다.

    “그 동자가 범상한 이는 아니었군요! 우리도 올라가요!”

    사우흔은 조금도 지체하기 싫다는 듯 말했다.

    “잠깐, 단약부터 사고 갑시다.”

    심협의 말에 사우흔은 약간 미안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 맞다! 죄송합니다. 위쪽에만 신경 쓰느라 하마터면 심 도우의 중요한 볼일을 잊을 뻔했어요.”

    평소와 달리 허술해 보이는 사우흔의 모습에 심협은 웃으며 3층으로 향했다.

    단약을 사러 온 귀물은 많지 않은지, 3층은 비교적 조용했다.

    “두 분께서는 무슨 단약을 원하십니까?”

    하얀 옷을 입은 시종 하나가 두 사람을 황급히 맞이했다.

    “여기 벽곡기 파경단약이 있습니까?”

    “벽곡기 파경단약 말씀이시지요? 그렇다면 잘 찾아오셨습니다. 그런 귀한 단약은 온 귀시에서도 우리 무상각에만 있지요!”

    붉은 피부와 머리칼, 입 밖으로 드러난 두 개의 송곳니를 빼면 보통 사람과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젊은 여자 귀물이 다가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하얀 옷의 시종이 예를 갖추고 물러가는 것으로 보아 이 여인은 지배인 정도 되는 듯했다.

    “단약은 어디 있습니까? 일단 보고 싶군요.”

    심협은 매우 기뻤지만, 내색하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귀한 단약은 바깥에 전시해놓지 않는답니다. 내실(內室)에 진열해놓았으니 두 분께서는 따라 오시지요. 이쪽입니다.”

    붉은 머리의 귀신은 친절하게 웃으며 청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우흔과 함께 따라 나섰고, 셋은 이내 안쪽의 어느 방에 이르렀다.

    그곳은 폭이 4~5장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구조와 꾸밈새는 더욱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주위에는 금제도 쳐놓았는지 바깥의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방 한가운데에는 자그마한 계산대가 하나 있었고, 주위에는 하얀 빛으로 된 금제가 한 층 쳐져 있었다.

    금제 안에는 8개의 약병이 놓여 있었는데, 각 병마다 색깔이 달랐다. 하나하나가 바깥에 있는 것보다 훨씬 화려했다.

    8개의 약병은 두 줄로 나뉘어 위쪽 줄에 6개, 아래쪽은 2개가 놓여 있었다.

    “이 위쪽 6종류의 단약들은 연기기 파경단약들이고, 아래쪽 두 병이 벽곡기 파경단약입니다. 모두 우리 무상각의 연단 대가가 만든 것으로, 약효가 아주 좋지요.”

    붉은 머리칼의 귀신은 약간 우쭐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협의 시선이 약병들을 훑었다. 각 약병 옆에는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다.

    아래쪽 두 병의 벽곡기 단약은 각각 오룡단(五龍丹)과 응액단(凝液丹)이었다.

    “그 두 단약 모두 벽곡기를 돌파하도록 돕습니다만, 효능은 다릅니다. 응액단의 효능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주로 법력이 액체 형태로 응결되도록 돕습니다. 반면 오룡단은 주로 법맥을 트이게 하는 데 효력이 있지요.”

    심협은 설명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귀시의 단약은 건업성의 단약보다 훨씬 훌륭하군. 약효도 이렇게 분명히 소개해주고 말이야. 응원단의 효과는 그리 뚜렷하지 않았지. 물론 내가 아직 응원단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이 두 단약은 벽곡기의 돌파율을 얼마나 끌어올릴 수 있습니까?”

    그는 마침내 가장 관심 있는 문제에 대해 물었다.

    “오룡단과 응액단의 효능은 엇비슷합니다. 모두 확률을 2할에서 3할까지 높일 수 있지요.”

    그 말을 들은 심협의 눈에 기쁜 기색이 스쳤다. 이 두 단약은 과연 효능도 응원단보다 좋았던 것이다.

    “설명을 들어보니 이 두 단약의 정확한 효능이 다르다고 하셨는데, 그럼 두 개를 동시에 복용해도 됩니까?”

    “그건 안 됩니다. 오룡단과 응액단이 함유한 재료 중에는 성질이 상극인 재료가 몇 가지나 있어, 절대로 동시에 복용해서는 안 됩니다!”

    붉은 머리칼의 귀신은 거듭 강조했다.

    약리에 정통한 심협은 좋은 단약이라고 해서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확인차 물어본 것뿐이었다.

    “이 단약들은 얼마입니까?”

    그는 잠깐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증요한 질문을 던졌다.

    “오룡단은 선옥 150개이고, 응액단은 170개입니다.”

    붉은 머리칼의 귀신이 눈에 웃음기를 띠며 곧바로 말했다.

    심협은 눈썹을 찌푸렸다.

    ‘벽곡기 파경단약이 비싼 거야 당연하지만, 이건 말도 안 되는 가격이잖아! 상품 법기 하나는 족히 살 수 있는 가격이라고!’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잠깐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그러세요. 천천히 생각하셔도 됩니다. 그럼 저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붉은 머리칼의 귀신은 심협이 당연히 살 거라 확신하는 듯, 얼굴에 웃음기를 거두지 않고 몸을 돌려 나갔다.

    “사 도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붉은 머리칼의 귀신이 나가자마자 심협은 곧바로 사우흔의 의견을 물었다.

    “그 두 단약의 약효가 확실히 좋기는 하나…… 바가지를 씌우려는 것 같긴 하네요.”

    사우흔이 아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가격이 비싸긴 하지만, 벽곡기 파경단약은 귀시에서도 오직 여기서만 구할 수 있으니 바가지를 쓰더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어쨌거나 벽곡기에 들어가는 게 목표니까.’

    심협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본 사우흔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 도우. 내가 보기에, 지금 당장 결정할 필요는 없어요. 4층에서 더 좋은 단약을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만약 그러지 못하면 다시 내려와서 사면 되지 않겠어요?”

    “맞다! 그렇군요. 사 도우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당장 실망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두 사람은 일단 내실 밖으로 나갔다.

    “결정하셨나요?”

    밖에서 기다리던 붉은 머리칼의 귀신이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오며 물었다. 멀지 않은 곳에는 백의의 시종이 손에 쟁반을 하나 받쳐 들고 서 있었는데, 그 위에는 단약 두 병이 놓여 있었다. 바로 오룡단과 응액단이었다.

    “죄송하지만 좀 더 둘러본 후에 결정하고 싶군요.”

    심협은 평온하게 말했다.

    붉은 머리칼의 귀신은 그 말을 듣자 낯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근처의 시종 몇몇이 이런 낌새를 눈치채고 건너다보자, 그녀의 표정은 더더욱 안 좋아졌다.

    그러나 그녀는 재빨리 평정을 되찾고 비웃음 섞인 말투로 냉정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두 분께서는 잘 생각해보시고 언제든 오십시오. 허나 귀시의 다른 곳에서는 아마 이런 단약을 찾지 못하실 겁니다.”

    “오, 그렇소? 이 위에도 없단 말이오?”

    사우흔은 손을 들어 위쪽을 가리키면서 장난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위요? 4층 말씀인가요? 그곳은 우리 무상각에서 고급 수사(修士)들의 교역회를 여는 곳입니다. 그곳이라면 당연히 파경단약이 나타날 수도 있겠으나, 거긴 개나 소나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반드시 우리 무상각 객경(客卿) 영패를 지녀야만 가능하지요.”

    붉은 머리칼의 귀신은 입을 삐죽이며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가르침 고맙소.”

    심협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를 내고픈 마음은 없었다. 도리어 하얀 영패의 정체를 알게 됐다는 생각에 고맙기까지 했다.

    말을 마친 그는 사우흔에게 눈짓을 했고, 두 사람은 4층 입구로 다가갔다.

    “흥! 촌뜨기들 주제에 4층에 올라가겠다고? 웃기지도 않는군!”

    붉은 머리칼의 귀신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그때, 심협이 4층 입구 앞에 서서 손을 뒤집어 하얀 영패를 꺼내 보였다.

    “두 분, 안으로 드시지요.”

    문을 지키던 검은 갑옷 차림의 두 귀물이 길을 터주었다.

    심협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사우흔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한편, 붉은 머리칼의 귀신은 나무말뚝처럼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 * *

    심협과 사우흔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 금방 4층에 도착했다.

    정면에는 폭이 10여 장에 이르는 넓은 대청이 있었고, 하얀 형체 하나가 얼굴을 안쪽으로 향한 채 그곳에 서 있었다.

    기척을 느낀 하얀 형체는 두 발은 움직이지 않은 채 몸만 천천히 돌렸다. 일전에 심협이 허물어진 절에서 본, 목매달아 죽은 귀신과 비슷한 유령이었다.

    “저는 무상각 집사 백염(白厭)입니다. 두 분도 교역회에 참가하러 오셨습니까?”

    하얀 유령은 두 사람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흐릿하고 불분명한 목소리였다.

    한 줄기 음산한 기운이 흰 유령의 온몸을 에워싸고 있었는데, 전에 본 목매달아 죽은 귀신보다 더 거대했고, 한기도 더 심했다. 일부러 그런 기운을 발산하는 건 아니었지만, 심협은 사지가 점점 차갑고 무감각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습니다.”

    심협은 속으로 무상각의 힘에 놀라워하며 답했다.

    “무상각에 오신 두 귀빈을 환영합니다. 두 분의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하얀 유령이 또 물었다.

    심협과 사우흔은 각자 성만 대고 이름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심 도우와 사 도우셨군요. 환영합니다. 한데 규칙에 따라 제가 두 분의 객경 영패를 검사해야만 하니, 이해해주십시오.”

    하얀 유령이 말에 사우흔이 참지 못하고 불쑥 대꾸했다.

    “아래의 두 호위병이 확인하지 않았소?”

    “이는 무상각의 규칙이니 양해해주시지요.”

    하얀 유령이 살짝 허리를 굽혔다.

    “괜찮습니다. 검사하시면 되지요.”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하얀 영패를 꺼냈다.

    하얀 유령은 영패를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곤 뭔가 말하려다가 갑자기 눈을 번뜩이며 가벼운 탄성을 내질렀다.

    “왜 그러십니까? 영패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심협이 내심 긴장하며 물었다.

    “아닙니다. 문제없습니다. 한데 심 도우께서는 이 영패를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하얀 유령의 물음에 심협은 또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왜 물으시오? 무상각에서는 줄곧 내력도 묻지 않고 근원도 찾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지 않았소?”

    사우흔이 딱딱하게 대꾸하자 유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 도우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실언을 했군요. 저를 따라 오시지요.”

    하얀 유령은 허리를 살짝 숙여 사과하고는 몸을 돌려 안쪽으로 날아갔다.

    심협과 사우흔은 눈빛을 교환한 후 유령의 뒤를 따라 대청 깊숙한 곳에 이르렀다.

    하얀 유령이 벽을 한 번 누르자,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 끝에는 하얀 빛이 어렴풋이 아른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