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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69화 (169/1,214)
  • 169화. 자격

    “소용이 없소?”

    회의의 사내는 심협의 말에 꽤나 기대를 했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자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아, 그게…… 혹시 음기가 담긴 물건 가진 게 있소? 이 대나무에는 음기를 흡수하는 능력이 있긴 한데, 먼저 음기를 안에 어느 정도 주입해야만 능력을 발휘시킬 수 있소. 내 그걸 깜빡했지 뭐요. 허허.”

    “음기? 때마침 음속성 법기가 하나 있으니 한번 시험해봅시다.”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회의의 사내는 반 척 길이의 새까만 골검(骨劍)을 한 자루 꺼내더니 황천죽을 가리키며 법력을 운공했다. 그러자 검은 골검이 빛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한 줄기 검은 빛이 피어올라 황천죽을 때리고는 흔적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엇!”

    회의 사내가 깜짝 놀라 외쳤다.

    “그 검의 효력을 좀 더 발휘해주시오.”

    심협이 기쁜 듯 재촉하자 회의의 사내는 그를 힐끗 보더니 다시 골검의 힘을 발휘시켰다. 골검에서는 검은 빛이 끈임없이 뿜어져 나와 황천죽 안으로 녹아들어갔다.

    호흡 몇 번 할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황천죽 위에 검은 기운이 떠올랐다가 재빨리 퍼져나갔다.

    “됐소! 이제 어서 검을 거두시오!”

    심협은 황급히 말하며 황천죽과 무영옥을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는 귀물이 아니라서 몸 안에 음기가 없지만, 흡음력(吸陰力)이 발휘된 황천죽은 실로 기이해서, 자기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실험해보고 싶지도 않았다.

    회의의 사내는 급히 골검을 거두고 마찬가지로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황천죽은 금세 칠흑 같은 색으로 변하더니, 표면에 점점이 붉은 빛이 떠올라 무영옥을 비추었다. 그러자 무영옥은 곧 가볍게 떨리더니, 안에서 가닥가닥 검은 기운을 토해냈다. 이 검은 기운은 나타나는 족족 황천죽에 흡수됐다.

    심협과 회의의 사내 모두 이 광경에 기뻐했다.

    머지않아 무영옥은 안의 회흑색 기운이 사라지면서 점차 뽀얀 젖빛으로 변해갔다.

    1각쯤 지나자 황천죽이 그 안의 마지막 한 줄기 검은 기운까지 뽑아내면서 무영옥은 완전히 원래 모습을 되찾아 뽀얗고 투명하게 빛나는 옥돌로 변했다. 하얀 빛이 한 겹 비쳐 무척 아름다웠다.

    “무명옥 안의 음기를 깨끗하게 빨아들이다니, 도우의 그 죽통은 과연 신통하오! 정말 고맙소. 하하하!”

    회의의 사내는 크게 기뻐하며 심협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재빨리 무영옥을 집어 들었다.

    심협은 화들짝 놀라 사내에게 황천죽을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려 했지만, 한 발 늦었다. 회의의 사내는 이미 무영옥을 집어 든 것이다.

    그러나 황천죽은 사내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이 대나무는 귀물에게만 효과가 있는 건가? 그것도 좋지.’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회의 사내의 손에 있던 무영옥이 갑자기 환한 백색광을 발하더니, 순간 폭이 1장에 이르는 하얀 빛 덩어리를 이루며 두 사람의 몸을 완전히 감쌌다. 그리고는 하얀 빛 덩어리 속에서 심협이 변화한 귀물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그의 얼굴에 있던 귀시면구 역시 투명해지더니 본래의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상황은 회의의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얼굴에서도 귀시면구가 투명하게 변하며 놀랍도록 수려한 얼굴이 나타났다.

    심협은 짧은 순간 여러 가지로 놀랐다. 자신의 본 모습이 드러난 것만도 놀랄 일이었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회의 사내의 모습이었다. 상대의 정체는 바로 사우흔이었던 것이다!

    사우흔 역시 심협의 얼굴을 보고는 눈이 더없이 휘둥그레졌다.

    “사 도우!”

    “심 도우!”

    두 사람은 경악하여 서로를 마주보고는 깜짝 놀라 외쳤다.

    그때, 무명옥이 뿜어내는 하얀 빛 덩어리가 가볍게 움직였다. 그러자 심협의 몸에는 변화가 더 일어나지 않았지만, 사우흔의 몸에 걸친 회색 옷이 빠르게 투명해졌다. 이제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은 속옷만 입은 상태였다. 풍만한 둔부에 가는 허리, 하얗게 부푼 앞가슴. 속옷이 거의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꺅!”

    사우흔이 평소답지 않게 가녀린 비명을 지르며 한 손을 뒤집었다. 그러자 손에 있던 무영옥이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됐고, 하얀 빛 덩이도 바로 사라졌다. 그러자 두 사람은 귀시면구를 쓴 귀물 형상으로 돌아왔다.

    사우흔은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 안은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얼굴이 발그레한 것이 부끄러움과 노여움이 섞인 표정이었다.

    심협으로서도 퍽 난처했지만, 도저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입을 다물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아, 그렇구나. 귀시면구가 우리 몸에 만들어낸 위장은 금제류 비술에 속하니 무영옥의 위력에 사라진 거였어요.”

    한참 후에야 사우흔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부끄러움을 억누르고는 천천히 말했다.

    “일리가 있군요. 아마 그럴 겁니다.”

    심협도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우흔은 그 말을 듣고 가볍게 눈을 한번 부라렸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방금의 일은 그녀가 무영옥을 집어 든 뒤 무의식적으로 법력을 주입하면서 벌어진 것이다. 자신의 실수로 일어난 일이니 누구에게 따지겠는가.

    “사 도우의 위장 솜씨는 정말 훌륭하군요. 저는 ‘홍 도우’가 여자 수사일 거라고는 조금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검은 빛이 사라지면서 평소의 푸른 대나무로 변한 황천죽을 주워 들며, 심협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둘러댔다.

    “보잘것없는 잔재주일 뿐이지요. 한데 심 도우의 그 대나무는 어떤 보물입니까? 그리 강력한 흡음능력이라니…….”

    사우흔도 어느새 평정을 되찾고는 황천죽을 흘끗 보며 물었다.

    “이 물건은 황천죽이라 합니다. 귀계의 특별한 영죽인데, 예전에 우연히 얻었지요.”

    심협은 황천죽을 손에서 가볍게 흔들어 보이고는 품에 집어넣었다.

    “소녀가 이번에 온전한 무영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심 도우 덕분입니다. 큰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앞으로 심 도우께서 이 물건이 필요하실 때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사우흔은 잠시 침묵한 뒤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럼 감사하지요.”

    심협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무영옥의 신통력은 실로 놀라우니 분명 언젠가 쓸 때가 있을 터였다.

    “한데 심 도우는 귀시에 무얼 사러 오셨습니까? 소녀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사우흔이 뒤이어 물었다.

    “벽곡기로 올라서도록 도와줄 단약을 구할 수 있을까 싶어 왔습니다.”

    “귀시에 물자가 풍부하다고는 하나, 벽곡기 파경단약은 아주 구하기 어렵습니다. 온 귀시에서 오로지 무상각에만 있지요.”

    사우흔이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사 도우도 무상각을 아십니까?”

    심협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무상각은 명성이 대단하니까요. 귀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본다면 어찌 모를 수 있겠어요?”

    사우흔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심협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심 도우께서 아직 물건을 사지 못하셨다면, 소녀가 무상각에 대해 조금 알고 있으니 함께 가시지요. 방금 두 차례 도움에 대한 보답도 할겸…….”

    “사 도우가 함께 가주신다면 당연히 감사할 일이지요. 허나 그러면 사 도우의 일이 지체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알기로 이제 귀시가 마감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겁니다.”

    심협은 기뻤으나, 머뭇거리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처리해야 할 일들은 이미 다 처리했고, 저도 마침 무상각에 가보고 싶었거든요.”

    사우흔은 멀리 보이는 무상각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함께 가지요.”

    심협도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먼저 잡화점으로 향했다. 사우흔은 부적 두 장을 싼 값에 팔아 선옥 15개로 바꾼 뒤, 모두 심협에게 주었다.

    심협은 본래 빌려줬던 9개만 받을 생각이었으나, 사우흔이 끝까지 청하는 바람에 결국 모두 받을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두 사람은 무상각 앞에 이르렀고, 인파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눈앞이 탁 트이더니, 폭이 족히 수십 장에 이르는 거대한 원형 대청이 나타났다. 커다란 고리 형태의 테두리로 감싸인 대청의 바닥은 네모난 순백의 옥돌이 가득 깔려 있어, 더없이 정교하고 화려해 보였다.

    상점 안에는 갖가지 영재가 놓인 진열대가 숲처럼 빽빽이 늘어서 있었다. 각종 영초와 요수(妖獸)의 요단(妖丹) 같은 것도 있었다. 수량이며 품질 모두 바깥 상점의 물건들보다 등급이 높은 것들이었다.

    상점은 손님들로 북적였고, 오랫동안 갈구하던 보물이라도 보았는지 곳곳에서 놀라움과 기쁨의 탄성이 들려왔다.

    “무상각은 위아래 4개 층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각 층마다 파는 물건이 모두 다르지요. 1층은 영재를, 2층은 부적과 부기, 법기와 등을 팝니다. 3층이 바로 단약이니, 바로 3층으로 가지요.”

    설명을 마친 사우흔은 곧장 계단을 올랐다.

    “그럼 4층은 어떤 물건을 팝니까??

    심협이 뒤따라 붙으며 물었다.

    “4층은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닙니다. 무상각에서 경매나 교역회를 여는 곳이지요. 오늘 열리는 행사가 있나 모르겠네요. 진정한 보물은 귀시 상점가보다도 그런 행사들에 주로 나타나거든요.”

    심협도 마 주인장과 한담을 나누면서 경매와 수사(修士)들끼리의 교역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고, 심지어 동경하기까지 했다.

    “그런가요? 방금 길가 노점에서 큰 이득을 본 게 어느 분인지 모르겠군요.”

    심협은 사우흔을 은근히 놀렸다.

    “그런 일은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우연이지요.”

    사우흔은 가볍게 눈을 흘기고는 경쾌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심협은 사우흔이 백부에서 본 차가운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지만, 딱히 파헤치고 싶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금세 3층에 도착했다. 그곳은 1층보다 훨씬 좁았지만, 구조는 같았고, 안에는 진열대가 꽤 많이 늘어서 있었다. 진열대 안에는 온갖 단약이 가득 진열되어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웠다. 심협이 지금껏 본 어떤 단약 가게들보다도 훨씬 훌륭했다. 이제야 무상각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데 막 안으로 들어가려는 심협의 옷소매를 사우흔이 다급히 잡아당겼다.

    “저기 봐요! 오늘 4층에 성대한 모임이 있는 것 같은데요?”

    사우흔은 4층으로 통하는 계단 입구를 향해 눈짓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4층 계단 입구에는 새까만 나무문 하나가 활짝 열려 있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사람 형태의 귀물이 좌우로 서 있었고, 위에서는 어렴풋이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갑옷을 입은 두 귀물은 검은 기운이 감돌았고, 묵직한 위압감을 뿜어냈다. 보아하니 수련 경지가 적어도 벽곡기 이상은 되는 모양이었다.

    심협은 속으로 탄식했다.

    ‘그 넓은 건업성에서도 벽곡기 수사는 아주 보기 드물어 봉황의 깃털과 기린의 뿔이라 할 만큼, 늘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존재였는데…… 이곳 귀시에서는 흔히 볼 수 있구나!’

    그는 가볍게 탄식했고, 동시에 벽곡기에 들고 싶다는 욕망은 더욱 커졌다.

    “사 도우, 위에 가보고 싶지 않소?”

    심협은 평정심을 되찾고는 사우흔에게 물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4층에 가보고 싶다는 열망이 절절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당연히 가보고 싶죠! 그런데 4층은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아니랍니다. 자격이 있어야 한다더군요. 그러니 우리 같은 외부인은 안 되겠죠.”

    사우흔은 안타깝다는 듯 탄식했다.

    그때, 아래에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사람 형체 하나가 걸어 올라왔다.

    심협과 사우흔이 동시에 움찔했다. 올라온 이는 피부가 칠흑같이 검고 이목구비는 보통 사람과 거의 차이가 없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귀물임에 틀림없었다.

    검은 피부의 청년은 몸집이 아주 장대해 작은 거인 같았다. 심협은 그 앞에 서면 3분지 2밖에 안 될 듯했다.

    검은 피부의 청년은 심협과 사우흔의 시선을 느끼고는 흘끗 한번 쳐다보았다.

    그 순간, 심협은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졌고, 정신이 혼미해졌을 뿐만 아니라, 숨까지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심지어 사우흔마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다행히 검은 피부의 청년은 두 사람을 쓱 훑어보고는 바로 눈길을 거두었다. 그러자 그 정신적 압박감은 일순간에 사라졌다.

    ‘응혼기!’

    심협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가 꿈속 세상에서 이해한 바로, 응혼기의 경지에 들어서서 혼이 탈바꿈하기 시작하고 정신력이 놀랍도록 강해진 존재만이 조금전과 같은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검은 피부의 청년은 곧장 4층 계단으로 향했다. 그가 손바닥을 뒤집어 작고 하얀 영패를 꺼내 두 귀물의 얼굴 앞에 한번 흔들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심협은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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