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재회
심협은 선옥이 두둑해지자 길을 걸으면서도 허리가 꼿꼿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잡화점을 나선 그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무상각이 아닌 다른 상점들에서 단약을 좀 더 찾다가, 이내 광장과 가까운 상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 상점에는 각종 서책들과 옥간(玉簡) 등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공법에 관한 고서들을 파는 가게였던 것이다.
서점으로 들어간 심협은 진귀한 공법들과 비술 책들이 아닌, 각종 영재가 기록된 고서로 향했다. 잠시 책들을 살피던 그는 이내 선옥 세 개로 귀계의 모든 초목류 영재가 기록되어 있다는 책을 한 권 샀다.
실제로 모든 영재가 기록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실로 그 내용은 방대했고, 귀계에서는 <선령백초>보다 훨씬 자세했다. 초목류 영재를 다시 나무, 관목, 덩굴, 풀 등 수십 종류로 나누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각 영재의 특성과 효능까지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심협은 대나무류 영재에 관한 부분을 펼쳐 황천죽을 찾아냈다.
‘그렇구나. 황천죽은 햇수가 오래될수록 굵어지는 보통 영죽과 달리, 반대로 막 싹터서 자라는 것이 더 굵고, 햇수가 오래될수록 직경이 가늘어지는 거였어. 어쩐지, 무명야귀가 죽통 나이가 얼마 안 됐다고 하더라니.’
계속 읽어 내려가던 심협의 시선이 곧 멈추더니, 그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빠른 걸음으로 책방을 나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골목에서 나오는 심협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는 이어서 무상각으로 향했다.
그런데 막 몇 걸음 걸었을 때, 저 앞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실랑이라도 벌어졌는지 많은 귀물들이 몰려 있었다.
심협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사람들을 피해 돌아서 가려고 했다. 그런데 걸걸하게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물건은 우리가 이미 값을 이야기해 놓았잖소. 주인장, 당신은 어찌 한 입으로 두말을 하시오? 다른 이에게 팔면 어쩌란 말이오!”
“하! 이 일은 주인장과 관계가 없지! 당신네들이야 값을 정했지만, 돈을 내지는 않았잖소. 돈을 안 냈으면 거래가 성사된 게 아닌데, 왜 다른 이에게 못 판단 말이오? 탓하려면 돈을 너무 늦게 낸 제 탓을 해야지.”
또 다른 우악스런 목소리가 코웃음을 치며 반박했다.
심협은 걸음을 멈췄다. 그 쉰 목소리가 왠지 낯익게 들렸던 것이다.
고개를 돌려 보니, 과연 회의의 사내였다. 그는 바로 앞 길가의 작은 노점에 있었다.
회색 옷의 사내 맞은편에는 소머리 귀물이 선 채 성난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좌판 뒤편에는 검은 옷을 입은 늙은 귀신이 서 있었는데, 약간 난처한 표정이었지만 눈빛 깊숙한 곳에서는 은근한 탐욕이 드러났다.
“주인장, 내 선옥 8개를 내겠소!”
그러자 소머리 귀물이 몸을 돌려 노점 주인에게 말했다.
“내 9개를 내지!”
회의의 사내는 노여움이 가득한 눈으로 소머리 귀물을 노려봤지만, 가까스로 억누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10개!”
소머리 귀물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12개!”
이후로도 둘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실랑이를 벌였고, 물건 값은 눈 깜짝할 사이에 선옥 20개 이상으로 치솟았다.
심협은 두 사람이 놓고 다투는 물건이 무엇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슨 물건이기에 선옥 20개까지 부른단 말인가?’
그런데 좌판을 본 그의 표정은 다소 멍해 보였다. 뿌연 잿빛을 띤 주먹만 한, 일견 평범해 보이는 돌덩이 하나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겉보기에 그렇다고 해서 감히 업신여길 수는 없었다.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그의 죽통 아니던가!
그러는 동안에도 두 사람, 아니 두 귀물은 여전히 경쟁 중이었다.
“25개!”
“으…… 나, 나는 26개를 내겠소!”
회의의 사내는 화통하게 외쳤으나, 소머리 귀물은 재력이 한계에 다다른 것인지 잠시 망설인 뒤에 슬그머니 하나를 올렸다.
“30개!”
소머리 귀물이 망설이는 듯하자 회의의 사내는 단번에 4개를 올렸다. 이번에야말로 상대의 의지를 꺾어버리겠다는 듯이.
그러나 소머리 귀물은 의외로 자존심도 세고 고집도 강했다.
“흥! 내게 맞서겠다고? 오냐, 좋다! 내 선옥 40개를 내지! 네놈이 그보다 더 낼 수만 있다면 내 깨끗이 포기하고 떠나주마!”
소머리 귀물은 눈을 부라리며 씩씩댔다. 그리고 이제는 오히려 회의의 사내가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왜? 더 못 내겠느냐? 그럼 이 물건은 내 것이다! 으하하!”
소머리 귀물은 상대방을 따돌렸다는 생각에 껄껄대더니, 작은 주머니를 꺼내 좌판 위에 던져 놓고는 손을 뻗어 돌덩이를 집었다.
“잠깐! 누가 선옥이 더 없다 했소?”
회의의 사내가 이를 갈 듯 외치며 손을 들어 소머리 귀물의 손을 막았다. 그러더니 작은 보퉁이를 하나 꺼내 펼쳤다. 그 안에도 선옥들이 들어 있었다.
“뭐야? 32개뿐이잖나.”
소머리 귀물은 보퉁이를 쓱 훑어보고는 하찮다는 듯 말했다.
“선옥은 부족하지만, 대신 이게 있소. 이 영병부(影兵符)는 내 방금 산 것인데, 한 번도 쓰지 않았소. 선옥 8개 값을 충분히 하고도 남을 거요.”
회의의 사내는 콧방귀를 한번 뀌고는 손바닥을 뒤집어 회흑색 부적을 꺼냈다. 부적 위에는 병사 도안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이 늙은이가 식견이 얕고, 물건을 잘 감별하지 못해 물건은 받지 않습니다요.”
주인인 검은 옷의 늙은 귀신이 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비쩍 마른 손가락 하나로 좌판 옆의 널빤지를 가리켰다. 위에는 지수선옥(*只收仙玉: 선옥만 받음) 네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다.
회의의 사내는 멍하니 서서 아주 다급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맞비볐다.
“도우 여러분, 이 영병부는 제가 방금 선옥 12개에 산 것입니다. 지금 선옥 9개만 주시면 되는데, 사실 분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주위는 쥐 죽은 듯 고요했고, 그의 말에 대꾸하는 귀물은 없었다.
“아니면 열화부는 어떻습니까? 마찬가지로 선옥 9개만 받겠습니다!”
회의의 사내가 다시 한번 부적 한 장을 꺼내 외쳤다.
구경하던 귀물들은 서로를 멀뚱히 바라볼 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어이, 추하게 굴지 말고 포기하라고. 선옥이 부족하면 부족한 거지. 네놈이 한 시진 동안 다니면서 돈을 모은다고 해서 내가 여기서 한 시진 동안 네놈을 마냥 기다려야 한단 말이냐? 나도 엄청 바쁘다고!”
소머리 귀물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회의 사내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좌절한 듯 한숨을 내쉬다가 한쪽에 심협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전 도우! 날 좀 도와줄 수 있으시오? 내 반드시 보답하겠소.”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다가와 공수했다.
“보답은 필요없소. 그대와 나는 같은 곳에서 왔으니, 당연히 서로 도와야지요.”
심협은 손을 내젓고 선옥 9개를 꺼내 건넸다.
회의 사내의 눈동자에 고마워하는 기색이 스쳤다. 그는 고맙다는 말을 남긴 뒤, 선옥을 받아 좌판 위에 올려놓았다. 검은 옷을 입은 늙은 귀신은 앞에 놓인 선옥을 바라보면서, 쪼글쪼글한 얼굴에 기쁜 표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당신 말대로 40개가 넘는 선옥을 냈으니 이제 이 물건은 내 것이오!”
회의의 사내는 소머리 귀물을 흘끗 보고는 돌덩이를 가져갔다.
소머리 귀물은 분노에 찬 눈길로 회의의 사내를 쏘아보았지만, 더는 어쩌지 못했다. 그럼에도 언짢은 것만은 어쩔 수 없었는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자기 선옥을 돌려받은 뒤 몸을 돌려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
귀물들은 구경거리가 사라지자 분분히 흩어졌다. 검은 옷의 늙은 귀신은 회의의 사내가 말을 바꿀까 걱정됐는지, 재빨리 좌판을 접고 군중 속으로 섞여 들어 자취를 감췄다.
대부분의 귀물들은 회의의 사내가 어째서 저 돌덩이에 저리 집착했는지 궁금했지만, 끝내 의혹은 풀지 못했다. 선옥 41개면 이미 중품 법기 하나를 사기에 충분한 금액인데, 어찌 저깟 회색 돌덩이 하나에 집착한단 말인가?
그러나 돌덩이를 챙긴 회의의 사내는 심협에게 슬쩍 눈짓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상점들이 늘어선 방향으로 향했다.
심협은 상대의 뜻을 눈치채고 조용히 따라붙었다.
두 사람은 상점 주위의 인파에 섞여 상점 곳곳을 누비며, 더 이상 자신들을 주시하는 이가 없음을 확인 하고 나서야 비로소 아무도 없는 골목에 멈춰 섰다.
“도우의 도움은 정말 감사하오. 도우께서는 부적을 받고 싶소, 아니면 내 가서 부적을 팔아 선옥 9개를 돌려드리기를 원하시오?”
회의의 사내는 부적 두 장을 꺼내며 물었다.
“그 두 부적은 훌륭하나, 내게는 필요치 않소. 그러니 도우께서 나중에 선옥으로 바꿔서 주시지요.”
“좋소.”
심협의 답에 회의 사내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사이가 퍽 가까워졌다.
“그 돌덩이는 어떤 보물이오? 도우께서 거금을 아끼지 않고 사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소만…….”
심협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회의의 사내는 주저하며 선뜻 답하지 못했다.
“아, 난 그저 호기심에 물은 것뿐이니, 도우께서 곤란하시다면 못 들은 걸로 칩시다. 하하!”
상대가 곤란해 하는 듯하자 심협이 웃어넘기려 했다.
“말 못 할 건 없소. 게다가 귀하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물건을 손에 넣지 못했을 테니, 응당 도우의 의문을 풀어줘야겠지요.”
회의의 사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한결 경쾌한 말투로 말했다.
“이 물건은 무영옥(無影玉)이라 하오. 귀계에서 나는 얻기 힘든 보물로, 워낙 값이 나가 실제로는 거래가 거의 없소. 때마침 난 급하게 필요했고…….”
그는 잠시 멈추고는 회색 돌을 꺼내 땅바닥으로 가져갔다.
잠시 후, 심협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가벼운 탄성까지 터뜨렸다.
골짜기 곳곳에는 등불이 환해서 이 작은 골목 안에도 빛줄기가 비쳐들었는데, 그 돌덩이 아래로는 그림자가 조금도 없었다.
“정말 그림자가 없소! 허나 그저 빛을 비추는 것만으로는 그 정도로 진귀한 보물이 아닐 테니, 이 물건에 또 다른 신통력이 있는 모양이지요?”
그는 놀란 표정을 거두며 물었다.
“도우의 혜안이 대단하오! 물론 빛을 비춰도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작은 특징일 뿐, 무영옥의 진정한 효과는 아주 강한 파금력(破禁力: 금제를 깨뜨리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이오. 구혼사자(*勾魂使者: 저승사자를 일컫는 말)들이 결계로 덮인 곳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사람의 넋을 빼 갈 수 있는 것도 이걸 하나씩 차고 다니기 때문이라고 전해지지.”
회의의 사내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이런 진기한 보물도 있었구려!”
심협은 진심으로 경탄했다.
“한데 이 무영옥은 내부가 음기에 오염된 듯하니 제거해야만 하겠소.”
회의의 사내는 회색 돌을 들어 내부를 들여다보며 살짝 인상을 썼다.
“어려운 일이오?”
“이 옥은 구조가 특이해서 법력이 안에 침투하기 어렵소. 그러니 안쪽의 음기를 제거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렇다 해도 이런 큰 보물을 거저 얻은 셈이니, 방법은 차차 생각해봐야지요.”
심협의 질문에 회의의 사내는 탄식하면서도 만족스러워했다.
“내게 그런 효력을 지닌 물건이 하나 있긴 한데…… 때마침 나도 그 물건의 효력을 시험해보고 싶었소. 어디 한번 시험해볼 기회를 주시겠소?”
심협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그렇게 제안했다.
“정말이오? 그럼 감사하지요.”
회의의 사내는 펄쩍 뛸 듯 기뻐하며 무영옥을 건넸다.
심협은 품에서 푸른 대나무 한 토막을 꺼냈다. 바로 황천 죽통이었다. 하지만 죽통은 그전보다 거의 반절이나 짧아져 있었다. <귀계영초대전(鬼界靈草大全)>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이 대나무의 힘은 함축적이어서 몇 동강이 난다고 해도 힘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만일에 대비하고자 아까 이 죽통을 반으로 동강냈던 것이다.
심협은 회의의 사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황천죽을 무영옥 위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러나 둘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맞다. 무명야귀 주인장이 말하기를, 황천죽에 음기를 어느 정도 주입해야 그 힘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했지. 한데 난 귀물이 아니니 어찌 음기를 주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무명야귀의 말을 기억해 내고는 무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