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67화 (167/1,214)
  • 167화. 무명야귀(無名野鬼)

    한참 고민하던 심협은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 무명야점으로 향했다.

    그곳은 그리 넓지 않았고, 꾸밈새는 무명야점이라는 이름에 어울렸다. 대략 서너 장 너비의 가게 양쪽으로는 진열대가 두 줄로 늘어서 있었고, 그 위에는 온갖 물건들이 종류 구분도 없이 엉망진창으로 진열돼 있었던 것이다.

    진열대 아래쪽 두 층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어, 보아하니 마지막으로 청소를 한 지가 한참 지난 듯했다.

    가게 안에 손님은 없었고, 피부가 검푸른 귀물 하나가 계산대 뒤에 앉아 있었다. 체구는 작달막했고, 몸에는 잿빛 겉옷을 걸쳤으며, 머리에는 끝이 높고 뾰족한 검은 고깔모자를 쓴 귀물이었다. 모자도 시커멓게 때가 낀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랫동안 빨지도 않은 것 같았다.

    “남쪽에 휘늘어진 나무 있어, 칡덩굴이 얽혔다네. 즐거워라 우리 임, 복록이 임을 편케 하리라(*南有樛木, 葛藟纍之/樂只君子,福履綏之: <시경(詩經)>의 한 구절).”

    검푸른 귀물은 서책 한 권을 받쳐 들고 흔들흔들 고갯짓을 하며 한창 시를 읊조렸다. 영락없는 책벌레 모습으로, 심협이 들어온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심협은 귀물이 인간계의 <시경>을 읽고 있자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흠! 흠! 허험!”

    심협은 두어 번 헛기침을 했으나, 귀물은 여전히 <시경>에 빠져 있었다. 이에 그는 계산대를 톡톡 두드렸다.

    “주인장!”

    “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독서가 너무 즐거워서 그만 잠시 정신을 놓아버렸군요. 귀한 손님을 홀대하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무명야귀(無名野鬼)라 합니다. 이 가게의 주인이지요. 손님께서는 무얼 사시렵니까?”

    검푸른 귀물은 황급히 서책을 내려놓고 웃으며 물었다.

    “무명야귀와 무명야점이라…… 아주 잘 어울리긴 합니다. 하하!”

    심협은 농을 건네고 웃을 뿐, 곧바로 거래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게 곳곳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이거 부끄럽군요. 허나 이름을 알려드리고 싶지 않은 게 결코 아닙니다. 실로 이름을 기억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무명야귀라 부르지요.”

    무명야귀는 화를 내지 않고 속도를 맞춰 심협 뒤를 따라 걸었다.

    심협은 재빨리 가게 안을 자세히 살폈으나, 특이한 점은 찾지 못했다. 심지어 자칭 무명야귀라는 주인장도 평범한 귀물로, 수련 경지는 기껏해야 벽곡기 초기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심협은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 아이는 왜 내게 여기를 찾아가라고 한 걸까?’

    심협은 잠시 그런 생각을 했으나, 이내 의미 없는 생각을 멈췄다.

    “저는 물건을 사러 온 게 아닙니다. 혹시 가게에서 법기도 받으시는지요?”

    “법기! 당연히 받지요. 손님께서는 무얼 파시려나 모르겠습니다만?”

    심협의 질문에 무명야귀는 기쁜 듯 안색이 밝아졌다.

    심협은 손으로 품속을 더듬어 석합에서 금빛 항마저 한 자루를 꺼내들었다. 당연히 수라괴뢰귀의 무기였다.

    이 항마저는 분명 법기의 단계에 이르렀고, 재료나 등급 모두 그의 귀소환보다 훨씬 뛰어났다. 본래는 언젠가 직접 쓸 요량이었지만, 지금은 아까워할 때가 아니었다. 당장 더 필요한 것은 벽곡기로 돌파하는 것이니까.

    “제 법기가 어떤지 좀 봐주십시오.”

    심협이 그 말을 마치기도 전에 덜커덩 하는 소리가 말을 끊었다. 그의 품에서 푸른 죽통이 딸려 나와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바로 무명천서와 함께 석합 안에 넣어두었던 죽통이었다.

    심협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는 허리를 숙여 죽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대충 품 안에 쑤셔 넣은 뒤, 항마저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무명야귀의 멍한 눈은 반쯤 밖으로 죽통에 멈춰 있었다.

    “주인장?”

    심협이 의아해하며 부르자 무명야귀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또 잠시 넋을 놓았군요. 한데 손님, 방금 그 죽통을 제게 좀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무명야귀는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죽통을 보며 손을 비볐다.

    ‘구혼마면 선배님이 귀시에서는 싸움을 금한다고 하셨으니, 강제로 내 물건을 빼앗지는 않겠지? 게다가 이 죽통의 내력을 분명히 밝힐 수 있다면 내게도 좋은 일이지.’

    심협은 생각을 정리한 뒤 죽통을 꺼내 무명야귀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무명야귀는 거듭 기뻐하며 죽통을 받아들더니 자세히 관찰했다. 작고 가는 손가락으로 죽통 겉면을 가볍게 쓸고 톡톡 두드려 보는 게, 매우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점점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럴 리가! 설마 내가 잘못 짚었단 말인가?”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손가락을 구부려 죽통을 가리켰다. 그러자 한 줄기 검은 빛이 날아가 죽통을 두들기고는 곧장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무명야귀는 활짝 웃더니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죽통을 가리켰다. 이번에는 굵직한 검은 빛 한 줄기가 솟아나와 끊임없이 죽통 안으로 녹아들어갔다.

    원래 비취색이던 죽통 위에는 천천히 검은 덩어리가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이어서 호흡 몇 번 할 사이에 비취색 죽통이 칠흑 같은 묵죽(墨竹)으로 변하면서, 그 위에 붉은 반점들이 떠올랐다.

    “과연 그랬군! 황천죽(黃泉竹)이었어!”

    무명야귀는 검은 빛을 주입하던 것을 멈추고는 흥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때였다. 갑자기 죽통 겉면의 붉은 반점들이 빛나기 시작하더니, 곧 무명야귀의 두 손에서 검은 기운이 미친 듯이 솟아나와 봇물 터진 듯 죽통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

    무명야귀는 낯빛이 변해서는 비명을 질렀고, 뱀이나 전갈 따위를 피하듯 죽통을 내던졌다. 손에서 용솟음치던 검은 기운도 그제야 멈췄다.

    죽통은 바닥을 두어 번 구르다가 멈췄는데, 윗면의 붉은 반점들은 몇 번 반짝이더니 차츰 어두워졌다. 그리고 죽통의 검은 빛도 빠르게 사라져 이내 다시 비취색으로 되돌아갔다.

    일련의 변화를 지켜보던 심협은 깜짝 놀랐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다가가 죽통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다가 아무런 변화가 없자, 그제야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황천죽이 음기를 이렇게까지 맹렬하게 빨아들일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재빨리 내던졌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음기를 다 뺏겨 비쩍 마른 시체가 됐을 겁니다. 허허!”

    무명야귀는 심협이 들고 있는 푸른 죽통을 보며 아직도 두려운 듯 몸을 떨었다.

    “황천죽이 뭡니까?”

    심협은 무언가를 어렴풋이 짐작했으나 확실히 하기 위해 물었다.

    “황천죽은 우리 귀계(鬼界)의 진귀한 음죽(陰竹)입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황천대하(黃泉大河) 근처에서 자란다는데, 음기를 빨아들이고 넋을 집어삼키는 신통력을 지녔다고 하지요. 손님의 그 죽통은 나이가 아주 어린 황천죽으로 만든 것입니다. 음기를 대량으로 주입해야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지요.”

    무명야귀는 자신의 손을 힐끗 내려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덕분에 손님께서도 목숨을 건지신 겁니다. 만약 황천죽의 햇수가 충분히 오래됐더라면, 손님께서 만지신 순간 온몸의 음기를 모조리 빨아들였을 테니까요.”

    무명야귀의 말에 심협은 내심 놀람과 기쁨이 교차했다.

    ‘이 죽통에 그런 대단한 내력이 숨겨져 있었다니! 무명야귀는 햇수가 얼마 안됐다고 했지만, 그래도 분명 값이 꽤 나갈 거야.’

    그는 죽통을 석합에 다시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니 그랬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장.”

    “도우께서는 제게 황천죽을 파실 생각 없으십니까? 제가 300에 쳐드리겠습니다! 아니다. 선옥 350개!”

    무명야귀는 심협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하자 황급히 말했다.

    ‘선옥 350개?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심협은 최근 놀랄 일이 많았으나, 이 정도로 놀란 것은 오랜만인 듯했다. 이 죽통이 진귀한 것일 거라 짐작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니 살짝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토록 귀한 것이라면 함부로 넘길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귀물을 억제하는 작용을 지닌 물건이라면 앞으로 크게 쓰일지도 모르니 선뜻 팔 수는 없었다.

    “주인장께는 미안하지만, 이 죽통은 제가 달리 쓸 데가 있어 팔 계획이 없습니다.”

    심협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명야귀는 상대의 표정이 굳건한 것을 보고 그가 뜻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낙담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장, 대신 이 법기를 좀 더 봐주시지요. 받으실 겁니까?”

    심협이 계산대 위의 항마저를 가리키며 말을 돌렸다.

    “예, 예. 당연히 받습지요.”

    무명야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아쉬움을 삼키더니 금빛 항마저를 집어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가벼운 탄성을 내질렀다.

    이어서 그가 음기를 주입하자, 항마저에서 갑자기 금빛 빛줄기들이 피어나 일곱 가닥의 부적문양으로 이루어진 빛 고리가 나타났다. 이 빛 고리는 사납고 거친 법력 파동을 내뿜었다. 주변 공기까지도 크게 떨릴 정도였다.

    “칠도금제(七道禁制)가 걸린 상품(上品) 법기로군요! 재질도 훌륭합니다! 손님께서 가져오신 것들은 과연 모두 좋은 물건이니, 이 물건은 제가 거두지요. 선옥 130개 어떻습니까?”

    무명야귀는 기쁜 기색으로 제안했다.

    심협은 요 며칠간 마 주인장을 비롯한 상인들을 자주 만나면서 수선계(修仙界)의 물건들에 대한 이해도 높아져 법기의 가격 역시 약간은 알게 됐다. 그는 원래 선옥 120개를 목표로 했고, 100개만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무명야귀가 제시한 값은 예상을 훌쩍 넘었으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본래 그는 몇 군데 더 돌아다니며 가격을 비교해보고 팔 생각이었으나, 무명야귀가 이렇게 꾀자 그 생각을 접었다.

    “좋소!”

    심협은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명야귀는 기쁜 기색으로 항마저를 챙기더니, 계산대 아래에서 선옥 30덩이와 눈에 띄게 큰 선옥 한 덩이를 가져와 심협에게 건넸다.

    심협의 눈가가 움찔했다. 저 큰 선옥은 단순히 크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안에 머금은 영력도 보통 선옥보다 훨씬 강해, 아주 멀리서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중품 선옥이란 말인가?’

    그는 속으로 감탄하며 커다란 선옥을 살펴보았다.

    선옥은 수선계의 통용화폐로, 법기와 마찬가지로 등급에 구분이 있다. 깃들어 있는 영력에 따라 크게 네 개의 등급으로 나뉘는데, 각각 하품, 중품, 상품과 극품(極品) 선옥이다.

    선옥은 등급이 한 단계씩 높아질 때마다 안에 담긴 영력이 수십 배는 오르는 데다, 순도가 높을수록 가치도 더 높다. 보통 중품 선옥 하나면 하품 선옥 100개와도 바꿀 수 있었다.

    상품과 중품 선옥을 교환할 때는 어떻게 되는지 심협도 알지 못했다. 그가 지금껏 보거나 사용한 것들은 하품 선옥으로, 중품 선옥을 보는 것도 처음이니 상품 선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심협은 선옥들을 모두 챙기고는 인사를 하고 가게를 떠났다.

    무명야귀는 사근사근하게 심협을 문 앞까지 배웅하면서도, 황천죽통을 단념하지 않은 듯 마음이 바뀌면 꼭 자기에게 와 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값은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을 만큼 쳐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심협은 자연스레 웃어넘기고 얼른 문을 나섰다.

    무명야귀는 심협을 눈으로 전송하며, 한숨을 푹 내쉬고는 가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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