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66화 (166/1,214)

166화. 무상각(無常閣)

두 사람은 이내 그림자가 드리운 곳에 이르렀다.

심협의 짐작대로 그 그림자는 거대한 두 개의 산봉우리였다. 그 중간에는 골짜기가 하나 있었는데, 매우 넓어서 족히 30묘 정도는 되어 보였다. 하지만 얼핏 보아도 매우 황량하여 귀시는커녕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그 꼬마가 우릴 속인 건 아니겠지? 아니면 이 근처에 다른 골짜기가 또 있나?”

심협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마 여기가 틀림없을 거요. 일단 우리 먼저 들어가 봅시다.”

회의의 사내도 골짜기 안을 살피더니 그렇게 말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골짜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골짜기에 두 발을 내딛는 순간, 갑자기 골짜기 안의 정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머리 위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반투명한 편액이 떠올랐다. 그 위에는 커다랗게 귀시(鬼市)라고 적혀 있었다.

편액 뒤편 골짜기 하늘에는 거대한 녹색 광막이 떠올라 온 골짜기를 완전히 뒤덮었다. 또한, 그 위로는 크고 작은 부적 문양들과 무늬들이 무수하게 떠올라 갖가지 기이한 도안들을 만들어내며 끊임없이 반짝였다.

한편, 광막 아래에서는 난데없이 거대한 궁전과 누각 형상의 건물들이 골짜기 한가운데에 나타났다.

건물들은 대부분 상점 같았으나, 건업성의 그것들보다 몇 곱절은 거대했고, 대문과 담장 위에도 가닥가닥 문양이 그려진 채 다양한 색상의 빛을 발산했다. 비록 피처럼 붉은 빛깔이나 짙은 초록빛이 많아 음산해 보이고 간혹 귀신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장관임은 분명했다.

수많은 형체가 건물들을 드나들었는데, 생김새는 제각기 달라도 하나같이 귀물들이었다. 어떤 이는 팔척장신에 서슬 퍼런 얼굴 위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 더없이 흉악해 보였고, 체구가 땅딸막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긴 자도 있었다. 그밖에도 해골귀나 건시귀(乾屍鬼), 유령 등 귀물들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이 귀물들은 흉악한 외모와 달리 눈빛은 깨끗하고 맑았다. 심협이 지금껏 만났던, 살육밖에 모르는 귀물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누각 건물 앞은 넓은 공터로, 네모진 벽돌을 깔아 큰 광장을 이루고 있었다. 바닥의 벽돌들은 마치 전체가 푸른 옥처럼 파랗고, 그 위에 결결이 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며, 끊임없이 푸른 빛을 뿜어내 산골짜기를 밝게 비추었다.

광장에는 수많은 노점상들이 늘어선 채 수선(修仙)과 관련된 갖가지 물건들을 펼쳐놓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물건들이 일으키는 법력의 파동이 전해져 왔다. 많은 귀물들이 이런 노점들 앞을 오가며 훑어보았고, 몇 마디 물어보기도 했다.

멀리서 상점에 드나드는 귀물들이든, 광장의 귀물들이든, 약한 이는 하나도 없는 듯 다들 강력한 음기의 파동을 뿜어냈다.

이 광경에 심협은 절로 긴장했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에야 안정을 되찾았다.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수선 세계로군. 내가 상상한 것처럼 실로 웅장해. 건업성이나 춘추관은 여기 비하면 좀스러울 정도로군. 골짜기 주변에는 분명 특별한 금제가 걸려 있을 테지. 이토록 넓은 범위를 바깥에서는 전혀 볼 수 없고, 안으로 들어와야만 귀시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걸 보면 틀림없어. 게다가 이 신묘한 금제 역시 춘추관과 건업성 정도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야.’

곁에 선 회의의 사내도 놀란 듯했지만, 그 역시 재빨리 평정심을 되찾았다.

“먼저 실례하겠소.”

회의의 사내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심협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골짜기에 들어가 금세 광장의 귀물 무리에 섞였다.

심협도 이를 딱히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그 역시 지금 귀시의 번화한 풍경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계를 늦추지도, 섣불리 들어가지도 않고 먼저 광장 근처로 향했다.

골짜기 안 귀물들의 기운은 하나같이 강했고, 대부분 수련 경지가 그보다 높았다. 어쨌거나 수선계(修仙界)에서 연기기 후기는 이제 막 걸음마 단계에 속할 뿐이니, 이곳이 안전하다던 구혼마면의 말만 믿기보다는 조심하기로 했다.

심협은 수많은 귀물을 스쳐갔지만, 그들은 그를 흘끗 쳐다보기만 했을 뿐,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가 살아 있는 사람임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심협은 그제야 내심 안도했으나, 그 뒤로도 광장 변두리에서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골짜기 깊은 곳보다는 광장으로 먼저 들어가, 노점상들을 구경했다.

일전에 꿈속 방촌산에서 풀과 나무, 벌레와 짐승 그리고 광석 등의 주해를 망라해놓은 <선령백초(仙靈百草)>라는 책을 읽어보았기에, 그는 식견이 제법 넓었다.

노점상들은 규모가 작았지만, 그 위에 늘어놓은 물건들은 하나같이 비범한 것들이었다. 재료들도 낮은 등급은 보기 드물었고, 대부분 중급, 심지어는 고급 재료들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귀시인 만큼, 재료 대부분은 음속성 물건이라 그가 쓸 수 없었다.

갖가지 종류의 부적들도 있었다. 음화부(陰火符)며 환영부(幻影符), 진보부(進寶符) 등등 가지각색이었는데, 보아하니 모두 가격이 꽤 높은 모양이었다.

심협은 본디 부적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생소한 부적들을 몽땅 사가지고 가 제대로 연구해 보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살짝 알아보니, 안타깝게도 어지간한 부적은 가격이 선옥 두세 덩이였고, 공격류 부적은 더 비쌌다.

‘응원단을 사야 하니 오늘은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군.’

재료와 부적 외에도 약간의 부기와 약품 등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상처 치료나 해독용이었고, 수련의 경지를 높여주는 진귀한 단약은 없었다.

노점상을 구경하는 동안 단 하나도 살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심협은 견문이 크게 트였다.

‘됐다. 중요한 일부터 처리하는 게 낫겠어.’

그는 광장의 노점상들을 절반 정도 구경하고는 억지로 마음을 다잡고 골짜기 중앙의 상점들로 향했다.

광장에서 귀물들의 대화를 통해 그는 중요한 정보를 알게 됐는데, 귀시에도 시간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한밤중인 자시에 시작해 하늘이 밝아오는 묘시(*卯時: 오전 5시에서 7시 사이)면 귀시는 끝난다. 시간이 결코 길지 않으니 서둘러야 했다.

골짜기 중심에는 상점이 꽤 많았다. 족히 서른 곳은 됐는데, 모두 수선과 관련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심협은 잠시 거닐며 구경하다가 금방 단약을 파는 상점을 발견했다. 제법 넓은 단약포(丹藥鋪)로, 안에 기다란 계산대가 다섯 개나 있었다. 계산대 위에는 유리 같이 투명한 옥돌이 한 겹 덮여 있었고, 그 아래로는 갖가지 단약이 펼쳐져 있었으며, 각각 이름과 효과가 적혀 있었다.

심협은 단약들을 몇 번 살펴보았다. 이곳의 단약들은 노점의 단약들보다 훨씬 상급이었고, 종류도 훨씬 다양했다. 개중에는 근본을 튼튼하게 해주고 원신(元神)을 북돋워 수련 경지를 높여주는 단약들도 있었다.

“손님, 어떤 단약을 원하십니까?”

사람과 꽤 비슷하지만, 머리에 외뿔이 달리고 얼굴은 푸르딩딩하며 눈이 붉은 여인이 다가왔다. 보아하니 단약포 주인장인 듯했다.

“혹시 응원단 있습니까?”

심협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응원단? 그게 뭐죠? 처음 들어보는데요.”

주인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협은 다소 당황했으나, 이내 어찌된 영문인지 깨달았다. 응원단은 인간의 단약이고 이곳은 귀시이니, 단약포 주인이 모르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벽곡기를 돌파하게 도와주는 단약입니다.”

“아! 파경(破境)단약을 원하시는 거군요? 이거 죄송합니다. 파경단약은 워낙 귀하고 드물어 우리 가게에는 딱 두 종류뿐입니다. 그런데 둘 다 연기기에나 소용 있을 뿐, 벽곡기 파경단약은 없답니다.”

주인장은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심협은 실망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상점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후로도 단약 상점 서너 군데를 더 가봤지만, 여전히 소득은 없었다.

‘귀시라 해도 응원단 같은 단약은 그리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닌가 보구나.’

심협은 점차 기운이 빠졌으나,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또 하나의 단약포를 발견하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들어갔다.

“벽곡기 파경단약이요? 죄송합니다만, 우리 가게에는 없습니다요.”

상점 주인장인 유령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그리 말하자 심협은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설마 귀시에서도 응원단은 찾지 못한단 말인가?’

그때, 심협의 기분을 읽기라도 한 듯 유령 노인이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손님, 귀시에는 처음 오셨지요? 그런 단약을 사시려거든 무상각(無常閣)으로 가십시오. 손님께서 원하시는 단약은 온 귀시를 통틀어 그곳에만 있습죠.”

“무상각?”

심협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저 하얗고 커다란 상점입니다요. 재료, 단약, 부적, 법기 등을 거래하지요. 귀시에서 가장 좋은 물건들이 저기 다 모여 있습니다. 물론 가격도 가장 높지요.”

유령 노인은 어딘가를 바라보며 말했는데,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질투가 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시선을 따라 바라보니, 커다란 상점 하나가 멀리 우뚝 솟아 있었다.

상점 꼭대기 부분에는 사람 형상의 조각상 두 개가 우뚝 서 있었다. 백의를 입은 조각상 하나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안색이 파리했는데, 기다란 혀를 내민 채, 머리에는 일견성재(*一見成財: 보기만 하면 재물이 생긴다)라는 네 글자가 적힌, 끝이 뾰족하고 하얀 관모(官帽)를 쓰고 있었다.

또 다른 조각상은 반대로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흉악하고 사나웠으며, 펑퍼짐한 체구에 머리에는 천하태평(天下太平)이라고 적힌 검은 관모를 쓰고 있었다. 관모의 모양은 백의의 조각상이 쓴 것과 비슷했다.

조각상 아래는 4층짜리 높은 누각이 있었다. 누각은 하얀 벽과 옥 기와로 이루어졌고, 대문은 근처 다른 상점들보다 세 배는 컸다. 그 위에는 은빛 바탕에 붉은 글자로 무상각(無常閣)이라는 세 글자가 적힌 큼지막한 편액이 걸려 있었다.

수많은 귀물이 무상각 대문을 드나들었는데, 들어간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밖으로 나오는 이들도 대부분 웃고 있었다. 큰 수확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상각이라……. 혹시 두 무상(*無常: 저승 차사로, 흑무상은 음, 백무상은 양에 속한다)대인께서 차리신 상점입니까?”

심협은 상점 지붕의 두 조각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건 이 늙은이도 모릅니다요. 누군 맞다 하고, 누군 틀리다 하는데, 누가 알겠습니까! 어쨌거나 저기 들어가시면 절대로 말썽 일으키지 마십시오. 그랬다가는 누구도 손님을 구해줄 수 없을 겁니다.”

유령 노인이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심협은 유령 노인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상점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는 바로 무상각으로 가지 않고 먼저 주위를 둘러봤다.

“보아하니 연기기 파경단약만 해도 선옥 삼사십 개는 필요하다 했으니, 벽곡기 파경단약은 훨씬 비싸겠지. 내가 가진 걸로는 부족할 게야. 뭐라도 팔아서 선옥을 마련해야겠어.”

그는 혀를 차며 이리저리 둘러봤는데, 문득 저 멀리 작은 잡화점의 편액이 눈에 들어왔다.

“무명야점? 아까 그 꼬마가 내게 가보라 했던 곳 아닌가! 정말 있는 가게였다니! 아니, 어쩌면 그 꼬마가 저 가게 주인과 한통속일지도 모르지.”

그는 그 아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쉬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 아이는 뭔가 헤아릴 수 없는 심오한 느낌이 들었다. 사기꾼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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