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65화 (165/1,214)
  • 165화. 길동무

    두 사람이 말없이 앉아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고, 밤이 점점 깊어갔다. 그러나 이런 황야에는 야경을 돌며 시간을 알리는 이도 없고, 닭 울음도 없다 보니 시간을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잠시 후, 심협이 떨궜던 고개를 치켜들며 일어났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그는 시간을 계산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의술을 익힌 그는 일찍이 자오류주(子午流注)라는 의결(醫訣)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자오류주에서는 사람 몸의 12줄기 경맥이 하루 12시진과 서로 짝을 이루는데, 각 시간마다 12경맥의 기혈 운행에도 미세한 차이가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자시에는 기혈이 담경(膽經)으로 흘러 들어가지만, 축시(*丑時: 새벽 1시부터 3시까지)에는 간경(肝經)으로 흘러 들어가는 식이다.

    몇 년간 연구한 끝에 그는 자오류주를 완벽하게 정복했고, 자기 몸의 기혈 운행 상황에 따라 시간을 거꾸로 추측할 수 있게 됐다.

    ‘기혈이 막 담경 안의 혈로 밀려들기 시작했으니, 곧 자시가 다가온다는 뜻.’

    옆에서 심협의 거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던 사내는 의아해 하는 기색이었으나, 그 역시 몸을 일으켰다.

    그때, 갑자기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더니, 심협이 쓴 탈이 얼음처럼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위로 엷은 검은색 기운이 솟구쳐 나와 순식간에 그의 몸을 뒤덮은 채 피부에 바싹 감겨들었다.

    몇 번 호흡할 사이에 심협은 갈색 머리카락에 검은 피부를 한 귀물이 되어 있었다. 기운 역시 귀물처럼 음산하게 변한 상태였다.

    상황은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회의의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느새 몸 전체가 검붉은 귀물이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놀란 듯 휘둥그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때,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졌다. 이어서 어디선가 무수한 잿빛 안개가 생겨나 순식간에 주변 모든 것을 뒤덮었다.

    간담이 서늘해진 심협은 손바닥을 뒤집어 귀소환을 꺼냈다. 다른 손에는 누런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소뢰부 두어 장이 더 나타났다.

    그러나 잿빛 안개는 그저 허공을 뒤덮고 있을 뿐, 다른 영향은 미치지 않았다.

    짙은 잿빛 안개는 잠시 동안 물 흐르듯 용솟음치더니 순식간에 또다시 흩날리며 사라졌다. 그러자 별안간 주변 풍경이 완전히 바뀌어 이제 소나무 숲이 아니라 어느 황량한 사막으로 변해 있었다.

    땅 곳곳에는 검은 자갈이 널려 있었고, 돌 틈으로 자라난 이끼들을 제외하고는 생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이 황량한 사막에도 가닥가닥 잿빛 안개가 떠돌고 있어 20~30여 장 거리 너머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여기가 귀시란 말인가? 한데 왜 이리 황량하지? 장터는 고사하고 귀신 그림자 하나 없다니…….”

    심협은 경악하면서도 내심 의아했다.

    그와 서너 장 거리를 두고 선 회의(灰衣)의 사내도 손에 잿빛 귀두도(*鬼頭刀: 자루 부분에 귀신 얼굴이 새겨진 크고 무거운 칼. 주로 참수에 쓰였음) 한 자루를 든 채 놀란 듯 주변을 살폈다.

    심협은 주위를 살피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회의의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내는 곧장 경계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는데, 무척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심협은 그의 이런 모습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도우, 난 악의가 전혀 없소. 이곳은 아주 이상해 보이기도 하고, 또 우리는 같은 곳에서 함께 왔으니 반쯤은 같은 고향 사람 아니겠소? 그러니 함께 움직이는 게 어떻겠소? 뜻밖의 사고가 생겨도 서로 살펴줄 수 있을 테니 말이오.”

    그는 더 다가가지 않고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서서 공수하며 말했다.

    회의의 사내도 주변을 두어 번 둘러보더니,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리 합시다.”

    심협은 잘 생각했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귀신의 것으로 변한 입꼬리가 찢어지듯 벌어졌다.

    “이왕 동행하기로 한 김에 통성명이나 합시다. 나는 전철생이라 하오.”

    그는 사형의 이름을 빌려 썼다.

    “나는 성이 홍(洪)가요.”

    회색 장포 사내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리 답했다.

    둘 다 이름을 제대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통성명을 하고 나니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홍 도우셨군요. 도우께서는 귀시에 와본 적이 있소?”

    심협이 묻자 회의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없소.”

    “나도 없소. 둘 다 처음이니 일단 여기저기 좀 살펴봅시다.”

    심협이 제안했다.

    “응.”

    상대는 짧게 대꾸했다.

    심협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여기저기 풍경이 거의 다 똑같아 아무 차이가 없어 보였다.

    “이쪽으로 갑시다.”

    회색 장포 사내가 불쑥 말하더니 한쪽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분명 대단한 탐사술(探査術)을 지녔을 거야.’

    심협은 청송림에서 상대가 멀리에서도 자기를 발견했던 것을 떠올리고는 말없이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길을 잃을 것을 우려해 어느 정도 걸을 때마다 바닥에 슬그머니 표시를 해두었다.

    검고 황량한 사막에는 안개만이 감돌았고,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허공에서 가볍게 메아리쳤다.

    처음에는 그래도 침착함을 유지했던 심협은 시간이 흐르는데도 주변에 털끝만큼의 변화도 보이지 않자 내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더 가도 아무런 변함이 없자, 참다못한 그는 회색 장포 사내에게 뭔가를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우뚝 멈춰 서서 앞을 바라보았다.

    멀리 안개 속에서 산봉우리 같은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심협은 회색 장포 사내를 힐끗 보았으나, 상대는 미동도 없었다.

    ‘저리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저 산 그림자를 봤단 말인가?’

    심협은 꽤나 놀랐지만, 얼굴에는 조금도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발걸음을 서두르려던 그는 갑자기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드르릉! 드르릉!

    그쪽에서 기이한 소리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며 들려왔으나, 무슨 소리인지 분명히 알 수 없었다.

    회의의 사내도 그쪽을 보았다.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게 분명했다.

    “한번 가보겠소?”

    “좋소. 이곳은 좀 이상하지만, 어쨌든 귀시를 찾아야 하니 말이오. 저 소리의 원인을 찾아보는 게 좋겠소.”

    회의의 사내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심협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각자 손에 무기를 움켜쥔 채,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걸었다.

    잠시 후, 높이가 1장에 이르는 크고 검은 바위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 이상한 소리는 바위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회의의 사내는 심협을 힐끗 보더니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좌우로 포위해 공격하자는 신호가 분명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귀소환을 쥔 채 조심스레 바위의 왼쪽으로 향했고, 회의의 사내는 오른쪽으로 움직여 재빨리 바위 뒷면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내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바위 뒤에는 웬 어린 사내아이 하나가 누워 있었던 것이다. 보아하니 겨우 네다섯 살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그 아이는 머리도, 얼굴도, 심지어 배도 동글동글한 것이 몹시도 귀여웠다. 아이는 배를 하늘로 향한 채 한창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 기이한 소리는 바로 아이가 코고는 소리였다.

    심협은 다소 놀랐지만, 재빨리 평정심을 되찾고 아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이의 머리는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매끈했지만, 미간에는 선홍색 물방울 모양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자그마한 얼굴이 그야말로 사랑스럽게 생긴, 얼핏 보면 평범한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아이가 입은 회백색 도포(*道袍: 도교 수행자들의 복식을 뜻함)에는 태극음양어(*太極陰陽魚: 검고 흰 두 마리 물고기가 태극 문양으로 얽혀 있는 그림) 도안이 수놓아져 있었다. 등 뒤에 멘 봇짐은 터질 듯 빵빵했는데,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심협은 미간을 팩 찌푸렸다.

    ‘인적도 없고 이토록 황폐한 곳에 뜬금없이 어린아이가 나타나다니, 기이한 일이다. 아이에게서 법력 파동이 느껴지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야.’

    심협이 회의의 사내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도우, 그대가 보기에는 어찌 해야 할 것 같소?”

    그러나 회의의 사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사내아이의 작고 동글동글한 머리가 두어 번 흔들렸다. 이어서 아이가 입을 쩍 벌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순간, 심협은 낯빛을 살짝 바꾸며 귀소환을 쥔 손을 앞에 둔 채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회의의 사내도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귀두도를 꽉 움켜쥐었다.

    “너희는 누구야?”

    사내아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귀물의 모습을 한 심협과 회색 장포의 사내를 보고도 두려워하거나 놀라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말소리가 분명치 않은 것을 보니 아직 잠이 덜 깬 듯했다.

    “꼬마야, 너는 누구냐? 어찌 여기 있는 것이야?”

    회색 장포의 사내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이자, 심협이 나서며 물었다.

    “내 이름은 옥관(玉官)이야. 너네 귀시에 참가하러 왔어?”

    사내아이가 물었다.

    “그래. 그런데 처음 와보는 거라서 아직 어디에 있는지 찾질 못했단다. 옥관 소동(小童), 귀시가 어딘지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어?”

    심협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너희가 온 곳에서는 인로등혼(引路燈魂)이 길 안내를 해주지 않았어?”

    아이는 뒤통수를 긁적이면서 조금 의아한 듯 물었다.

    “인로등혼? 못 봤는데?”

    심협은 회의의 사내와 눈빛을 한 차례 교환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오, 보아하니 순찰병들이 또 게으름을 피운 모양이군.”

    아이는 그렇게 툴툴거리고는 다시 두 사람에게로 졸린 눈을 돌렸다.

    “그래도 잘못 찾아오지는 않았어. 귀시는 바로 앞 골짜기에 있으니까. 너희…….”

    아이는 곧 손을 들어 앞에 있는 안개 속 산 그림자를 가리키며 뭔가 말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이어서 아이의 작은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아이의 이런 극심한 표정변화를 본 심협도 미간을 찌푸렸다.

    “귀시에 참가하러 왔다고 했지? 그럼 귀시가 벌써 시작됐단 말이네? 지금 몇 시야?”

    아이는 갑자기 겁먹은 표정으로 심협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물었다.

    “자시 일각.”

    심협은 몸 안 기혈의 흐름을 잠시 느껴보더니 말했다.

    “정말이야? 아이고, 내가 너무 늘어지게 잤구나! 사부님께서 분명 화내실 텐데……. 옥관을 때리실 거야. 옥관은 얼른 돌아가야겠어!”

    아이는 후다닥 일어나 앞으로 내달렸다. 그 속도가 놀랍도록 빨라 아이의 작은 그림자는 순식간에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심협과 회의의 사내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하고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허나 그 아이 덕에 귀시가 있는 곳을 알게 됐으니 나름 수확이 있었던 셈이다.

    두 사람이 막 다시 출발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안개 속에서 발소리가 울리더니 작은 형체가 달려왔다. 아까 그 사내아이가 다시 달려온 것이다.

    이 아이는 곧장 심협 앞에 이르렀다.

    “사부님께서 남의 도움을 받으면 보답할 줄 알아야 한다고 옥관에게 가르쳐주셨지. 방금 깨워준 거 고마워. 이거 줄게.”

    아이는 등 뒤의 봇짐에서 영패(*令牌: 도교에서 사용하는 법기의 일종) 같은 것을 꺼내 심협의 손에 억지로 쥐어주었다.

    이 갑작스런 상황에 심협은 또다시 멍해졌다.

    회의의 사내가 유심한 눈으로 그를 보았지만, 그가 서 있는 각도에서는 아이가 심협에게 쥐어준 물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까 내가 잠깐 봤는데, 네가 귀시에 온 목적을 이루려면 귀시의 무명야점(無名野店)에 가야만 해.”

    아이는 재빠르게 한 마디를 남긴 뒤, 곧바로 몸을 돌려 다시 달려갔다.

    “봤다고?”

    심협은 또다시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미처 물어보기도 전에 아이의 모습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는 아이가 준 영패를 흘끗 보고는 품에 밀어 넣은 뒤, 회의의 사내와 눈빛을 교환한 후 다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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