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64화 (164/1,214)
  • 164화. 청송림(靑松林)

    이튿날 이른 아침, 심협의 처소.

    “둘째 장로님께서 직접 오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저 대신 가주님께도 감사인사를 전해주십시오.”

    심협은 백강풍을 처소 입구까지 배웅했다.

    “예의 차릴 것 없네, 심 도우. 모두 자네가 받아 마땅한 것들이야.”

    백강풍은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떠나갔다.

    방으로 돌아온 심협은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백강풍이 방금 전해주고 간 것으로, 선옥 열 덩이가 들어 있었다. 퇴마 임무가 사라진 뒤로 선옥을 모으는 속도가 더뎌지면서 그는 밤낮없이 소뢰부를 그리던 중이었다.

    사실 귀환이 사라지면서 소뢰부의 판매도 크게 줄었지만, 다행히 마 주인장이 소뢰부 값을 전혀 낮추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심협은 어제 완성한 부적들을 챙겨 들고 문을 나섰다. 그런데 잠시 후, 녹보당 앞에 도착한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녹보당은 문이 반쯤 닫혀 있었고, 창문도 굳게 닫힌 데다가 등불도 켜지 않아 어두컴컴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심협은 바짝 긴장했다.

    ‘지금 내가 선옥을 모을 수 있는 곳은 녹보당이 유일하다. 절대 변고가 생겨서는 안 돼!’

    심협은 헐레벌떡 녹보당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 곳곳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마 주인장과 마수수는 계산대 옆에 서서 한창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 모두 표정이 무거웠다.

    “심 공자님, 부적을 가져오셨습니까?”

    주인장이 심협을 보고는 황급히 웃으며 맞았다.

    심협은 마 주인장의 웃는 얼굴조차 평소와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밖의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기에 애써 마음을 놓고는 품에서 소뢰부 30장을 꺼냈다.

    “심 공자님의 부적 그리는 솜씨는 정말 기가 막힙니다. 매일 이리 많은 부적을 그려내는 건 숙련된 부사(*符师: 부적술사)라 해도 어려울 겁니다.”

    마 주인장은 소뢰부를 받아 들고 선옥 두 덩이를 건넸다.

    심협은 살짝 미소 지었으나, 따로 답을 하지는 않고 선옥을 받아 챙겼다.

    “주인장, 가게 문도 열지 않았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심협은 사방을 한 차례 둘러보며 말했다.

    “말도 마십시오. 최근 액운이 들었는지 어느 도적떼에게 가게 물건을 한 무더기나 빼앗겼지 뭡니까. 손해가 아주 큽니다요.”

    “어디서 빼앗겼습니까? 관에는 알리셨고요?”

    마 주인장의 탄식에 심협이 걱정스레 물었다.

    “건업성 밖 80리 정도 떨어진 여수하에서 한 무리 수적 떼가 빼앗아 갔습죠. 관에는 당연히 알렸고요. 허나 그 수적 떼가 워낙 교활해서 털끝만 한 흔적도 남기지 않아, 관부에서 파견한 사람도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답니다.”

    마 주인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육지에서 물건을 빼앗긴 거라면 심협의 비범한 오감으로 어떻게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건은 물에서 벌어졌다. 어떤 냄새든 일단 물을 만나면 씻겨 내려가 버리니, 그로서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른 물건들은 그렇다 쳐도, 그 안에 있던 적사초(赤蛇草) 한 무더기도 함께 잃었지 뭡니까. 때려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마 주인장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적사초? 붉은 뱀 모양의 맹독을 지닌 영초(靈草) 말입니까? 제가 기억하기로는 그 풀은 그저 흔한 영재라 고작 몇 가지 독을 정제하는 데에만 쓰일 뿐이라던데…… 그다지 진귀하지 않다고 알고 있소.”

    심협은 고서적에서 읽은 기록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 공자께서 부적술에 정통하실 뿐만 아니라 연단술(煉丹術)에도 조예가 깊으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보통 적사초는 그렇지요. 허나 우리 녹보당에서 이번에 사들인 것은 쌍첨적사초(雙尖赤蛇草)입니다. 비록 맹독을 품고 있긴 하나, 한편으로는 경이로운 생명력을 지녀, 응원단(凝元丹)을 만드는 주 영재로 매우 귀중하지요.”

    마 주인장은 심협이 놀라는 모습을 보고는 다시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 이미 잃어버린 물건이에요. 더 생각해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마수수가 차를 받쳐 들고 다가와 심협 앞에 내려놓고는 마 주인장을 위로했다.

    마 주인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심협이 뭔가 생각났는지 무의식중에 질문을 내뱉었다.

    “응원단?”

    방촌산에서 본 고서 어딘가에 응원단에 대한 기록이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응원단은 벽곡기를 돌파하는데 도움이 되는 단약이었다.

    최근 꿈속 세상에서의 경험 덕분에 수련이 순조로워지자, 이제 연기기에 만족하지 않고 벽곡기를 바라보게 됐다. 그렇게 더 강력해지고 더 오래 살 수 있기를 바라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요 며칠간 심협은 부적을 그리는 틈틈이 백가의 장서각에 들어가 벽곡기 돌파에 대해 알아봤고, 이 관문의 어려움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천부적인 자질과 운, 재력, 심성 어느 하나 부족해서는 안 된다. 연기기 수사 백 명 중에 한 명이나 벽곡기에 오를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다.

    그는 꿈속에서 벽곡기를 돌파한 바 있지만, 그건 순전히 그 세계에서의 말도 안 될 만큼 뛰어난 자질 덕분이었다. 지금 그의 자질은 그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하니, 그 경험들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포기할 생각은 없다!’

    마 주인장은 심협이 응원단의 효능을 몰라 궁금히 여기는 것이라 여기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응원단은 벽곡기를 돌파하게 해주는, 아주 귀한 단약입니다. 성공률을 족히 이 할 가까이 끌어올릴 수 있지요.”

    “겨우 이 할 높이는 게 전부란 말입니까?”

    심협은 실망한 듯 되물었으나, 마 주인장은 마치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며 답했다.

    “이 할이면 엄청난 겁니다! 벽곡기를 돌파하는 데에는 두 가지 큰 난관이 있는데, 법력을 액체 형태로 바꾸는 것과 법맥을 트이게 하는 것입니다. 둘 다 지극히 어려워, 자질이 매우 뛰어나야 하지요. 쌍첨적사초를 정제해 응원단으로 만들었다면 가치가 열 배는 뛰었을 터인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마 주인장께서는 응원단을 정제할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제가 하나 사고 싶은데, 도와주실 수 있는지요?”

    심협은 흥미로운 기색을 내비치며 마 주인장에게 공수(拱手)하며 물었다.

    “아, 그게…….”

    마 주인장은 주름진 얼굴을 붉히며 우물거렸다.

    “심 오라버니, 아버지의 터무니없는 말씀은 듣지 마세요. 이번에 쌍첨적사초를 사들인 것은 단지 다른 사람과 물품을 좀 바꾼 것뿐이에요. 응원단은 진귀하기가 이를 데 없어 강력한 문파에서만 정제할 수 있답니다. 건업성에는 응원단을 정제할 수 있는 연단사(煉丹師)가 없지요. 응원단을 가진 곳도 건업성을 통틀어 오직 관부와 삼대 세가뿐이에요. 그나마도 아주 약간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요. 그러니 어찌 아버지께서 응원단을 정제할 수 있겠어요?”

    마수수가 그리 말하자 주인장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겸연쩍은 듯 웃었다.

    한편, 심협은 그 말에 크게 실망했다.

    ‘아니야, 실망할 것 없어. 구혼마면 선배님 말씀대로라면 귀시에는 온갖 보물이 있을 테니, 분명 응원단도 구할 수 있을 거야.’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불쑥 물었다.

    “주인장, 응원단 하나를 사려면 선옥은 몇 개나 필요합니까?”

    “응원단은 본래 부르는 게 값이었습니다.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었지요. 제 기억으로는…… 몇 년 전에 임씨 집안이 관부에서 하나 샀다고 들었는데, 그때 아마 선옥 80개였죠?”

    마 주인장은 기억을 되짚는 듯 머뭇거리며 말했다.

    “선옥 80개…….”

    심협은 허탈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며칠간 목숨 걸고 임무를 수행하고, 밤낮으로 부적을 그렸다. 그렇게 모은 선옥이 60개가 조금 넘는다. 아직도 10개 이상 부족하다. 터무니없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으나, 귀시가 열리기까지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서둘러야만 했다.

    “알려주셔서 감사하오, 주인장. 저는 일이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심협은 서둘러 떠나갔다.

    * * *

    “드디어, 기다리던 날이 왔구나.”

    심협은 탁자 위의 석합을 가볍게 쓸어보고는 푸른 천으로 감싸 등에 짊어졌다.

    마침내 귀시가 열리는 날이었다. 녹보당에 다녀온 후로 더욱 바삐 지낸 덕에 마침내 바로 어제 선옥 80개를 모을 수 있었다.

    그는 석합 안에 선옥을 비롯해 자신이 가진 값진 물건들은 몽땅 집어넣었다.

    하늘이 약간 어두워지자 심협은 백부를 나섰고, 이내 성을 벗어났다.

    지난 한 달 동안 청송림의 위치를 수소문해둔 그는 성을 벗어나자마자 작은 강줄기를 따라 서쪽으로 향했다. 이 강은 여수하의 지류로, 곧장 서쪽을 향해 흘러 강줄기를 따라 쭉 가면 청송림에 이를 터였다.

    아직 시간이 일렀기 때문에 심협은 서두르지 않았다.

    반 시진 걷자, 마침내 구불구불한 시내는 끝자락에 다다랐고, 울창한 소나무 숲이 나타났다.

    “여기인가?”

    심협은 설렘을 안고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다음 순간, 동공이 살짝 졸아들었다. 소나무 숲 안은 뜻밖에도 무덤들이 불뚝불뚝 솟아 있는 묘지였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밤중에 갑자기 묘지가 나타나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을 것이나, 심협은 수사였다. 귀물들도 적잖이 죽인 그가 무덤 따위에 겁먹을 이유는 없었다.

    “귀시와 묘지라……. 잘 어울리긴 하는군.”

    심협은 오히려 싱긋 웃고는 귀시면구(鬼市面具) 꺼내 얼굴에 썼다. 그리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청송림으로 들어갔다.

    청송림은 면적이 겨우 7, 8묘(*亩: 토지 면적 단위. 1묘는 666.7 평방미터) 정도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대부분은 묘지였다. 그 사이로 걷노라니 어쩐지 바깥보다 으슬으슬 추운 것 같았다. 이따금 들려오는 들고양이 울음소리가 스산함을 더했다.

    그러나 심협은 전혀 개의치 않고 사월보를 운공하여 순식간에 숲을 한 바퀴 돌았다. 안타깝게도 딱히 특이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아하니 정말 자시까지 기다려야 귀시가 나타날 모양이군.”

    심협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도 묘지를 벗어나지 않고, 아예 소나무 한 그루에 기대 앉아 조용히 기다리기 시작했다.

    반 시진 쯤 앉아 있었을까. 그는 갑자기 낯빛을 바꾸더니, 가만히 몸을 일으켜 반쯤 쪼그려 앉은 자세로 소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숲 바깥쪽을 보고 있으려니 잠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잿빛 인영(人影)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키가 꽤 컸는데, 몸에는 넓고 큰 회색 장포를 입었고, 머리에는 두모(*兜帽: 피풍 등에 달려 있는 덮개 모양 모자)를 썼으며, 온몸을 꽁꽁 싸맨 채 얼굴에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심협의 눈에는 한 줄기 놀라움이 스쳤다. 그 사람 역시 귀시면구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웬 놈이 음흉하게 숨어 있는 것이냐!”

    회색 인영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가면 아래 서슬 퍼런 눈빛으로 심협 쪽을 노려보며 위협적으로 외쳤다. 거친 사내의 목소리였다.

    심협은 깜짝 놀랐다. 이미 체취를 없애는 약을 몸에 바른 데다, 일찍부터 숨죽이고 있었고, 거리도 10여 장은 족히 떨어져 있는데도 들키고 만 것이다. 두 사람이 자리를 바꾼다면, 자신은 아마 상대방을 발견하지 못할 터였다.

    “음흉하게 숨어 있다고 할 것까지야. 그저 좀 일찍 와 있었을 뿐이오.”

    심협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태연자약하게 걸어 나오며 걸걸하게 말했다.

    ‘상대방도 귀면탈을 쓰고 있으니, 십중팔구 귀시에 가려는 것일 터. 조만간 만나게 될 테니 굳이 숨길 필요 없지.’

    “그대도 귀시에 가려는 게요?”

    회의의 사내는 심협의 귀시면구를 보고는 살짝 놀란 듯 물었다.

    “그렇소. 어쩌면 서로에게 고객이 될 수도 있는 마당에 굳이 날을 세울 필요 없지 않겠소? 하하하!”

    심협은 그렇게 말하고는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회의의 사내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고 소나무 숲 안으로 들어와 방금 전 심협처럼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저 사람도 귀시는 처음인 모양이구나.’

    심협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내는 한 바퀴 둘러보아도 특별한 수확이 없자, 심협과 10여 장 떨어진 곳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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