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제일구마세가
“오늘부터 28일 뒤, 이 가면을 쓰고 성 밖으로 나가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 사이)에 성에서 서쪽으로 50리 떨어진 청송림(靑松林)에 당도하면 자연스레 귀시에 들어갈 수 있을 게다.”
구혼마면은 손을 꼽아가며 이렇게 말했다.
“28일 뒤, 자시, 청송림…….”
심협은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듯 그의 말을 따라 웅얼거렸다.
“귀시에는 갖가지 보물이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대부분 값이 꽤 나가니, 남은 시간 동안 선옥을 최대한 모아 두거라.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도록 말이야.”
“귀시에서도 선옥을 사용할 수 있습니까?”
심협이 놀라 되물었다.
“선옥은 삼계(*三界: 불교에서 욕계, 색계, 무색계를 뜻하는 말. 천계, 지계, 인계를 뜻하기도 함)에서 통용되는 화폐다. 어딜 가든 쓸 수 있지.”
“그렇군요. 가르침 감사합니다, 선배님.”
심협은 귀시면구를 탁자에 내려놓고 다시 한번 정중히 공수했다.
“준비 잘 하거라.”
그 말을 남긴 채, 구혼마면은 눈 깜짝 할 사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심협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안색은 어두웠다가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그간 임무를 수행하면서 선옥을 좀 벌어두긴 했으나, 구혼마면 선배님을 따라 나갈 때마다 적잖이 써버렸다. 또한 낙뢰부를 그리느라 소모한 탓에, 지금 남은 것은 고작 서른 개 남짓. 백가에서 네다섯 해는 객경 노릇을 해야 모을 수 있는 양이니 평범한 벽곡기 수사(修士)에게라면 적지 않은 재물이다. 허나 귀시에서는 아마 턱없이 부족할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귀시면구를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안에 한 줄기 어렴풋한 음기가 느껴졌지만, 원리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심협은 시험 삼아 탈에 법력을 주입해 보았다.
“…….”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과연 뭔가 다른 방법이 있는 모양이구나. 아마도 귀시가 열리는 때가 가까워지면 효력을 발할 테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그는 탈을 잘 보관해두었다.
이어서 침상으로 다가간 그는 석합을 꺼내 쏟아부었다. 선옥이 몇 개나 있는지 세어보니 총 서른여섯 개였다. 그중 스무 개는 며칠 전에 얻은 것이었다.
심협은 선옥을 잘 담아놓고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선옥을 모을 방법은 계속해서 착귀방의 임무를 받는 것인데…….’
현재 그의 수련 경지는 이미 연기 후기에 들어섰고, 소뢰부와 귀소환을 쓸 수 있다. 여기에 사월보까지 적절히 사용하면 꽤나 봐줄 만한 전력이었다. 구혼마면의 도움이 없다 해도 벽곡기 귀물만 아니라면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아니면 부적을 팔까? 이제 소뢰부에는 거의 정통했고, 성공률도 꽤 높지. 녹보당 주인장도 소뢰부를 사들일 의향이 있다고 했으니, 그것도 괜찮겠어.”
심협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금 속으로 따져가며 귀시가 열리기 전까지의 계획을 세웠다.
이후, 그는 잠시 수련을 멈추고, 착귀방 임무를 수행하면서 한편으로는 부적을 그려 선옥을 모으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심협이 녹보당을 찾았다.
“심 공자님, 오랜만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주시다니. 무얼 사시렵니까?”
마 주인장은 심협을 보자마자 곧바로 친절하게 맞이했다.
“심 공자님, 차 좀 드시지요.”
가게 안에 있던 마수수가 살짝 수줍은 미소를 띠며 차를 따라주었다.
“감사합니다, 마 소저.”
심협은 마수수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준 뒤 마 주인장에게로 몸을 돌렸다.
“전에 마 주인장께서 녹보당은 부적도 산다 했지요? 보시기에 이 부적은 어떠합니까?”
그는 곧바로 소뢰부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마 주인장은 심협의 말에 잠깐 얼떨떨했으나, 오랜 세월 장사꾼 노릇을 해온 사람답게 곧장 정신을 차리고 소뢰부를 집어 들어 자세히 살폈다.
“아주 훌륭한 부적입니다. 심 공자께서 최근 아주 대단한 뇌부를 사용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요. 건업성 곳곳의 귀물을 연이어 참살했다는 그 부적이 바로 이겁니까?”
마 주인장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참 소식도 빠르오. 맞소, 바로 이 소뢰부요. 낮은 단계의 부적에 속하지요.”
심협도 숨김없이 간략하게 소개하며 말했다.
“소뢰부라, 소뢰부…….”
마 주인장은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부적을 사들이려면 그 위력을 봐야 합니다. 제가 이 부적의 위력을 시험해 보아도 될는지요? 아, 안심하십시오. 저희 가게에서 이 부적을 사든 안 사든, 써버린 것은 모두 시가대로 값을 치러드릴 겁니다.”
마 주인장의 설명에 심협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좋습니다.”
“그럼 공자께서는 저를 따라 오시지요. 수아(秀兒)야, 가게 잘 보고 있거라.”
마 주인장은 마수수에게 그리 말하고는 심협을 데리고 후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돌아온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소뢰부의 위력을 본 주인장은 거래에 응했고, 원래 소뢰부 같은 하급 부적은 모두 금이나 은 따위로 값을 치렀지만, 심협의 사정을 고려해 선옥으로 값을 쳐주기로 한 것이다. 두 사람은 후원에서 한 차례 값을 흥정하여 소뢰부 열다섯 장의 가격을 선옥 한 덩이로 정했다.
거래를 잘 마친 심협은 황지와 부적용 먹을 잔뜩 사서 가게를 떠났다.
“보시기에 가격이 적당한 것 같습니까?”
심협이 떠나기가 무섭게 마 주인장이 마수수에게 물었다.
“최근 몇 년간 귀환이 자주 발생하지 않았는가. 이 소뢰부는 귀물을 억누르니, 내 생각에는 조금만 소문을 내면 많은 사람이 찾을 것이네. 그러니 안 팔릴 걱정은 없지. 또 한 가지. 가서 원석을 한 더미 들여오도록 하게.”
이렇게 말하는 마수수의 얼굴에서 조금전까지 수줍어하던 모습은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두 눈은 거울처럼 맑게 반짝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서 준비하지요.”
마 주인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마수수는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장풍곡의 귀환 역시 심협이 평정했다 하니, 그에게는 분명 비범한 구석이 있는 모양이야. 앞으로 그와 자주 왕래하도록 해. 재물을 아끼지 말게. 최대한 그를 끌어당겨.”
마 주인장은 그녀의 말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손님 한 명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마수수는 다시금 여린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 * *
녹보당을 떠난 심협은 금세 백부 대문 앞에 도착했다.
“심협! 저자가 심협이야!”
“들었는가? 얼마 전에 심협이 응혼기 대수사와 연합하여, 장풍곡에 둥지를 튼 귀물을 없앴다는구먼.”
“그 임무로 우리 백가가 임가와 두가 두 집안을 넉넉히 뛰어넘었지. 그 놈들이 손을 잡아봐야 우리의 적수가 안 된다니까!”
“정말 통쾌하지 뭔가!”
심협이 나타나자 주위의 백가 객경(客卿)들이 수군댔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이제 경외감뿐이었다.
심협은 이 광경에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다시금 수선계(修仙界)와 속세의 다른 점을 깊이 깨달았다. 모든 도덕과 인정은 백지장처럼 얇아, 오직 강자만이 다른 이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그러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을 무시하고 착귀방을 훑던 심협의 시선이 멈췄다.
“건업성 서쪽 순향주장(醇香酒庄)의 임무를 맡겠소.”
심협은 임무를 배정하는 책상으로 다가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배정해드리지요.”
책상 뒤에 앉아 있던 집사의 태도 역시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얼굴 가득 알랑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즉시 임무 책자를 꺼내 기록했다.
심협은 등록을 마치고 사람들이 눈빛으로 배웅하는 가운데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품에서 종이와 먹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붓을 들어 소뢰부를 그리기 시작했다.
저녁 무렵, 그의 오른편에는 소뢰부가 두툼하게 쌓여 있었다. 족히 30여 장은 되어 보였다. 왼편에는 더 많은 부적이 쌓여 있었는데, 모두 실패작이었다.
“오늘 하루 서른 장 정도를 그려냈다. 선옥 두 개와 바꿀 수 있을 테지.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야.”
심협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부적들을 잘 챙긴 뒤,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밤이 되자, 그는 백부를 떠나 익숙한 길을 되짚어 성의 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큰 주장(*酒庄: 양조장)에 이르러 신분을 밝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반 시진쯤 지났을 때, 커다란 천둥소리에 이어 귀물의 처참한 비명소리가 섞여들더니, 금세 잠잠해졌다.
잠시 후, 심협은 꽤나 창백한 얼굴로 주장에서 나왔다. 그의 오른쪽 소매 절반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으로 보아, 꽤나 궁지에 몰렸던 모양새였다.
“구혼마면 선배님의 도움 없이 싸우자니 과연 적잖이 애를 먹는구나.”
그는 오른 손을 들어올렸다. 팔뚝에는 무언가에게 붙잡혔던 듯 기다랗게 세 줄기 상처가 나 있었다. 살가죽이 말려들긴 했지만, 피는 많이 흐르지 않았다.
이번 귀물의 수련 경지는 벽곡기 초기쯤 되는 듯했다. 종적이 은밀하여 쉽게 종잡을 수 없고, 움직임이 바람 같이 빨라 경지가 꽤 높아진 사월보로도 신중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다치고 말았으니, 평범한 수사(修士)였더라면 벽곡기 수사 두세 명이 연합하지 않고서야 잡을 수 없었으리라.
다행히 소뢰부를 충분히 준비한 심협은 끝내 그 귀물을 죽일 수 있었다.
왼손을 뒤집자 음기로 가득 찬 백색 구슬이 들려 있었다. 당연히 귀물이 응집시킨 음기가 담긴 물건이었다.
“어찌 됐건 임무를 완수했으니 선옥 다섯 개를 손에 넣겠구나.”
심협은 기쁜 듯 씩 웃고는 서둘러 백가로 돌아갔다.
* * *
이어진 며칠간 심협은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집에서 부적을 그렸고, 저녁이면 홀로 해결할 자신이 있는 임무를 처리했다. 두 방법을 더하니 이제 하루에 다섯 덩이 이상의 선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근 두 달 동안 세 집안을 필두로 한 연합 토벌로 건업성 인근에 남은 귀물의 수가 현저히 줄었다. 또한, 새로운 귀환이 생겼다는 소식도 보고되지 않았다. 게다다 세 집안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져, 예전 같으면 힘만 잔뜩 들고 별로 얻을 게 없어 기피하던 임무 역시 빠르게 사라져갔다.
이런 변화에 건업성 백성들은 뛸 듯이 기뻐하며 차츰 본래의 일상생활을 회복하기 시작했으나, 심협에게는 그리 좋은 일이라 할 수 없었다.
입동(立冬) 당일 날이 되자, 관부에서는 건업성 일대의 귀환이 이미 제거되어 성 안팎으로 완전히 평안을 되찾았다고 정식으로 선포했다.
백성들은 성대한 축제를 열었고, 성안 곳곳을 등롱과 오색 천으로 장식해 귀환이 사라진 것을 경축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백가, 임가, 두가 세 구마세가의 명망은 크게 높아졌고, 관에서는 그중 가장 많은 귀신과 요괴를 섬멸한 백가에 ‘건업성 제일구마세가’ 칭호를 수여했다.
* * *
백부 내원의 한 서재. 백학성과 백강풍 그리고 백가에서 덕성과 명망이 높은 숙‧백부들과 핵심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서재의 커다란 책상 위에는 금빛 편액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서는 순금으로 적힌 ‘제일구마세가(第一驅魔世家)’ 여섯 글자가 웅장한 기세를 뽐냈다.
“그동안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제일구마세가의 칭호가 명실상부한 셈이지요! 하하하!”
백학성이 탁자 위의 편액을 보며 통쾌하게 웃었다.
모두가 그 말에 들뜬 기색이었다.
‘제일구마세가’는 그저 듣기 좋은 칭호만은 아니었다. 관이 허락한 수많은 이득도 함께 얻어 백가는 세력이 크게 늘었다. 이제 임가와 두가 두 집안을 압도할 날도 머지않았다.
“가주, 이번 성과는 온 일가가 힘을 합친 덕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니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당연히 상을 내려야겠지요. 특히 객경들 포섭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백강풍이 제안했다.
“좋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께도 포상이 있을 것이오. 장풍곡 임무에 참가했던 객경들에게는 각각 선옥 열 덩이씩을 주겠소.”
“감사합니다. 가주!”
백학성이 손을 크게 휘두르며 선포하자,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귀환을 없앴다지만 모두들 경계를 늦춰서는 아니 되오. 오늘부터 우리 백가는 크게 발전함과 동시에 다시 큰 이변이 닥쳐올 때를 대비해 물자를 비축해야 합니다. 또한, 임가와 두가, 두 집안에 대한 경계를 더욱 높여야 하오.”
백학성은 좌중을 진정시킨 후,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백가 사람들도 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