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62화 (162/1,214)
  • 162화. 귀시(鬼市)

    장풍곡 상공을 뒤덮고 있던 먹구름이 사라지자 마침내 오랫동안 들지 않던 햇살이 비쳤다. 골짜기 안 음살의 기운은 차츰 흩어졌고, 온 땅에 가득한 시별과 흡혈박쥐의 시체들이 절로 불타오르기 시작해 끝내는 재가 되어 흩날렸다.

    두 시진가량이 지난 뒤에야 사람들은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고 정신을 차렸다.

    “심협, 자네가 나서 우리를 구했군! 이 백모(白某), 감격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네.”

    백학성은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아, 가주님!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객경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당황한 심협은 황급히 맞절을 했다. 객경이자 백소천의 친구로서, 방금 한 말은 진심이었다.

    “감히 여쭙건대, 여기 선배님께서는……?”

    백학성은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이자 구혼마면을 바라보고는 물었다. 어느새 건업성 최고의 제일퇴마세가를 이끄는 가주의 진중함을 되찾은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이분은 마량(馬良) 선배님입니다. 이 후배의 망년지우(*忘年之友: 나이를 초월한 벗)이라 할 수 있지요. 때마침 이번에 선배님께서 요청에 응해주시어 마물을 소멸시키는 데 도움을 주러 오셨습니다.”

    심협은 이미 구혼마면이 머릿속으로 전해온 전음을 듣고 즉시 설명했다.

    “그런 거였군. 일찍이 어느 고수께서 심 객경을 뒤에서 돕고 있다는 이야길 들은 바 있는데, 선배님이셨나 봅니다. 후배 백학성이 마 선배님을 뵈옵니다.”

    백학성이 진중한 자세로 포권을 했다.

    “마 선배님을 뵈옵니다.”

    백강풍을 비롯한 사람들도 뒤이어 예를 갖추었다.

    “백가주는 예의 차릴 것 없소. 마귀를 제거하고 도를 지키는 것이 선배인 나의 역할이었을 뿐이오.”

    구혼마면은 손사래를 치며 그렇게 말했을 뿐, 더는 말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선배님, 아까 도망친 자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백학성은 그가 말을 아끼려 하는 걸 알아챘지만, 이 질문만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의심이 옳은지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대도 짐작하고 있겠지. 그게 맞을 거요. 그놈은 바로 그대 백가의 조상이 일찍이 맞닥뜨렸던 요풍이오. 요풍이라 부르기는 하지만 실은 마물이라, 마기로 생령(生靈)을 더렵혀 마화(魔化)시키는 데 능하지. 마화한 생령은 전투력이 배로 증가하고 포악해져 실로 위험하오.”

    구혼마면은 백학성의 의심을 꿰뚫어보고는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과연 그 요마(妖魔)였군요. 허나 가조(家祖)께서 이미 그것을 소멸시켜 버리셨다 들었는데 어찌…….”

    백학성은 의아한 듯 말끝을 흐렸다.

    “요풍은 한둘이 아니오. 소멸시키기가 그리 쉽지 않지.”

    구혼마면의 답에 백학성을 비롯한 사람들은 낯빛이 굳었다.

    “안심하시오. 건업성 근처에는 그자 하나가 전부였을 테니. 게다가 이번에 꽤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니 한동안은 말썽을 일으키지 않을 게요.”

    사람들을 기분을 북돋은 구혼마면은 심협의 상태를 물은 뒤 먼저 자리를 떠났다.

    백학성과 사람들은 백수도장의 시신을 잘 수습하고는 장풍곡 임무를 완수했다는 증표로 백골요괴와 홍모강시의 잔해를 챙겨 장풍곡 입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심협, 그 마 선배님이라는 분의 수련 경지가 아주 깊던데, 어느 문파에서 오셨는지 아는가?”

    백학성이 심협 곁에서 걸으며 물었다.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사실 저와 마 선배님은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분의 속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허나 선배님은 분명 신의가 있고 올바른 분입니다. 그 점만큼은 확실합니다.”

    심협은 진실과 거짓을 적당히 섞어 답했다.

    “이보게, 심협. 한데 내 어째 그 마 선배란 분의 차림새가 좀 낯이 익은 것 같네만……. 백수도장에게서 들은 것도 같고…….”

    백강풍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심협은 잠깐 생각해보고는 웃었다.

    “아마 전에 난수각 물귀신 사건 때 백수도장께서도 마 선배님을 뵌 적이 있을 겁니다.”

    “맞네! 바로 그 일이었어!”

    백강풍이 그제야 속이 시원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을 보며, 심협은 그때의 일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물론 구혼마면의 진짜 신분에 대해서는 철저히 숨겼다.

    “자네와 마 선배님이 그리 인연을 맺게 된 것이구먼. 인연이란 참으로 신기하지. 허허허!”

    “마 선배님의 요청이 있었던 터라 그분과 관련된 일은 가주께 알릴 수 없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심협의 말에 백학성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 백가가 이런 선배님과 연을 맺게 해주었으니 내 자네에게 감사해야 마땅하지.”

    심협은 그 말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구혼마면과 친교를 맺고 싶다는 말이었다.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니 심협은 그저 웃어넘겼다.

    장풍곡 밖으로 나오자, 다른 백가 수사(修士)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뒤이어 사람들은 마차에 올라 건업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심협이 마차에 오르기 전, 앞서 장풍곡에서 함께 싸운 수사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모두 진심에서 우러난 감사를 전했는데, 다소 과장된 찬양도 있었다.

    심협은 모두의 말을 정중하게 듣고 예를 갖추어 화답했다.

    인사치레가 끝나갈 즈음에서야 붉은 옷을 입은 사우흔이 느릿느릿 다가와 서로 알게 된 후 처음으로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지금까지 우리 사이에 불쾌한 일이 좀 있었죠? 그건 내 심성이 짓궂었던 탓이에요. 이 자리를 빌어 심 도우께 사과할게요. 내 목숨을 구해준 은혜는 이 사우흔의 마음에 깊이 간직했다가 언제고 기회가 되면 백배로 보답하겠어요.”

    사우흔의 정중한 목소리에 심협도 예를 갖추고는 웃으며 답했다.

    “모두 그저 작은 일에 불과하니, 마음에 담아두실 필요 없습니다.”

    “심 도우께는 작은 일이나, 내게는 목숨을 구한 큰일이지요.”

    심협은 사우흔이 이토록 정중하게 나오자 어색함에 아래턱을 매만지다가 장난스레 웃었다.

    “목숨을 구한 은혜라…… 한데 도우의 목숨이 백 개가 아니고서야 어찌 백배로 보답하시겠소? 정말 마음에 걸린다면 몸으로 갚는 것도 방법일 테지요.”

    사우흔은 심협의 말에 일순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으나, 심협의 미소를 보고는 농담임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녀는 매우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신다면 그것도 좋죠.”

    사우흔이 이리 나오니 심협은 또다시 당황해 다급히 해명했다.

    “사, 사 도우! 오해 마십시오. 제 농이 지나쳤으니 사과드리오.”

    사우흔은 그 당황한 모습을 보고는 전에 없이 풋 하고 웃더니 몸을 돌려 떠나갔다.

    심협은 한동안 넋을 놓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히려 내가 놀림을 당했구나. 어느 모로든 무시할 수 없는 여인이야.’

    그는 자조하듯 웃으며 마차에 올랐다.

    * * *

    백부로 돌아온 백학성은 다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한 심협을 친히 처소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주.”

    심협은 좀 민망한 듯 멋쩍게 웃었다.

    “그 무슨 말인가. 오늘 심 도우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 백가가 임무를 완수하기는커녕 장풍곡에 원혼만 몇이 더 늘어났을 걸세. 하하하!”

    백학성은 손을 흔들며 정중한 말투로 말했다.

    심협은 그저 말이 없었다.

    백학성이 몸을 돌려 어딘가로 손짓을 하자 집사 한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천으로 감싼 꾸러미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심협을 향해 예를 갖춘 뒤 물러갔다.

    “선옥 스무 개와 우리 백가만의 비법으로 만든 외상용 고약, 흑옥고(黑玉膏)일세. 부족하나마 감사의 표시이니, 심 도우께서는 받으시게나.”

    백학성이 주머니를 건네자 심협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별말씀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때마침 선옥이 궁했던 그는 사양치 않고 받았다.

    백학성은 잠시 한담을 나눈 후에야 작별을 고하고 떠나갔다.

    홀로 남은 심협은 꾸러미를 열고 그 안에 담긴 하얗고 작은 도자기 병과 선옥 더미를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도자기 병을 열자 향냄새 섞인 청량한 약향(藥香)이 확 밀려왔다. 병 주둥이를 들여다보니 검은색 고약이 담겨 있었다.

    약리에 훤한 심협은 향기만으로도 이 약이 매우 진귀한 것임을 알아차리고는 곧바로 조심스레 상처에 펴 발랐다. 그러자 욱신욱신했던 아픔이 금세 줄어들고 청량한 기운이 배어났다.

    “한결 좋군그래.”

    심협은 흡족해하며 고약을 조금 더 펴 바른 뒤 깨끗한 천으로 싸맸다.

    치료를 마친 그는 침상에 눕자마자 꿈나라로 들어갔다. 온종일 악전고투를 치르느라 지쳤으니 하루쯤 수련을 건너뛰어도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으리라.

    * * *

    이튿날, 백강풍과 사우흔 등이 찾아와 안부를 묻고 감사의 선물을 두고 갔지만, 어째서인지 백소운은 그림자도 비치질 않았다. 심협은 사람들에게 수소문하고서야 그는 백소운이 이번 임무에 참여하지 못할 정도로 수련이 부족한 스스로를 반성하며 폐관수련에 들었음을 알게 됐다. 마치 친동생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심협은 내심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이 지나자 심협의 다리 부상은 거의 완치돼 움직이는 데 무리가 없었다. 백학성이 준 약이 영험했던 것인지 물에 들어가 수련하는 것도 가능했다.

    문득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일전에 몇 차례나 심협에게 시비를 걸었던 객경(客卿)인 초려가 적잖은 선물을 가지고 찾아온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난 언행에 대해 깊이 사과했다.

    사실 심협은 그전에도 초려가 말로만 자신을 건드렸을 뿐, 실제로 해를 끼친 적은 없었기에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귀찮아진 심협은 선물만 받고는 다소 민망할 정도로 단호하게 축객령(逐客令)을 내렸는데, 그럼에도 초려는 화를 내기는커녕 앞으로 심협의 말을 따르겠다고 재삼 맹세한 뒤에야 물러갔다.

    저녁 무렵, 심협은 수련을 마치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는 오늘의 수련 성과를 되새겨보았다.

    “보아하니, 이제 부상은 거의 나은 듯하구나.”

    뒤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심협은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그러자 언제 왔는지 구혼마면이 창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여전히 백의서생 차림이었다.

    “선배님은 늘 이렇게 뒤에서 갑자기 말을 거시는군요. 그러지 좀 마십시오. 이 후배는 담이 작아 이러다 깜짝 놀라 죽겠습니다.”

    심협은 반가우면서도 퉁명스레 투덜거렸다.

    “죽으면 죽는 거지, 두려울 게 무어냐. 내 맹파(*孟婆: 죽은 자가 전생의 일을 잊도록 하기 위해 약탕을 마시게 하는 신)를 아주 잘 아니, 그에게 특별히 기별하여 널 다음 생에 아주 좋은 집안에 환생시켜주겠다.”

    구혼마면은 웃으며 농을 건네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선배님,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심협은 약간 의아한 듯 구혼마면을 쓱 바라보고는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주마. 아주 대박이 났다. 어제 장풍곡 일을 저승에 알렸더니, 저승에서 몹시도 중히 여겨 상황을 보고하라고 나를 불러들이더구나. 보아하니 큰 공로인 모양이야. 어쩌면 지위도 좀 오르게 될지도 모르지.”

    “이거 후배가 제대로 축하를 드려야겠군요, 선배님. 하하하!”

    심협은 그래도 ‘비교적’ 친절한 편인 이 음신에게 좋은 일이 생기자 진심으로 기뻐 축하 인사를 건넸다.

    “내 당분간 저승에 다녀올 터인데, 오늘 이리 너를 찾아온 것은 귀시의 일 때문이다.”

    구혼마면은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이에 심협의 눈이 미미하게 빛났고, 얼굴에도 약간의 설렘이 드러났다.

    ‘요 며칠간 줄곧 기다리던 소식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건업성 부근에서 귀시가 열린다. 대략 한 달쯤 뒤일 게다.”

    “혹시 선배님께서 저를 데리고 가서 견문을 좀 넓혀주시렵니까?”

    심협은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청했으나, 구혼마면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장풍곡에서 한몫 거들었으니, 내 너를 데려가 눈을 한 번 틔워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허나 내 이번에 돌아가면 언제 다시 돌아오게 될지 모른다. 대신 이 귀시면구(鬼市面具)를 빌려주마.”

    구혼마면은 검은색 귀면탈을 심협에게 건넸다.

    “저 혼자 가라고요?”

    심협은 가면을 건네받으며 멍하니 되물었다. 아직 수련 경지가 낮은 데다가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인 자신이 귀신 무리가 모인 곳에 홀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안심해라. 이 귀시면구는 산 사람의 기운을 가려준다. 게다가 귀시는 저승에서 세운 교역장소라 순라를 도는 귀차(*鬼差: 귀신의 차사)가 있으니 아무도 그 안에서 감히 말썽을 일으키지 못할 게다. 그 안에서 네가 소란을 피우지만 않는다면 안전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을 게야.”

    심협은 구혼마면의 말을 듣고서야 마음을 좀 놓고는 서둘러 귀시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 듣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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