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61화 (161/1,214)
  • 161화. 좌절

    콰쾅!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항마저가 구혼마면의 옷자락을 내리치는 순간, 갑자기 한 송이 거대한 피안화가 그의 온몸에 피어난 것처럼, 붉은 빛이 피어났고, 꽃잎의 붉은 빛은 항마저의 충격에 저항하느라 끊임없이 떨어져 흩어졌다. 그러나 끝내는 항마저의 공격을 막아냈다.

    “쿨럭!”

    구혼마면은 그 거대한 기운에 부딪쳐 참지 못하고 붉은 피를 한 모금 뿜어냈고, 들고 있던 구혼필은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붓끝에 붉은 빛이 일렁이자 앞에 그려진 붉은 그물도 마침내 줄어들어 수라괴뢰귀를 가두었고, 동시에 핏빛 쇠사슬 역시 뒤따라 감겨들어 괴뢰귀의 몸을 묶었다.

    수라괴뢰귀가 완전히 결박당하자, 구혼마면을 공격하던 항마저도 통제력을 잃고 땅에 떨어졌다.

    “드디어…… 잡았다…….”

    심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구혼마면 역시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웃었다.

    “이번에 마물 하나를 사로잡았으니, 내 저승에 돌아가면 아무래도 잘난 척 한번 제대로 해야겠다. 그 늙다리들이 다시는 내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지 못하게 말이야. 하하하!”

    심협은 치기 어린 말에 일순 할 말을 잃었다.

    구혼마면은 곧장 구혼필을 쥐고는 허공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무슨 부적의 글자 따위를 적는 것이 아니라, 법진(法陳) 같은 것을 그리는 듯했다. 거대하고 둥근 모양의 빛으로 된 그림이었다.

    그러나 그림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또다시 이변이 생겼다!

    수라괴뢰귀가 갑자기 기묘한 웃음을 지었고, 그 순간 불이 붙은 듯 온몸에서 짙은 연기가 뭉게뭉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는 검은 연기 사슬로 변하여 박귀삭연(*縛鬼索鏈: 귀신을 결박하는 쇠사슬)을 타고 올라왔다.

    법진을 절반 정도 그려냈던 구혼마면이 깜짝 놀라 다시 손을 거두려 했으나, 한 발 늦었다. 네다섯 가닥의 검은 연기사슬에 몸이 감기는가 싶더니, 구혼마면은 온몸이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어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심협은 이 광경을 보고 크게 놀랐다. 놀랍게도 연기 사슬에 감긴 부분에서 검고 가는 실이 가닥가닥 자라나 그물을 짜는 것처럼 구혼마면의 온몸을 휘감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곁눈질로 동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검은 고치를 흘끗 보고는 문득 깨달았다. 이 수라괴뢰귀는 구혼마면을 저렇게 봉인하여 마물의 몸뚱이가 되게 하려는 것이 틀림없다.

    ‘큰일이다!’

    심협은 경악하여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낙뢰부를 한 장 꺼내 쥐었다.

    그러나 미처 낙뢰부의 위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수라괴뢰귀가 거칠게 고개를 돌리더니 그를 노려보았다. 그때 수라괴뢰귀의 시뻘건 두 눈은 온통 검게 변해 있었고, 금 투구 위에 박힌 붉은 정석이 갑자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심협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망설임 없이 옆으로 몸을 날렸다.

    쿵!

    아니나 다를까, 정석에서 번득이던 붉은 빛이 쏘아져 나와 방금 전까지 심협이 서 있었던 자리에 꽂히며 폭발음이 울렸다. 이 빛은 폭발하면서 한 줄기 거대한 충격파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한 발 앞서 공격을 피했음에도 심협의 몸이 휩쓸려 허공으로 튀어 오를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었다.

    “죽어라!”

    수라괴뢰귀가 폭발하는 듯한 고함을 내지르자, 붉은 정석에서 또다시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반드시 심협을 일격에 죽여 없애겠다는 듯, 더욱 강한 기세의 시뻘건 빛이 다시금 그를 향해 곧장 날아갔다.

    허공에 떠 있는 심협으로서는 당연히 공격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바로 그때, 그의 그림자가 기이하게 앞으로 뛰어오르더니 푸른 빛에 휩싸여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가뿐하게 붉은 빛을 피해냈다. 이어서 수라괴뢰귀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비행부의 효력을 이용해 그 뒤로 날아갔다. 심지어 발을 땅에 딛지도 않은 가볍고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심협은 어슴푸레한 푸른빛을 띤 낙뢰부 두 장을 손에 쥔 채 정신을 집중했다. 몸 안의 법력을 미친 듯이 주입해 한 손으로는 맹렬하게 괴뢰귀를 내려쳤고, 동시에 부적의 효력을 발휘시켰다.

    쿠르릉! 콰쾅!

    두 번의 거대한 우렛소리와 동시에 굵고 하얀 두 줄기 번갯불이 서로 엇갈리며 수라괴뢰귀의 몸에 꽂혔다.

    폭발의 위력에 심협은 저 멀리 튕겨져 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한꺼번에 두 장의 낙뢰부를 사용하느라 그의 단전에서는 법력이 거의 다 소모되어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잠시 동안 일어설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한편, 수라괴뢰귀에게 내리 꽂힌 번갯불은 거대한 굉음 속에서 서로 얽히고설켜 구(球) 형태의 번개를 형성했다.

    콰르릉!

    이번에는 구 형태의 번개가 폭발했다. 그 위력은 방금 전의 폭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위에서 줄기줄기 번개가 뿜어져 나와 일순간에 수라괴뢰귀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또다시 드러난 요풍의 본체에도 똑같이 폭발의 여파가 영향을 미쳐, 온몸에서 끊임없이 가느다란 번갯불이 번쩍였다. 이에 따라 연이어 폭발음이 울렸고, 요풍 본체의 전신에서는 검붉은 마기가 끊임없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편, 이 무렵 구혼마면의 몸을 휘감았던 검은 연기 사슬은 붕괴된 상태였다. 그러나 구혼마면은 곧장 튀어나올 수는 없었다. 음신의 몸인지라 그 또한 천둥번개를 피하기 급급한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때, 번개 줄기들 한가운데에 놓여 있던 요풍이 돌연 사나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더니 온몸에서 시커먼 빛을 흩뿌리며 한 줄기 돌풍으로 변해 맹렬히 회전하면서 동굴 통로를 향해 돌진했다.

    “어딜 도망치려 드느냐!”

    구혼마면이 낮게 외치며 즉시 쫓아갔다.

    기력을 다소 회복하고 잠시 한숨 돌리던 심협도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뒤따라 가려고 했다.

    그때, 그의 눈가에 수라괴뢰귀 시신 근처에 떨어져 있던 금강항마저 두 자루가 들어왔다. 그는 재빨리 다가가 그것들을 주워 들었다.

    하지만 잠깐 살펴보니, 수라괴뢰귀가 내던졌던 날카로운 송곳 모양의 항마저는 손상 없이 온전한 반면, 양 끝이 등롱처럼 둥근 나머지 하나는 완전히 부서진 상태였다.

    심협은 송곳 같은 항마저를 집어 들고 비틀거리며 통로 밖으로 향했다.

    * * *

    동굴 밖. 백가 사람들은 가까스로 모든 백골요괴와 시별, 흡혈박쥐 떼를 죽여 없앴다.

    그러나 그들의 피해 역시 적지 않았다. 백수도장 외에도 괴뢰술에 능했던 조화문의 객경(客卿) 역시 홍모강시에게 살해당했고, 풍릉을 포함한 몇몇 연기기 객경들은 땅에 거꾸러져 있었다. 이들은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였다.

    벽곡기 수사(修士)인 백학성과 백강풍, 사우흔과 다섯째 할머니만은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상태로도 사력을 다해 홍모강시와 백골요괴를 포위한 채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백학성은 어떤 강신술을 쓴 것인지, 연극 분장을 한 것처럼 검은 문양이 얼굴을 빼곡하게 뒤덮은 상태였다. 그는 칠흑 같은 장창을 움켜쥔 채 홍모강시와 근접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다섯째 할머니는 한쪽에서 백학성과 힘을 합쳐 끊임없이 비침(飛針)과 비도(飛刀)로 강시를 공격하며 교란시켰다.

    다른 쪽에서는 사우흔이 양손에 검을 든 백골요괴와 격전을 벌이는 중이었고, 한쪽에서 백강풍이 법기와 부적으로 그녀를 돕고 있었다. 양쪽 모두 기력을 적잖게 소진하여 승패는 누가 더 오래 버티는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 동굴에서 갑자기 커다란 바람 소리가 나더니 검은 요풍 한 줄기가 소용돌이치며 튀어나와 백학성을 향해 곧장 돌진했다.

    백학성은 이를 보고 깜짝 놀라 재빨리 요풍을 향해 장창을 내찔렀으나, 악전고투를 벌이느라 법력이 이미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얼굴의 검은 문양도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고, 창에서 터져 나오던 서슬 퍼런 빛은 미처 피어나기도 전에 꺼져버리고 말았다.

    쾅!

    백학성은 요풍과 충돌해 땅에 처박혔다.

    뒤이어 요풍이 전장을 휩쓸었다. 그가 닿는 곳마다 모래바람이 일었고, 백강풍과 다른 사람들 역시 연이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끝이로구나.”

    가까스로 버티던 사람들은 의욕을 상실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요풍이 그들을 쓰러트린 다음 재차 공격하지 않고, 어째서인지 높은 상공으로 솟구쳐 골짜기 위의 먹구름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곧이어 산벽 동굴 안에서 또 다른 인영이 맹렬하게 뛰쳐나왔다. 그의 발아래로는 검은 안개가 생겨나, 사람들이 정체를 알아보기도 전에 요풍을 뒤쫓아 먹구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한바탕 격렬한 전투 소리가 들려왔다.

    그 틈을 타 홍모강시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펄쩍 뛰어올라 백학성 곁으로 떨어지며 두 팔을 쭉 내뻗어 그의 가슴팍을 곧장 찔러갔다.

    다른 한쪽에서는 백골요괴가 골검으로 사우흔의 가슴을 겨냥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어 좌절해가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10여 장의 부적이 홍모강시와 백골요괴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콰르릉!

    이어서 요란한 천둥소리가 골짜기 전체를 울렸다. 비록 부적들 중 절반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지만, 일고여덟 줄기의 번개가 뒤엉키며 홍모강시와 백골요괴의 머리에 꽂혔다. 이로 인해 둘의 몸이 굳으면서 움직임도 우뚝 멈췄다.

    백학성은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모처럼 얻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는 장창을 힘껏 쥐더니 위로 찔렀다. 장창은 단숨에 홍모강시의 머리를 꿰뚫었다.

    “깨깩! 끼이잇!”

    홍모강시는 잇달아 기괴한 비명을 질렀고, 산산조각 난 얼굴에서는 한 가닥 검은 연기가 흘러나와 사방으로 흩날렸다.

    거의 같은 시각, 사우흔 역시 붉게 번뜩이는 방인(*方印: 네모진 도장)을 백골요괴 미간 한가운데에 내리 찍었다. 방인에서는 진홍색 불빛이 뿜어졌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백골요괴의 머리가 터져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해골 안에 담겨 있던 푸른 불꽃과 한 줄기 마기도 함께 흩어졌고, 몸뚱어리 역시 한 무더기로 나뉘어 사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곳곳에 부상이 가득한 사우흔이 애써 몸을 일으켜 앉자, 한 손으로 석벽을 짚은 채 동굴 입구에 백지장 같은 얼굴로 서 있는 심협이 보였다.

    “때를 맞춰서 다행이야…….”

    심협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뒤이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원래도 법력을 거의 다 소진한 상태였는데, 한꺼번에 10여 장의 소뢰부를 발동시켰으니, 지금은 법력이 완전히 고갈되어버렸다. 두 눈이 다 캄캄해졌고, 혼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하나하나가 선옥과 마찬가지인 부적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다.

    ‘얼마나 고생해서 모은 건데…….’

    한편, 사우흔의 눈동자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설마 저자가 날 구했단 말인가? 백가의 하급 객경이 어떻게……? 정말 믿을 수가 없군.’

    그때,  깜짝 놀란 백학성과 백강풍이 외쳤다.

    “심협, 자네인가? 자네가 어찌 여기 있는 겐가?”

    심협이 막 답하려는데, 저 높은 하늘에서 폭발음이 들리더니 그림자 하나가 추락했다. 어느새 다시 백면서생의 모습으로 변한 구혼마면이었다.

    그가 떨어져 내린 후, 하늘에서는 갑자기 검은 먹구름이 빠른 속도로 줄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됐고, 그 안에서 요풍의 형상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표정을 분명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지닌 살의는 뚜렷이 느껴졌다.

    “나를 방해하다니, 기억해두지. 두고 보자!”

    그는 이 말만을 남기고는 몸을 돌려 멀리 도망쳤다.

    이번에는 구혼마면도 뒤쫓지 않고 산벽의 동굴 입구로 되돌아와 심협을 데리고 내려왔다.

    백가 사람들은 말없이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각자 상처를 돌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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