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요풍(妖風)의 방해
난데없이 나타난 홍모강시에 놀란 사람들이 채 전열을 가다듬기도 전에 또다시 이변이 발생했다. 백수도장 발밑이 갑자기 갈라지더니 하얀 골검(骨劍)이 지면을 뚫고 팽이처럼 빠르게 회전하며 곧장 솟아오른 것이다.
당황한 백수도장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아래턱에서부터 정수리까지 골검에 꿰뚫려 즉사하고 말았다.
백가 사람들은 경악하여 재빨리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그들이 서 있던 곳의 지면이 무너져 내리며 피갑(皮甲)을 입은 괴상한 해골이 껑충 튀어나와 피로 물든 골검을 움켜쥐었다.
백곡이 검을 한 번 휘두르자 한 줄기 핏자국이 땅에 흩뿌려졌다. 그러자 그 앞의 갈라진 땅속에서 마른 뼈들이 기어 나와 백가 사람들을 향해 돌진했다.
처참하게 죽어간 백수도장을 힐끗 본 풍릉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하겠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곧바로 정신을 집중하고 갑자기 나타난 해골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때, 산벽의 동굴 입구에서 엄청나게 많은 시별과 흡혈박쥐들이 또다시 천지를 뒤덮으며 쏟아져 나와 백가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기세는 이전보다 더욱 살벌했다.
백학성은 곧장 몸을 날려 허공에 떠오르더니 칼로 장심(*掌心, 손바닥의 가운데)을 그었다. 그리고는 피를 구양경에 바른 후, 거울 면을 아래쪽으로 돌렸다.
구양경에서 혈광(血光)이 번득이자 모든 피가 그 안으로 사라졌고, 뒷면의 어충조(魚虫鳥) 문양이 거듭 빛나더니, 온몸에서 붉은 빛을 뿜어내며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선혈로 유인하여 양화로 음기를 불사르리라(*鲜血为引,阳火焚阴). 공격!”
백학성의 고함이 터져 나오자 허공의 구양경이 순간 팽이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격렬하게 울리더니 진홍색 불기둥이 번쩍이며 날아가 마치 공작이 꼬리를 펼친 듯 시별과 흡혈박쥐, 해골요괴들을 불살랐다.
삽시간에 온 골짜기에 폭발음이 끊임없이 울렸고, 불빛이 사방으로 튀면서 대량의 시별과 백골요괴들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허공의 흡혈박쥐 떼 역시 감히 가까이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바로 그때, 잠시 물러나 있던 홍강이 두 손을 앞으로 뻗은 채 두 발을 맹렬하게 굴러 백학성을 향해 곧장 내달렸다. 온 하늘에 가득 찬 붉은 빛이 비늘이 가득 돋친 그의 몸을 때렸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백학성은 홍강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을 보면서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소매에서 다시금 손바닥만 한 황동인새(黃銅印璽)를 꺼내 내리찍었다.
황동인새는 백학성의 손을 떠나는 순간 금빛을 발하며 눈 깜짝할 사이 백배로 불어났다. 그 위에는 사나운 범의 그림자가 드리운 채 홍모강시에게 묵직하게 부딪쳤고, 천균(*千鈞: 1균은 30근)의 무게를 가진 듯 무겁게 짓눌렀다.
홍모강시는 두 손으로 인새를 떠받쳤지만,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에 갑자기 거센 핏빛이 돌더니 두 줄기 붉은 빛줄기가 훅 하고 날아가 허공의 구양경을 때렸다.
쿵!
둔탁한 소리가 울렸고, 부식되는 것처럼 구양경에서 한 줄기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어서 구양경이 크게 흔들리더니 빛을 잃으며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백학성은 인상을 찌푸리고 재빨리 구양경을 거둬들였다. 한 차례 살펴보니, 구양경에는 울퉁불퉁하게 부식된 흔적이 생겨 겉이 망가진 데다가 영성에도 크게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 백학성은 몹시도 아까워 혀를 찼으나, 지금은 아쉬워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구양경을 쥔 채 곧장 홍모강시가 있던 곳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잠깐 정신을 딴 데 판 사이, 황동인새 아래쪽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백학성이 막 인새를 거두어들이려는데, 등 뒤쪽에서 거센 바람소리가 들리더니 손에 쌍검을 든 백골요괴와 양팔을 내뻗은 홍모강시가 각각 좌우에서 땅을 뚫고 기습해왔다.
거리가 가까운 데다가 워낙 갑작스럽고 빠른 기습이라 백학성은 둘을 동시에 상대하기는 힘들었다. 손에 든 구양경으로 왼편의 홍모강시를 공격하느라 등 뒤에 빈틈이 생겼고, 백골요괴가 그 틈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구양경은 다시 한번 빛나며 하얀 빛줄기를 내뿜었고, 동시에 홍모강시의 두 눈에서도 두 줄기 핏빛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퍼펑!
두 종류의 빛줄기는 충돌하자마자 즉시 불꽃을 튀기며 폭발했다.
그 충격파에 홍강은 뒤로 밀려났고, 백학성도 뒤로 물러났다.
그 틈에 백곡이 백학성의 뒤로 달려들며 두 자루의 골검을 교차해 찔러갔다.
‘안 돼!’
심협은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계속 손 놓고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두 손가락 사이에 낙뢰부를 끼운 채 백학성을 구하려 했다.
하지만 구혼마면이 그의 어깨를 누르며 막아섰다. 따지고 들려는 심협에게 구혼마면은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눈짓을 해 보였다.
그런데 백골요괴가 백학성을 찌르려는 순간, 발밑의 땅이 갈라지며 틈이 생기더니 돌연 누르스름한 커다란 손이 쑥 올라와 백골요괴의 발목을 붙잡아 아래로 끌어당겼다. 뒤이어 땅속에서 키가 1장이 넘는 누르스름한 형체가 기어 나와, 마치 작은 새를 잡는 것처럼 백골요괴를 들어 땅바닥에 거세게 내동댕이쳤다.
심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누르스름한 형체를 자세히 살펴본 다음에야 그 ‘사람’이 온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 이목구비는 아주 흐릿하여 꼭 진흙으로 빚어놓은 것만 같았다.
“저건 무슨 술법입니까?”
심협이 안도하며 묻자, 구혼마면은 눈길을 돌려 백가의 어느 객경에게 시선을 떨궜다.
“흙을 모아 사람의 형상으로 만들어 생기를 불어 넣은 것이다. 조화문(造化門)의 수법으로, 괴뢰술(傀儡術)의 일종이지.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야.”
그 말에 심협 역시 눈을 빛냈다.
조화문의 명성은 그도 일찍이 방촌산의 고서적에서 읽은바 있다. 그 문파 사람들은 토(土) 계열 술법에 정통하여 풀과 나무로 근육과 뼈대를 만들고 흙으로 피와 살을 붙여 갖가지 꼭두각시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제 우리도 움직이자.”
구혼마면이 갑자기 심협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저들은 저대로 괜찮겠습니까?”
심협은 여전히 불안한 듯 전장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걱정할 것 없다. 저기 검을 든 해골바가지와 강시가 벽곡기 정점이라 성가실 뿐이지 다른 것들은 걱정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비록 백가에서는 벽곡기 정점에 오른 수사가 백학성 한 사람뿐이지만, 나머지 사람들도 벽곡기에 이르렀으니 충분히 맞설 수 있을 것이야. 덕분에 우리가 중한 일을 처리하기 편하게 됐지.”
구혼마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한편, 위기에서 벗어난 백학성은 다시 홍모강시와 한데 뒤엉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사이 백가 사람들이 차츰 다시 전세를 안정시키는 것을 본 후에야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구혼마면은 한 손에 둔지부를 쥐고 다른 손으로 심협의 어깨를 붙잡으며 가볍게 외쳤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팟 하고 땅속으로 들어갔고, 둔지술로 사람들을 피해 곧장 동굴로 향했다.
땅속을 헤치고 가는 내내 두 사람은 아무런 장애나 방해도 없이 금세 동굴 통로 끄트머리에 도착했다.
동굴 안쪽에는 온통 새파랗게 윤기가 도는 무언가와 검은 못이 하나 있는 것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그 위에는 어떤 허영을 감싸고 있는 검은 안개덩어리가 떠 있었는데, 바로 진하수수였다.
“저게 뭡니까?”
심협은 둥근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검은 고치를 곁눈질로 흘끗 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심협의 말에 시선을 위로 던진 구혼마면의 낯빛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는 더듬더듬 동굴 내부를 둘러보고, 또 아래쪽의 검은 못과 그 위에서 조금씩 꿈틀대는 고치를 한번 쳐다보았다.
“저건 심마견(沁魔繭)이라는 것이다. 안에 강한 요괴를 잉태하고 있을까 걱정이구나. 저것이 세상 밖에 나오도록 내버려 둬선 안 된다. 저건 내게 맡기고, 너는 저 수살(水煞)을 막아라.”
구혼마면은 고치의 내력을 알아본 듯 말했다.
“제가 얼마 못 버틸까 걱정되니 선배님께서는 최대한 서둘러주십시오.”
심협은 검은 못 위에 떠 있는 검은 안개를 걱정스러운 듯 보며 말했다.
“저놈이 만약 한창 때라면 당연히 너는 적수가 되지 못하겠지만, 지금은 중상을 입어 겨우 한 가닥 혼백만 남은 상태다. 소뢰부 몇 장이면 저놈을 없앨 수 있을 게야.”
구혼마면은 그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온몸에 붉은 빛을 자욱하게 일으키더니, 귀신같이 동굴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허공을 밟으며 한 걸음씩 위로 올라갔고, 손에는 언제 꺼냈는지 이미 철로 만들어진 구혼필을 쥔 채 검은 고치를 향해 곧바로 달려들었다.
연못 위에 떠 있던 수살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검은 안개를 내뿜으며 빠른 속도로 몸집을 불렸다. 그리고는 다시 5척 정도 높이의 칠흑같이 검은 물짐승 그림자가 되어 심협을 향해 돌진해왔다.
이미 대비하고 있던 심협은 곧바로 사월보를 운공해 발밑에 빛 그림자를 반짝이며 가볍게 피해냈다. 이어서 손가락 사이에 끼워둔 소뢰부를 발동하려 했다.
그러나 물짐승 그림자 뒤에서 칠흑처럼 검고 긴 꼬리가 순식간에 괴이한 각도로 덮쳐와 그의 손목을 세차게 때렸다.
“윽!”
심협은 팔을 내저으며 피하려 했지만, 손목 부위가 약간 쓸렸다. 화상을 입은 듯 후끈한 통증에 하마터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부적까지 떨어뜨릴 뻔했던 그는 재빨리 발끝으로 땅을 찍고 다시 물러났다.
그가 꼬리에 맞은 손목이 부식된 흔적처럼 핏빛으로 물든 것을 보고 놀라고 있던 때였다.
쾅!
격렬한 굉음이 울렸다.
심협은 정신을 분산시킬 수 없어 곁눈질로 흘끗 보았다. 그러자 뜻밖에도 멀지 않은 곳의 지면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 있었고, 얼굴에 먼지를 온통 뒤집어 쓴 구혼마면이 그 안에서 기어 나왔다.
“요풍(妖風), 과연 네놈이 훼방을 놓는구나!”
구혼마면은 퉤 하고 침을 뱉더니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그 순간, 심협은 가슴이 철렁하여 급히 물러나며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서 느닷없이 낯선 그림자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온몸은 검은색 넓은 두봉(*斗篷: 소매가 없는 외투, 피풍)에 감싸여 있었고, 머리에는 대나무로 엮은 커다란 삿갓을 쓰고 있어 온 몸이 빈틈없이 가려진 탓에 얼굴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밖으로 드러난 두 손은 푸르뎅뎅한 빛이 돌 정도로 하얀 것이 물귀신과 견줄 만했다. 열 손가락 역시 기이하게 가늘고 길어 귀신의 손 같았다.
구혼마면의 꾸짖음에 요풍은 대꾸할 생각조차 없는 듯 그저 두 손을 몸 앞에서 괴이하게 결인하더니, 검은 연못을 향해 내리쳤다.
끈적한 검은 액체가 끓어오르듯 맹렬하게 솟아올라 연못 밖으로 쏟아져 나오더니,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수살(水煞)의 발치로 흘러가 곧 물짐승의 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이어서 연못의 검은 액체 전부가 약간 흐릿했던 수살의 몸에 빠르게 엉겨 붙어 눈 깜짝할 새에 새로운 육신을 만들어냈다. 수살이 앞발을 들어 올리며 큰소리로 울부짖자, 기운이 갑자기 몇 배로 불어났다.
허공에 뜬 채 이 광경을 지켜보던 요풍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곧이어 그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겹겹이 자욱하게 피어오르더니 몸 전체가 실체에서 허상으로 바뀌어 천장에 매달려 있는 고치 안으로 빠르게 날아 들어갔다.
“안 돼!”
구혼마면은 낮게 으르렁거리며 구혼필을 힘껏 내던졌다.
그의 손을 떠난 구혼필은 부적 문양을 번뜩이며 새빨갛게 변해 불꽃 같은 빛을 띤 채 고치 한가운데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