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58화 (158/1,214)

158화. 암류(暗流)

백학성이 손목을 비틀자 구양경의 부적 문양이 번득였다. 그러자 거울 표면에 반사되던 빛이 삽시간에 붉은색으로 변하더니 더욱더 뜨거워져, 무리 지어 달려드는 흡혈박쥐 떼를 비추었다.

붉은 빛줄기가 쓸고 지나가자 박쥐들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고, 온몸의 털가죽에 생겨난, 사나운 불길에 덴 듯한 상처에서는 연기가 풀풀 피어오르며 누린내를 풍겼다.

동굴 바깥으로 뛰쳐나오던 박쥐 떼는 구양경의 빛에 가로막히자 즉시 무리를 나누어 빛이 닿는 구역을 돌아 다시 사람들을 급습했다.

이 무렵에는 백강풍 등도 잇달아 나서서 열화부(烈火符)를 던지거나, 각자 법기를 사용하여 거센 화염과 갖가지 불덩어리로 흡혈박쥐 떼에 맞섰다.

박쥐들을 주시하고 있던 심협은 문득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그의 눈에 손바닥만 한 딱정벌레들이 새카맣게 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벌레들은 검은 물결처럼 백가 사람들의 발밑을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딱정벌레의 등은 검은색의 딱딱한 껍질이 덮여 있었는데, 그 표면에는 뾰족한 가시가 빽빽했고, 머리에는 집게 같은 주둥이가 날카롭게 자라나 있었다. 게다가 아주 짙은 녹색 시기(*屍氣: 부패한 시체가 내뿜는 기운)가 벌레의 온몸을 휘감고 있어 얼핏 보아도 맹렬한 시독(*屍毒: 시체가 부패하면서 생기는 부패독)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이미 시별(*屍蟞: 오래된 무덤 안에서 음기를 먹고 자라는 곤충으로 맹독을 지님)이 자라다니! 보아하니 이 동굴 안에는 분명 벌써 홍모강시(紅毛僵屍)가 생겨났을 게다.”

구혼마면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한 후에야 심협은 저 우글우글한 벌레들이 고서에서 본 적이 있는 시별(屍蟞)임을 알게 됐다.

고서에 따르면, 저것들은 음기를 먹이로 삼는다. 또한 항상 홍모강시를 따라서 함께 생기고, 그 자체에 시독을 지니고 있어 물린 즉시 해독하지 않으면 몸에 시독이 퍼져 죽게 된다고 했다. 만약 죽지 않는다 해도 홍모강시에게 조종당하는 산송장으로 변한다고 하는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

그때 백가 사람들 사이에서도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시별을 조심하시오!”

사우흔은 그렇게 외치며, 허리에 두르고 있던 붉은 비단을 끌러 끝부분을 잡고 가볍게 한번 털었다. 그러자 비단은 불로 만들어진 구렁이처럼 꿈틀대며 뻗어 나가 사람들 주위를 에워쌌다. 그러더니 화염으로 변해 사람들을 보호했다.

하지만 시별은 멈추지 않고 밀물처럼 다가와 사람들을 포위한 채 끊임없이 화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럴 때마다 타다닥 소리를 내며 불탔지만, 그럼에도 전혀 물러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녹색 시기가 삽시간에 화염 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라, 얼마 후 일대를 완전히 뒤덮었다.

불길이 사나워지자 땅 위의 시별들은 동그랗게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화염에 부딪치니 바깥의 시별들은 타 죽었지만, 중앙에 있는 것들은 한두 마리라도 살아서 불길을 뚫고 사람들을 습격했다.

다행히도 백소천의 다섯째 할머니는 박쥐와 시별들에 맞서느라 정신이 없는 사람들 한가운데에 서서 빈틈을 찾아 메웠고, 화염을 뚫고 들어오는 놈들을 제거했다. 엄숙한 그녀의 얼굴에는 주름이 깊었고, 몸의 피부 또한 탄력을 잃고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두 손만은 옥같이 희고 아름다워 소녀의 그것처럼 매끄러웠다. 몽롱한 백색광에 감싸인 그 손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손끝에서는 맑고 투명한 세침(細針)이 발사되어 시별과 흡혈박쥐들을 찔러 죽였다.

* * *

동굴 가장 깊은 곳. 사방 곳곳에 녹색 빛을 뿜어내는 정석(*晶石, 질이 투명하고 벗겨지기 쉬운 결정체의 광물)들이 돋아나 있는 지하 석회굴 안에서는 음기가 거의 실체에 가깝게 짙어지고 있었다.

중앙 바닥에는 둘레가 수척에 이르는 검은 못이 있었는데, 물은 시커멓고 끈적한 것이 마치 석유 같았으며, 형용하기 어려운 괴상한 냄새를 풍겼다. 수면 위로는 이따금 둥근 기포들이 한두 개씩 올라왔는데, 기포가 터질 때마다 안에 있던 검은 기운들이 굼실굼실 솟아올랐다.

못 위의 둥근 동굴 천장에는 검은 실로 이루어진, 높이가 수척에 이르는 고치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고치들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좁고 긴 틈이 벌어져 있었는데, 안은 이미 빈 상태였다.

하지만 가장 오른쪽, 마지막 남은 온전한 고치는 안에 무슨 생물체가 감싸여 있는지 표면이 수시로 여기저기 불룩 솟아올랐고, 마치 안에 든 생물이 고치를 뚫고 나오려는 것만 같았다.

아래쪽 연못 수면에 돌연 물거품이 부글부글 솟아오르기 시작하더니, 사람의 형체를 한 그림자 두 개가 그 안에서 차츰 떠올랐다. 절반 정도 밖으로 나오자 몸에 묻어 있던 진득한 검은 액체가 흘러내리면서 본래 모습이 드러났다.

왼쪽은 온몸이 백옥처럼 하얗게 빛났는데, 몸의 표면에 피와 살점이 전혀 없는 백골요괴였다. 두 눈구멍에는 시퍼런 화염이 번득였고, 손목과 발목, 허리에는 가죽 재질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등 뒤에 하얀 골검(骨劍) 두 자루를 좌우로 교차하여 맨 모습이 괴이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그 옆에는 흉악하게 생긴 변이된 강시가 있었는데, 온몸에는 비늘이 빽빽하게 돋아 있었고, 비늘 조각 틈새에는 붉은색 짧은 털들이 한 겹 자라나 있었다. 각진 얼굴에는 수분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피부는 말라서 오그라든 상태였다. 눈알은 바깥으로 툭 튀어나온 데다 새하얀 이빨과 시뻘건 잇몸이 바깥으로 죄다 드러나 있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두 귀물의 가운데에는 언뜻 발견하기 어려운 검은 기운 덩어리가 하나 있었다. 물에서 서서히 생겨난 그 기운의 안쪽에는 어렴풋이 물소 형상 야수의 허영(虚影)이 끊임없이 날뛰는 게 보였는데, 바로 건업성에서 소란을 일으켰던 진하수수였다.

끈적한 검은 물에서는 검붉은 안개가 끊임없이 퍼져나가, 마치 그들의 자양분처럼 세 귀물의 몸에 감겨들었다.

석회굴 사방 벽에는 검고 단단한 껍질을 두른 시별들이 빽빽하게 기어올랐고, 천장에는 거꾸로 매달린 흡혈박쥐가 가득했다. 그 수는 이미 동굴 밖으로 뛰쳐나간 것들과 비교해도 결코 적지 않았다.

바로 그때, 별안간 어디선가 가벼운 목소리가 울렸다.

“제물이 제 발로 찾아왔구나.”

목소리가 울리자 백골요괴의 눈구멍 속 푸른 불꽃이 요동치며 더욱 밝게 번득였고, 곁에 있던 홍모강시는 바로 몸을 날려 검은 못가에 내려섰다.

“이 홍강(紅僵), 전투에 나가길 청하옵니다.”

잔뜩 쉬어 까칠한 목소리가 홍모강시의 목구멍에서 울렸다.

뒤이어 백골요괴가 그 곁에 내려섰다. 그는 인간의 언어를 내뱉을 수는 없었지만, 두 손으로 등 뒤에서 골검을 뽑아 앞쪽의 지면을 엇갈리게 찌르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자신 역시 전투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검은 기운으로 화한 진하수수 역시 뒤처지기 싫다는 듯 검은 못 기슭 위로 날아와 허공에서 위아래로 날뛰었다.

“수살(水煞)은 남거라. 홍강, 백곡(白哭), 너희는 함께 가서…… 한 놈도 살려두지 말지어다.”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리자 홍강과 백곡, 즉 홍모강시와 백골요괴는 바로 몸을 일으켜 명을 받들었고, 진하수수만이 고분고분하게 다시 못 속으로 날아 돌아갔다.

홍강의 몸이 한 번 뛰어올라 동굴 입구에 이르자 사방에서 수천수만의 시별이 곧바로 그 발밑에 모여들어 한 줄기 검은 강물을 이루었다. 그리고는 세차게 용솟음치며 그를 동굴 바깥으로 밀고 나갔다.

백곡은 홍모강시와 달리 아무런 법술을 부리지 않고 직접 걸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통로 바닥에 흩어져 있던 마른 뼈들이 한데 모여 불완전한 형체의 백골요괴가 되더니, 그를 따라 함께 밖으로 향했다.

방대한 물결을 이룬 시별은 이미 사우흔의 화염 방어선을 뚫고 백가 사람들을 향해 밀어닥치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수많은 전투를 겪어온 백가 사람들의 얼굴에는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백학성이 한 차례 명을 내리자 그들은 모두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그때, 그들의 머리 위가 홀연히 거대한 검은 그림자로 뒤덮였다. 그러더니 집채만 한 황색 동전이 엄청난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떨어져내려 태산처럼 그들 주변을 내리 눌렀고, 골짜기 전체가 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땅에 떨어진 황색 동전은 모래가 날리고 돌 조각이 튈 정도의 광풍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싼 수만 마리의 시별을 전부 곤죽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백가 사람들은 동전 중앙의 네모진 구멍에 들어가 있어 모두 무사했다.

“낙보동전(落寶銅錢)이 정말 큰 도움을 주었군요.”

풍릉은 날아다니며 적을 베는 종이부채를 조종하면서도 감탄을 잊지 않았다.

백강풍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기쁨이 가득했다.

백강풍은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손을 휘둘러 법기를 거둬들였다.

그들 주변에는 시별과 흡혈박쥐의 시체가 가득했다. 그들을 죽이려 들던 귀물들은 이미 완전히 소멸된 것이다.

백학성은 소매에서 비취색 도자기 병을 꺼내 그 안에서 단약 몇 알을 꺼낸 뒤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이것은 해시단(解屍丹)이오. 시기를 없애고 살기를 제거할 수 있으니, 모두들 복용한 뒤에 잠시 쉬도록 하시오. 잠깐 기력을 회복한 뒤에 함께 저 동굴로 들어가 요사스러운 것들을 일망타진 합시다! 이 일만 성공하면 백가에서는 절대로 여러분을 홀대하지 않을 것이오.”

“이번에 가주께서 철저히 준비하신 덕에 이리도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옷이 군데군데 적잖이 찢겨나갔지만 부상을 입지는 않은 백수도장이 백학성의 말에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가주께서는 안심하십시오. 반드시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좀 전의 전투에서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기에 사기가 올라 있던 사람들이 잇따라 호응했다.

“역시 백가가 건업성 제일세가 자리를 지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건가. 보아하니 꼭 조상들의 명성 때문만은 아닌 것 같군. 저 백학성이라는 자는 합당한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적절하게 사람들을 지휘하는구나. 확실히 가주다운 면모를 지녔어.”

구혼마면은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언제 나섭니까?”

심협이 곁에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조급해하지 마라. 아직은 때가 아니다.”

구혼마면은 그렇게 답하고는 허리춤의 호리병을 입가로 가져가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돌연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고는 손가락으로 오른쪽 산벽을 향해 튕겼다.

쿵!

작은 돌멩이였으나 결코 작지 않은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가 왼쪽 산벽 동굴 속으로 떨어져 들어갔다.

“조심하시오! 뭔가가 있소!”

그 소리를 들은 백학성이 순간 낯빛을 굳히며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 역시 재빨리 촉각을 곤두세우며 손에 법기를 들고 경계하는 눈으로 동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울부짖는 듯한 바람소리와 함께 동굴에서 별안간 붉은 형체가 튀어나와 군중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바로 홍모강시, 홍강이었다.

홍강은 두 손을 앞으로 뻗은 채 손 끝에 금속과 같은 섬뜩한 빛을 번쩍이며 사우흔의 가슴을 향해 곧장 내찔렀다.

곁에 있던 백학성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는 곧장 몸을 날려 막아섰고, 손에 쥔 구양경으로 정면에서 홍강을 비추었다. 구양경은 천지양기의 힘을 빌리는 대신 백학성의 법력으로 효력을 발휘하여 눈부신 백색광을 뿜어내 홍강의 이마를 내리쳤다.

“크아악!”

홍강은 처참하게 울부짖으며 나가떨어졌고, 이마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