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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57화 (157/1,214)

157화. 장풍곡에 들어가다

잠시 후 그들은 어느 산골짜기에 나타났다.

심협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흘끗 보고는 지금이 오시(午時)임을 알아차렸다. 오시는 한낮이라 양기가 가장 왕성할 때지만, 눈앞의 골짜기에서는 서늘한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와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그는 시선을 골짜기 입구로 옮겼다. 그러자 그곳을 뒤덮고 있던 옅은 안개가 미미하게 골짜기 밖으로 흩날려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골짜기 안을 들여다보니, 그 안으로는 안개가 점점 더 짙어져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지난번 왔을 때보다도 음살이 더 짙어졌구나. 골짜기 위의 하늘을 보아라. 살기에 물들어 조금 이상해지지 않았느냐.”

구혼마면의 말에 심협은 고개를 들어 하늘 높은 곳을 올려다보고서야 골짜기 바로 위 허공에 타원형의 검은 먹구름이 떠 있음을 알게 됐다. 또 처음에 보았을 때는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으나, 자세히 보니 골짜기 안쪽의 안개가 용솟음치며 흉악하고 공포스러운 원귀들의 얼굴이 앞다퉈 떠오르는 것도 희미하게 보였다.

“먹구름이 정상을 뒤덮었고 안으로는 살기가 가득하니 정말이지 불길한 곳 같군요.”

심협이 눈길을 거두며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한창 골짜기에 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별안간 골짜기 밖 먼 곳에서 한바탕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구혼마면은 즉시 심협의 어깨를 잡아당겨, 멀리 떨어진 거대한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저 멀리서 사람과 말들이 무리를 이루어 길을 따라 다가왔다.

선두에 선 사람은 유삼(儒衫)을 입고 있었고, 나이는 서른쯤 되어 보였으며, 용모가 준수하고 기품이 있었다. 백가의 가주 백학성이었다.

그 뒤를 바짝 따르는 이는 회색 장포를 입은 작달막한 노인으로, 앙상하게 마른 얼굴 위로는 회백색 머리칼이 늘어져 있었다. 바로 백강풍이었다.

두 사람 외에도 뒤로 네다섯 명의 인영(人影)이 있었는데, 보아하니 모두 백가의 공봉(*供奉: 객경과 비슷하지만 특정한 이유로 가문이나 조직에서 일방적으로 부양하는 구성원)과 객경이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이는 당연히 붉은 옷을 입은 아리따운 여인, 사우흔이었다.

회백색 도포(道袍)를 입은 백수 도장과 부채를 손에 들고 부채질을 하고 있는 풍릉도 보였으나, 오동과 초려는 보이지 않았다. 그 외도 낯익은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깡마른 체구에 은빛 머리칼을 머리 뒤로 묶고 있으며, 기력이 아주 정정해 보이는 그녀는 바로 백가의 호수 밑 밀실을 지키고 있던, 백소천의 다섯째 할머니였다.

“백가 가주께서 친히 무리를 이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저 다섯째 할머님까지 출동하신 걸 보니, 백가에서 작정하고 장풍곡 임무를 해결하려나 봅니다. 이리 되면 선배님께서는 수고를 더시겠습니다.”

심협은 침을 꿀꺽 삼키고 구혼마면을 보며 웃었다.

“한낱 인간 수사들의 실력만 믿고 특별한 준비 없이 저기 들었다가는 목숨만 위태로워질 것이다. 허나 누군가 선봉을 맡는 것도 괜찮지.”

구혼마면의 싸늘한 대꾸에 심협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고, 눈에는 망설임이 스쳐갔다. 그는 곧장 바위 앞으로 나가려 했다.

“무슨 짓이냐?”

구혼마면이 그를 막고는 꾸짖듯 물었다.

“그들의 실력으로 부족하다면 당연히 막아야지요. 다른 사람은 상관없지만 백가와 저의 관계는 남다릅니다. 그러니 저는 백학성 백부님과 백강풍 선배님이 사지로 걸어 들어가시는 걸 두 눈 뜨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심협이 단호하게 답했다.

“누가 저들이 사지로 들어가게 둔다더냐? 우리가 온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는 게냐?”

구혼마면이 되받아쳤다.

“그렇다면, 저들이 선제공격을 해 장풍곡 귀물들의 주의를 끌게 하고, 그 틈에 곧바로 귀물들의 요지를 공격해 음살의 근원을 찾자는 말씀입니까?”

심협은 퍼뜩 놀라 되물었다.

“이제야 머리가 좀 돌아가는 모양이구나. 우리가 음살의 근원을 해결하면 그들은 자연히 위험에서 벗어나게 될 게다. 그리고 네가 가서 뜯어말린다고 저들이 들어주기나 할 것 같으냐?”

구혼마면은 한숨을 푹 내쉬며 심협에게 눈을 한 번 흘기고는 되물었다.

심협은 잠시 생각해보고는 그 말이 옳다는 걸 깨달았다. 백가 두 어른은 그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줄지도 모르지만, 기껏해야 경각심을 좀 높일 뿐, 절대로 그의 말 몇 마디 때문에 이번 임무를 포기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 무렵, 백가 사람들의 대열은 장풍곡 입구에 이르렀다. 그들이 멈춰 서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백강풍이 청심부를 꺼내 모두에게 한 장씩 나눠주었다.

“골짜기에 안개가 자욱하니 귀신에게 홀려 같은 곳에서 계속 빙빙 돌게 될 수도 있소. 안개의 유혹을 받지 않도록 다들 이 청심부를 잘 챙기시오. 장풍곡에 들어가면 내가 앞장설 것이고, 가주가 후미를 엄호할 것이니, 나머지 사람들은 중간에서 장사진(長蛇陳)을 치고 양옆을 잘 살펴 귀물들의 습격에 방비하시오.”

백강풍이 사람들에게 분부하자 백가 객경들이 잇달아 대답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대열을 배치한 뒤, 백학성이 다시 한번 ‘부디 조심들 하라’는 당부를 하고 난 후에야 이동했다.

장풍곡 입구의 안개 앞에 이르자 백강풍은 노란색 부적을 꺼내 반으로 접은 다음, 가장자리를 뾰족하게 각이 지도록 접더니 휙 내던졌다.

부적은 노란 빛을 발하며 화살처럼 날아가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빠른 속도로 화르륵 불타올라 사라졌다.

“파장부(破障符)가 장애물을 만나지 않은 걸 보니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군.”

백강풍이 긴장한 표정을 살짝 풀며 말했다.

그제야 백가의 대열은 장풍곡 안으로 들어섰다.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로 희뿌연 안개에 삼켜지면서 흐릿해지다가 차츰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안개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춘 후에야 구혼마면과 심협은 바위 뒤에서 걸어 나왔다.

“보아하니 백가에서 그래도 준비를 적잖이 한 모양이구나. 내가 그들을 좀 얕잡아본 게로군. 저 정도 신중함이라면 장풍곡에서 살아 나오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게다.”

구혼마면이 찬탄한 듯 말했다.

“저희는 따로 준비할 거 없습니까?”

심협은 은근 근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 안개는 그저 음살이 치받쳐 올라온 것에 불과하다. 음한한 기운이 공기 중의 물기를 응결시켜 만들어진 것이지. 살기가 뒤섞여 있어 평범한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겠지만, 수사들에게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다.”

구혼마면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툭 내뱉듯 말하고는 앞장서서 장풍곡 입구의 안개로 향했다. 심협은 살짝 망설였지만, 이내 뒤를 따랐다.

장풍곡에 들어서자 심협은 금세 주위가 습해진 것을 느꼈다. 하지만 구혼마면의 말대로 안개가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자 한층 마음이 놓였다.

두 사람이 천천히 길을 따라 걷는 동안 사방에는 찐빵 같은 모양의 봉분들이 난잡하게 불룩 솟아 있는 게 보였다. 어떤 봉분 앞에는 나무로 만든 묘비가 꽂혀 있었고, 어떤 것은 봉분이 이미 무너져 내려 관의 널빤지까지도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더 많은 무덤 바깥에는 바싹 마른 백골들이 토막토막 흩어져 있었고, 위에는 들쭉날쭉한 깊이로 들짐승들의 이빨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눈길 닿는 것 모두가 스산하고 활기가 없었다.

안쪽으로 더 들어서자 어지럽게 솟은 무덤은 좀 줄었지만, 눈앞의 안개는 갈수록 짙어져 불과 3척 너머도 흐릿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심협은 정신을 집중해 주위의 모든 동정에 귀 기울였다. 하지만 쥐 죽은 듯 조용해 그와 구혼마면이 진흙과 마른 낙엽을 밟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다행히 일각(一刻)정도 지난 후 짙은 안개로 뒤덮인 지역이 끝났고, 시야가 갑자기 탁 트였다.

심협은 앞을 바라보았다. 구불구불한 오솔길 하나가 검푸른 잡초 덤불에 숨겨져 있었다. 양옆의 나무들은 높고 거대했지만, 줄기는 곧 말라 죽을 것처럼 활력을 잃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생기를 빨리는 기분이었다.

“내게 바짝 붙어라.”

구혼마면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한마디만을 하고는 걸음을 빨리 하여 오솔길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심협은 부랴부랴 따라붙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오솔길을 따라 걸어 곧장 안쪽으로 향했다. 거대한 바위 하나를 돌아가자 장풍곡 끄트머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어느 협곡으로 통하는 길이었는데, 이미 붕괴되어 막혀 버렸고, 곳곳에는 돌무더기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인지 백가 일행도 협곡 왼쪽 산벽 앞에 멈춰 있었다.

심협은 그쪽을 살펴보다가 산벽의 3장 정도 높이에 거대한 동굴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동굴 안은 온통 칠흑같이 어두워 깊이를 알 수 없었으나, 짙은 음기가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만은 분명히 보였다.

백가 일행도 동굴에 들어가기 위해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

무리의 선두에 선 백학성이 갑자기 손을 한 번 휘두르자 소매에서 한 줄기 빛살이 튀어나와 허공을 한 바퀴 빙글 돌더니 동굴 위에 사선으로 떠올랐다.

이 빛은 놀랍게도 사람 머리만 한 오래된 청동거울이었다. 뒷면에는 어충조(*魚虫鳥, 물고기와 벌레, 새) 문양이 중앙의 부(符)자를 둘러싼 형태로 새겨져 있었고, 앞면은 몹시도 매끄럽고 반질반질하여 환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백학성이 작게 중얼거리며 한 손으로 결인한 후 청동거울을 가리켰다. 그러자 동경(銅鏡)은 누군가가 두드린 것처럼 금속이 울리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거울 면이 방향을 바꾸더니 위쪽의 밝은 백색광을 굴절시켰다. 굴절된 빛은 그대로 동굴 안으로 향했다.

이 백색광에는 작열하는 순수한 양기가 담겨 있는 듯, 동굴 안에서 끊임없이 퍼져 나오던 음기를 말끔하게 흩어버렸다. 안쪽의 더 짙은 음기는 이 백색광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썰물 빠지듯 안으로 물러났다.

백가의 봉공과 객경(客卿)들은 이런 상황을 보고 백가주의 보물이 아주 신묘하고 효력이 대단하다며 감탄했다.

심협도 크게 감탄했다.

“구양경(驅陽鏡)……. 보아하니 이미 고급 법기가 된 듯한데, 지리적 우세를 점하지 못한 데다 때도 잘못 맞춰 결국 효력에 한계가 생기고 말았으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구혼마면은 슥 훑어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선배님,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구양경이란, 천지의 순수한 양기를 빌려 살(煞)을 몰아내고 귀신을 멸하는 것이다. 주위의 양기가 왕성할수록 응집시킬 수 있는 순수한 양기 역시 강해지지. 안타깝게도 이곳은 음살과 귀물들이 둥지를 튼 곳인지라 지리적인 우세를 점할 수 없다. 게다가 지금이 정오이긴 해도 하늘이 먹구름에 가려졌으니 시간적 우세도 빌리기 어렵지. 그러니 원래 효력의 절반만 발휘해도 훌륭한 게다.”

구혼마면은 탄식하며 설명했다.

그때였다.

꽈르릉!

산벽 동굴 안에서 갑자기 천둥소리 같은 굉음이 울렸다. 구양경의 백색광에 몰려 동굴 안으로 물러났던 짙은 음기가 어느새 다시 밀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어두침침한 안개 속에서 강아지만 한 검은 박쥐 떼가 끽끽거리는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우르르 쏟아져 나와 동굴 밖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심협은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온몸에는 검은 빛이 번득이고, 멧돼지 같은 검은 얼굴에는 피를 빨기 위해 새하얗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비대한 박쥐들을 보자 소름이 돋았다.

“흡혈박쥐다! 모두들 조심하시오!”

백학성은 크게 외치고는 즉시 손목을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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