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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56화 (156/1,214)
  • 156화. 연이은 돌파

    심협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띤 채 재빨리 두 손을 내밀어 조심스레 병을 건네받아 붉은 천으로 된 병마개를 손길 가는 대로 뽑았다.

    주둥이가 열리자 병 안에서 유황 냄새 비슷한 것이 풍겨왔다. 심협은 그 냄새에 조금 불쾌한 듯 인상을 썼다.

    “이 음영단은 전혀 신묘한 영약 같은 냄새가 나지 않는군요. 저를 속이시는 건 아니겠지요?”

    “싫으면 내놔라.”

    구혼마면이 얼굴을 굳히곤 짐짓 성을 내자, 심협은 얼른 병마개를 닫고 도자기 병을 소매 깊이 쑤셔 넣고는 겸연쩍게 웃었다.

    “농담이니 마음 푸십시오! 적당한 곳을 찾아 며칠간 폐관하게 해주시지요.”

    “따라 오거라.”

    구혼마면은 말을 마치고 탁자 위에 동전 몇 닢을 올려 둔 뒤, 몸을 일으켜 관도(官道)로 나갔고, 심협은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말없이 1리 정도 걸어 성 입구에서 멀리 떨어졌을 때, 구혼마면이 돌연 발걸음을 멈췄다.

    “선배님, 무슨 일입니까?”

    심협이 곁으로 다가오며 의아한 듯 물었다.

    “다른 길로 가자.”

    구혼마면은 종잡을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심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분명 길은 여기 하나뿐이었다.

    ‘다른 길로 가자고? 무슨 소리야?’

    의아해하는 그의 눈에, 구혼마면의 손가락 사이에 누르스름한 부적 한 장이 끼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구혼마면은 자신의 어깨를 툭 치더니, 다른 손으로 심협의 어깨를 붙잡았다.

    “가자.”

    구혼마면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심협은 발밑의 땅이 진흙탕처럼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몸이 한 겹의 노란빛에 싸여 땅속으로 가라앉았다.

    ‘둔지술(遁地術)?’

    심협은 놀랍다 못해 거의 경악한 상태로 구혼마면에게 붙잡혀 땅속을 미친 듯 내달렸다. 진흙이든 암석이든 그들의 질주를 방해하기는커녕 알아서 길을 내주었다.

    동시에 저 아래쪽의 진흙은 두 사람을 태운 채 물살처럼 세차게 흘렀다. 힘껏 달리는 것보다도 몇 곱절은 빠른 속도였다.

    심협이 여전히 둔지술의 신통함에 감탄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은 이미 땅 밑바닥의 동굴에 도착해 있었다.

    동굴은 꽤 넓었다. 안에는 지하로 지나는 하천이 흘렀다. 머리 위로는 갈라진 틈이 한 줄기 있었는데, 그 사이로 어렴풋한 빛이 뚫고 들어와 동굴 밑바닥을 몇 척 너비로 비추었다.

    “여기서 폐관하거라. 대신 7일 뒤면 6층으로 돌파했든 하지 못했든 너는 나를 따라 장풍곡으로 들어가야 한다. 약조하거라.”

    구혼마면은 심협을 바라보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심협은 엄숙한 표정으로 약조했다.

    이어서 그는 소매에서 백옥처럼 하얀 도자기 병에서 샛노란 단약 하나를 꺼냈다. 고작 용안(龍眼: 하얀 과육을 가진 과일의 일종)의 씨만 한 단약에서 풍기는 짙은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심협은 숨을 참고, 단약을 털어 넣고는 꿀꺽 삼켰다. 이어서 두 손을 몸 앞으로 뻗어 항아리를 끌어안은 듯한 자세로 눈을 감고는 가부좌를 튼 채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뱃속의 단약은 빠르게 운화(運化)하여 한 줄기 난류로 변해 단전에서 흐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따사로운 것이 꽤나 편안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난류가 단전 안의 법력과 융합하기 시작하면서 두 기운의 결합은 마치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처럼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심협은 절로 끙 하고 신음했지만, 곧장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결인한 채 온 힘을 다해 작열하는 기운을 움직이며 단전의 법력을 온몸의 경맥으로 보냈다. 그의 몸에서는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빛줄기들이 한 가닥씩 떠올랐고, 정수리에서도 끊임없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구혼마면의 눈에 흠칫 놀한 기색이 스쳤다.

    “이 녀석, 자질은 평범해 보이는데 법력을 운공하는 방법은 능수능란하군. 연기 중기의 수사(修士) 같지가 않아. 음영단 약효의 8할이나 흡수하면 다행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꼭 그럴 것 같지도 않군.”

    구혼마면은 감탄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가 어찌 알았겠는가. 심협은 꿈속 세상에서 출규기 대수사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법력을 온몸으로 운공하는 경로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능숙하다는 것을……. 현실에서 수련이 더딘 이유는 자질이 떨어지는 몸뚱이의 영향 탓일 뿐이었다.

    구혼마면은 심협의 상태에 흡족해하며 자신 역시 한쪽에 가부좌를 틀었다.

    이 무렵, 심협은 온몸이 바싹 말라 견딜 수 없이 더웠다.

    ‘이렇게 불같이 뜨거운 단약을 어찌하여 음영단이라 부르는지 모르겠군!’

    사실, 이 음영단 속 황천수정(黃泉水精)과 피안화 가루는 음(陰)의 속성이지만, 그 기운은 아주 맹렬했다. 또한 방출해내는 약효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몸을 이롭게 하는 힘 외에도 강력한 추진력을 갖고 있었다.

    기운을 더 확대하고 북돋우는 약효에 의해 심협 체내의 법력은 억지로 밀려 올라가 경맥에서 흐름을 거스르며 치솟았다. 그러자 그간 전혀 뚫리지 않았던 혈들이 하나하나 연이어 뚫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심협은 현재 법맥이 전혀 응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 모든 경맥의 너비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법력이 세차게 몰아치니 무수한 칼날이 속을 헤집는 것만 같았고,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크아아아!”

    끝내 심협은 참지 못하고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깜짝 놀란 구혼마면이 돌아보았으나, 심협의 온몸이 한 꺼풀 빛에 감싸여 있는 것만이 보일 뿐이었다. 빛은 깜빡이며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는데, 그 모양이 기이했다.

    구혼마면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딱히 간섭하지는 않았다. 이미 여기까지 진행되었으니 이제 모든 것은 심협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지금 심협은 온몸의 경맥이 시련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식해(識海)까지도 법력의 충격을 받은 상태라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한 줄기 신념(神念)을 굳건히 지키며 무명공법을 운공해 법력이 정확한 경로를 따라 움직이도록 이끌었다.

    * * *

    어느덧 머리 위의 햇빛도 차츰 빛을 잃어갔다. 어둑어둑한 저녁을 지나 별이 총총한 밤이 되었고, 하늘을 뒤덮었던 밤의 장막에 다시 아침 햇살이 비추었다.

    그렇게 삼일이 지난 이른 새벽, 아침 햇살이 머리 위의 틈으로 비추는 순간, 심협은 돌연 감았던 두 눈을 떴다. 그의 입에서는 가벼운 탄식이 터져 나왔고, 몸에서는 한 줄기 기운이 별안간 뿜어져 나와 한 차례 먼지바람을 일으켰다.

    “아하하하!”

    뒤이어 심협은 큰소리로 통쾌하게 웃었다.

    그는 몸을 뒤집고 일어나 두 팔을 흔들어 흙먼지들을 털어낸 뒤, 눈을 감고 잠시 체내의 기운을 느껴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이미 연기 7층에 진입했을 뿐만 아니라, 8층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됐다.

    “이 녀석, 내 눈이 삐었던 모양이구나. 사흘 만에 두 단계를 돌파하다니!”

    구혼마면이 다가오며 놀란 목소리로 감탄했다.

    “그건…….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선배님께서 주신 영약의 효과가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것 같긴 합니다.”

    심협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실제로 그 자신도 어떻게 이토록 신속하게 7층에 진입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꿈속에서의 수련을 연상해보면 마음속에 어렴풋하게 짐작이 갈 뿐이었다.

    ‘현실에서 나의 자질은 평범함에도 미치지 못하지. 그러니 체내의 경맥은 꿈에서처럼 자연스럽거나 매끄럽지 못하고, 법력 운공 속도가 느려져 수련 속도 역시 더뎌지는 것이다. 하지만 꿈속에서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 덕에 범인(凡人)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관문인 공법에 대한 터득이 내게는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부족한 신체적 자질은 문제다. 허나 이 음영단에 담긴 강력한 영력이 나의 깨달음과 신체적인 한계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해, 짧은 시간에 육신의 한계를 깨부수고 법력이 빠르게 운공된 것이다. 그래서 나의 수행속도가 빨라진 거야.’

    “이 녀석아, 또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는 게냐?”

    구혼마면이 깊은 생각에 잠긴 심협을 가볍게 꾸짖었다.

    “아, 별것 아닙니다. 그저 어찌 이토록 수행속도가 빨라졌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선배님, 혹시 음영단을 더 가지고 계십니까? 아직 며칠 시간이 남았으니 수련 경지를 한두 단계 더 높일 수 있다면, 장풍곡에서도 선배님께서는 그저 명령만 내리시면 될 테지요. 어디든 말씀만 하시면 저의 뇌부가 그 자리에 내리 꽂힐 테니까요.”

    심협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뭐야? 음영단이 어째? 내 한 알을 준 것만으로도 몇 달은 족히 아까워 할 터인데, 더 내놓으란 말이냐? 어림도 없다!”

    구혼마면은 정말로 화가 났는지, 얼굴 근육에 경련까지 일으키며 나무랐다.

    “물론 저도 뻔뻔스럽게 그냥 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선배님께서 원하신다면 제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사고 싶다는 겁니다.”

    심협은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이번에 네게 한 알을 준 것만으로도 이미 규율을 깨뜨린 것이다. 그러니 더는 생각지도 말거라.”

    구혼마면은 소맷부리를 한번 휘두르며 말했다.

    ‘꼭 공짜로 주신 것처럼 말씀하시네. 곧 선배님을 따라 목숨 걸고 장풍곡으로 가는 대가 아닙니까?’

    심협은 더 이상 음영단을 달라고 조르지는 못하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심 구혼마면에게 무척 고마워했다.

    “선배님, 음영단을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심협이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구혼마면은 잠시 망설인 끝에야 답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알려주십시오, 선배님.”

    심협은 기쁜 마음에 재빨리 덧붙였다.

    “지난번 내 너에게 저승에서는 응혼기 이상 수사가 되어야 특수한 임무에 참여할 자격이 생긴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느냐?”

    “물론이지요. 그런 수사들은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특별한 대가를 얻을 수 있다 하셨는데…… 혹시 음영단도 그중 하나입니까?”

    심협이 물었다.

    “임무를 통해 단약을 얻을 수 있는 건 확실하다. 음영단뿐만 아니라 더 높은 경지의 다른 단약들도 얻을 수 있지. 사실 그 외에도 다른 이점들이 꽤 많다. 예를 들어, 저승의 다른 음병귀장(陰兵鬼將)들을 소환하는 일회성 통령계약을 얻게 될 수도 있고, 저승에서 다스리고 있는 일부 귀역(鬼域)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을 받기도 하지.”

    구혼마면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기뻐하던 심협은 다소 의기소침해졌다.

    “모두 응혼기 수사가 되어야만 받을 수 있는 대우이니, 저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로군요.”

    “너 귀시(鬼市)라고 들어본 적 있느냐?”

    “귀시라……. 고서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특정한 시각, 특별한 장소에 저승과 이승이 교차하는 장소가 있는데, 그곳에는 귀시가 함께 나타난다지요. 저승의 귀물(鬼物)들이 교역하는 곳이라던가요? 이승의 사람이 그곳에 잘못 발을 들이면 대부분은 귀물들의 거짓에 속아 지찰(*紙札: 장례 때 쓰는 종이 공예품)을 한 무더기 사고 쓸모없는 지전(紙錢)을 허다하게 바꿔온다 했습니다.”

    심협이 고서에서 본 내용을 떠올리자 구혼마면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들은 모두 속세 사람들이 제멋대로 추측한 것뿐이다. 심지어 귀신에게 침을 뱉어 그를 산양으로 변하게 한 뒤 귀시에 데려가 팔았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도 있더구나. 진정한 귀시는 본디 이승의 수사들이 저승의 귀물들과 교역하는 장소이니라. 그곳에서 음영단을 얻을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심협은 구혼마면의 말에 마음이 동하여 냉큼 물어보았다.

    “선배님, 그렇다면 귀시는 언제, 어디에서 열립니까?”

    “이놈이 아주 나를 탈탈 털어 먹으려 하는구나! 귀시에 관한 정보를 네놈에게 알려주고 말고는 네가 장풍곡에서 어찌 하는지를 보고 정하마!”

    구혼마면은 심협에게 손바닥을 보이며 단호하게 잘랐다.

    “안심하십시오, 선배님! 꼭 귀시 때문이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이번에 수련의 경지를 족히 두 단계는 끌어 올렸으니 다른 건 몰라도 법력은 확실히 충만해졌습니다. 낙뢰부를 두어 번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요, 돌발 상황에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심협이 웃으며 대꾸하자 구혼마면도 표정을 살짝 누그러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일을 지체해서는 안 되니 바로 출발하자꾸나.”

    말을 마친 그는 어느새 꺼낸 부적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더니, 다시금 심협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둔지술을 시전해 빠르게 지하 동굴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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